[묵상글]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전봉석 2022. 2. 18. 05:23

 

오늘부터 내가 천하 만민이 너를 무서워하며 너를 두려워하게 하리니 그들이 네 명성을 듣고 떨며 너로 말미암아 근심하리라 하셨느니라

신 2:25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 27:4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을 짧게 정리하고 있다. 싸워야 할 상대가 있고 싸우지 말아야 할 상대가 있고, 싸워야 할 때가 있고 싸움을 피해야 할 때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강한 자들인 것을 알린다. “오늘부터 내가 천하 만민이 너를 무서워하며 너를 두려워하게 하리니 그들이 네 명성을 듣고 떨며 너로 말미암아 근심하리라 하셨느니라(신 2:25).”

 

모세는 마지막 책을 기술하고 있다. 신명기는 ‘이것이 그 말씀들이다.’ 하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데바림’이다. 헬라어로는 ‘두 번째 율법’이란 뜻의 ‘쎄우우테로노미온’이라 한다. 주신 율법-말씀에 대한 해설이며 요약이다. ‘쉐마, 이스라엘!’ 곧 ‘들으라! 이스라엘!’이란 의미로 함축된다. 앞서 1장과는 38년의 간격이 있다. 이를 돌아보며 광야 40년의 세월을 회상하며 기록하고 있다.

 

알지 못하던 새로운 세계와의 싸움, ‘헤렘’은 진멸의 전쟁이다. 약속의 땅 가나안은 본래 선조들에게 주신 약속의 땅으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살았던 곳이다. 본래의 땅으로 돌아가는 셈이다. 지혜자의 말처럼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나니, 우리의 본래 본향을 행해 나아가는 여정이기도 하다.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전 1:4).”

 

결국 우리에게 책임감을 되새기게 한다. 이를 위하여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는 곳’을 향하여 말씀만 의지하고 나아갔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1-2).” 길을 잃고 영원히 방황할 때 우리를 십자가의 도로 이끄신 이가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러므로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3).”

 

이는 주를 믿는 자로서의 의무이고 책임감이다.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 21:6-7).” 이와 같은 약속을 붙들고 우리 안의 헛된 두려움, 의심과 회의, 갈등 따위들을 물리쳐야 한다. 그 결과는 믿지 않는 자들과 다를 게 없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8).”

 

이처럼 말씀을 따라가다 보면 성경을 왜 우리에게 주셨는지, 모세는 언제 어떤 시간을 내어 이와 같이 모세오경을 기록하였는지 상상하게 된다. 본문을 정하고, 연관 성경구절을 찾고, 주시는 마음을 메모하고, 일상에서의 연관성을 묵상하고, 이를 기록하였다가 주가 주시는 마음으로… 일주일 내내 나는 설교원고 한 편을 작성한다. 이처럼 매일 기록하는 나의 묵상글은 그 디딤판이 된다. 누구의 사연, 어떤 새로운 사실, 우연히 뽑아 들고 다시 읽는 책들과 그 내용의 새로운 느낌, 늘 쩔쩔매듯 다시, 다시 주 앞에 바로 서려하는 마음… 이러한 것처럼 모세의 기록도 필사적이었을까? 나는 종종 이 시간을 위해 필사적이다. 몸을 입고 사는 동안의 필연적인 어려움조차도 글감의 밑천이 되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실감한다.

 

곧 우리의 권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특권은 바로 이 실감으로가 아닐까? ‘실제의 체험.’ 누구에게 어찌 다 설명하기는 어려우나 하나님의 손길, 눈빛, 함께 하심, 위로 그리고 그때마다의 감동들을 나는 나의 졸필로는 표현할 길이 없다. 때론 베드로가 느꼈을 변화산에서의 황홀감으로, 때론 어느 시인이 느꼈을 하나님의 부재감에 이르기까지. 어느 가까운 훗날 베드로와 사도들의 고백이 실감난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5:29).”

 

전염병이 창궐하고 사람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들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제멋대로 판단하고 기준을 삼는 이 시대에,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30-31).” 우리 임금 되시는 구주를 생각하게 한다. 나의 삶의 주인 되시는 예수를 바라보게 된다. 곧 이제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32).” 하여 어떤 날은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두려움이 나를 짓누르고, 어떤 날은 그러므로 주를 더욱 바라며 주의 뜻을 살피게 되고….

 

아내는 오전 일찍 친정에 가지 않는 날이면 일찍 글방으로 나와 성경공부를 한다. 전체적으로 성경을 개괄하는 정도이지만 그 가운데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사람들의 됨됨이를 되새긴다. 저는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도 주를 의뢰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에서부터 어쩌자고 그런 확실한 축복을 가지고도 세상과 결탁하여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었을까? 하는 답답함에까지…. 결국은 이 모든 게 오늘의 우리 이야기이고 ‘그 땅’이 영원한 것처럼 사람의 됨됨이는 어쩔 수 없는가? 하는 회의에 빠지기도 하면서.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 3:23).” 단순히 종 된 자의 의무로만이 아니라 우리가 지켜야 할 권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기본을 가르치기도 한다.

 

곧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24).” 우리가 주를 믿고 따르고 순종하는 일은 막연히 그래야 하는 의무 때문이 아니다. 주께 받은 은혜가 크게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주께 드려지는 자신의 삶은 어쩜 이리도 초라하고 볼품이 없는지. 그럼에도 주는 우리를 외모로 취하지 않으셨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25).” 이를 알면 알수록 오늘 시편의 찬송이 내 것이고 영원히 내 것이기를 구하게 된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 27:4).

 

때론 외롭고 그래서 이 길이 맞나 싶을 때,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를 생각함으로 마음을 다잡는다. 이때에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5).

 

주가 나를 지키시고 보호하심을 확신하게 된다. 여러 어려움과 불편함이 있다가도 그것이 도리어 복이 되고 감사가 되는 것을 본다. 누구의 표현처럼 ‘사는 게 지옥’ 같은 나날이지만 그러므로 우리가 들어갈 본향을 바라며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다는 것. 오늘 본문 신명기 2장에서 모세의 회상을 들으며 저들이 돌아야 했던 그 먼 길을 같이 돌아왔던 것처럼 힘에 겹기도 하다. 그러나 또한 그것으로 남다른 주의 사랑을 실감하기도 하는 것이니,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6).

 

오히려 원수들의 땅에서 찬송이 흘러나온다. 어려움 가운데 길이 있다. 누가 다녀가고, 저의 이런저런 사연을 두고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그것이었다.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14).

 

이 얼마나 엄청나고 복된 특혜인가? 우리의 축복은,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요 17:24).” 하나님 아버지가 그리스도께 주신 자, 곧 나의 하루였다. 우리 믿는 자의 한 날이었다. 우리로 주의 영광을 보게 하여 주시기를, 주님은 날 위해 비신다. 주님의 기도는 눈물겹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18-21).

 

이는 그리스도의 사명인 동시에 우리에게 부탁하신 사명이기도 하다. 바울은 이를 정리하여,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9).” 무엇보다 내게 부탁하신 말씀, 화목하게 하는 말씀으로 하루를 열고 한 날 한 날을 살며 한 주간 설교원고 한 편을 작성하는 일은 귀하다. 여느 작가의 글쓰기나 주옥같은 설교와 글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나는 다만 ‘사랑에 빚진 자’로 살아갈 따름이다. 어디에 읽었고, 누구에게 들었고, 말씀을 인용하는 것을 빼고 나면 나의 글이란 게 참으로 면구스런 내용뿐이지만 그것으로 나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으니,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 이 놀라운 축복의 대열에 함께 선 것으로도 송구할 따름이라….

 

누구에게도 들려주었던 것처럼 ‘상처 입은 마음’은 무장한 장수의 갑옷 같고 ‘그리스도의 은혜가 머무시는 곳’기도 하다. 싸우자고 들면 상처가 무기가 되어 남을 찌르고 어떤 권면과 위로도 튕겨내는 아집이 되지만, 온유함으로 주를 바라자고 하면 나의 상처는 하나님이 머무시는 장소가 된다. 그때마다 주님은 나의 고통과 같은 고통을 겪으셨다. 그러므로 나를 가장 잘 아신다. 우리의 상처로 우리의 영혼이 성장하게 하신다. 그리고 그 상처는 새로운 상처를 참아내고 이겨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또한 반드시 우리 하나님은 그 상처를 치유하신다. 결국 그것으로 그리스도를 닮은 마음으로 바꾸어놓으신다. 어제도 아내와 성경공부를 하다, 요셉의 고백을 나는 그리 다시 읽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창 50:20-21).”

 

저의 상처와 역경은 짐작도 하기 어렵다. 누구라도 그의 권세를 가지고 얼마든지 복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들의 공통점은 놀랍다. 다윗도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도망하는 길에 사울의 혈족 시므이의 조롱을 이렇게 받아들인다.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이 길을 갈 때에 시므이는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저주하고 그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먼지를 날리더라(삼하 16:13).” 그러할 때에 이를 제지하고 죽이려 하는 자들에게 일러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10).” 그것까지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주가 다 아심을 다윗은 믿고 받아들였다.

 

요셉의 경우와 다윗의 처신에서, 저들은 자신들의 상처로 주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보는 놀라운 혜안을 보여준다. 오늘의 이런저런 일련의 사태와 상황, 그 가운데서 힘에 겨워 씨름하면서도 그것으로 우리를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게 한다는 것을,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살전 1:6-7).” 고로 내가 사는 동안에 나의 삶이 누구에게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본이 되었으면 좋겠다. 늘 어눌하고 보잘것없는 삶 가운데서,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후 1:5-7).” 왜 더 배우고 알려하고, 이를 삶으로 실천하려 하는가를 묵상하게 된다. 그러할 때에 “오늘부터 내가 천하 만민이 너를 무서워하며 너를 두려워하게 하리니 그들이 네 명성을 듣고 떨며 너로 말미암아 근심하리라 하셨느니라(신 2:25).” 누구라도 우리를 함부로 여기지 못하는 것은 주의 살아계심 때문이었다. 주의 인도하심은 남다르고 놀랍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시 27:1).

 

이 한 구절의 시행이 우리의 삶을 그대로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음미할 때에도,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4).” 이를 온전히 사나 죽으나 가장 귀히 여기며 살 수 있기를. 하여,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어떠하든지 나는 주의 것이라는 데서 안도한다. 그러므로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시 27: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