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시편 84편 /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

전봉석 2022. 2. 25. 08:21

220227 주일

 

시편 84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

 

시 84:1 [고라 자손의 시, 인도자를 따라 깃딧에 맞춘 노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시 84:2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시 84:3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시 84:4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

 

 

들어가는 말

 

인생은 이런저런 도전의 연속이다. 세상은 우리더러 ‘넌,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더러 ‘넌, 할 수 없다’고 하신다. 세상은 우리에게 ‘노력하면 불가능은 없다’고 한다. 성경은 우리더러 ‘아무리 노력해도 불가능하다’고 하신다. 한 마디로 성경은,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3).” 지혜자는 우리가 아무리 준비해도, 그 모든 결과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한다.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21:31).”

 

오늘 시험을 치르고 있을 아들이나 이번에 동계 올림픽에 출전했던 선수들의 결과를 보면서, 모두 ‘꿈과 노력의 결실’이라고 하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이를 설교하는 이는 노인 바울이다. 저는 옥에 갇혀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하고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다. 한데 그러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래서 저는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13-14).”

 

곧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 13:44).” 가치를 알 때 그 값어치를 위해 자신도 내어놓는 것이다. ‘죽기 살기로 뛴다’는 말, 오늘 시편은 ‘우리에게 우리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음’을 상기시키며 궁극적으로 우리가 경쟁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린다. 곧 우리가 주를 사랑한다면 그 증거가 나타나야 한다!

 

 

본문이해

 

84편의 시는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과 ‘우리의 간절한 소원’을 표현했다. 곧 주를 사랑한다면 그 간절한 소원도 같이 성립된다는 소리다. 마지막 구절, ‘주를 가까이 하는 것이 가장 큰 복’인 것을 아는 게 은혜다. 이 주제는 시편 120편에서 134편까지의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와도 일맥상통한다. 특히 오늘 시편의 5절과 7절에서는 우리가 ‘시온을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들인 것을 알린다. 즉 이 땅에 거주하며 안주하고 살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주의 장막인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중심으로 천성을 향해 나아간다. 1절에서 4절까지의 진술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시편 42편과 43편의 주제와 같이 <목마른 사람>으로 ‘주를 찾는 자의 심정’을 느끼게 한다. 한 마디로 주를 사랑한다면 사랑의 증거가 나타나야 한다.

 

오늘 본문을 간단히 분해하면, 1연은 1-4절로 주의 장막-교회를 사모하는 일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알려준다. 2연은 5-7절로 그렇게 교회를 사랑하는 자를 향하신 하나님의 각별하신 은혜를 알게 한다. 마지막 3연으로는 8-12절로 주께서 기름 부은 자 곧 우리의 부르심에 주의 은혜 베푸시기를 간구한다. 오늘은 본문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핵심, 첫째는 교회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은총이 집중된다는 것과 둘째는 각각 그 부르심에 합한 자-순례자로 살 때 주의 놀라우신 도우심이 보장된다는 것이다.

 

1.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시 84:1).”

 

대표적으로 바울은 교회를 위해 헌신한 종이다.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 11:28).” 온통 그 속에 교회 일로 가득하였다. 성도들의 모습과 형편을 살피고, 교회를 섬기는 데 있어 제 몫의 역할을 다하는 것 곧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 4:21).” 이는 목사라는 직업인으로서가 아니다. 우리는 모두 교회의 한 지체이다. 가장 불행한 일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된 인생’이다.

 

시편은 일러,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 84:2).” 곧 사모함이란 서로 떨어져 있는 마음으로 사무침의 다른 표현이다. 고난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욥은 저가 당한 처지에서도,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욥 19:27).” 마치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동시에 버림받을까 하는 두려움도 같이 있다. 그 사이가 멀어질까봐, 행여 나보다 다른 이를 사랑할까봐… 사랑은 동시에 초조한 질투를 내포한다. 우리 하나님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만큼 질투하시는 분이시다.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출 34:14).”

 

이에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 1:9).” 우리로 주와 더불어 교제하기를. 사랑이 초조한 것은 당연하다. 사랑하는데 연락을 해도 답이 없으면 어찌 ‘그런가보다’ 하고 느긋하겠나? 곧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 15:6).” 아무렇지도 않은 마음은 사랑이 아니다. 친절함과 친밀함은 엄연히 다르다.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도 엄연히 다르다!

 

이를 바로 알 때 우리가 누리고 사랑의 특권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지를 안다. 시인은 이를 알려주고 싶어 한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시 84:3).” 하찮고 보잘것없는 저것들도 ‘주의 제단’에서, 곧 주의 품에서 보금자리를 얻는데, 하물며 주의 자녀로 이미 창세전에 선택 받은 자들로 세상을 기웃거리고 산다면 이 얼마나 민망한 노릇인가? 교회를 피 값으로 사서 우리에게 두신 것은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저는 앞서 고백하였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 즉 모든 사랑에는 고백이 필수적이다.

 

2. 믿음의 순례자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시 84:4-5).”

 

부르심은 주의 길을 가게 하기 위한 것이다. 성경은 결코 우리에게 세상에서 잘 살라고 하지 않았다.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란,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시 43:3).” 즉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나오는 크리스천처럼 천성을 향해 나아가는 자들이다. 믿음은 거저 얻었으나 신앙은 거저가 아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 내 의지나 계획으로 사는 게 아니다. 천국은 마치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라는 농작물’과 같아서 우리의 ‘심음과 거둠의 원리’에 따라 적거나 많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고후 9:6).” 이는 세상 이치와도 같다. 물론 믿음으로 천국은 간다. 그러나 천국에서의 누림은 열 고을을 다스리는 자와 다섯 고을을 다스리는 자가 있다. 이를 차등이라고 하자. 차별과는 다르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라면 그 차이는 엄연히 드러나는 것이다. 이때 바울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 2:13-14).” 하는 설교에서도 보면 그리 행하는 자가 있고, 그리 행하지 않는 자도 있다는 소리다. 한데 모두가 똑같다? 오히려 이것이 불공평이다. 천국은 결코 ‘원망과 시비’가 없다. 모두가 만족한다. 다만 그 만족의 차등이 있어,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서로의 영광이 다른 것이다.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고전 15:41).” 이를 앎으로 순례자의 걸음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다. 이에 우리의 본문은 두 가지다.

 

첫째,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어야 한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5).”

 

시온의 대로가 있다하심은 포기하지 않고, 주의 선하신 일에 동참하는 것이다. 모세는 가나안을 앞둔 주의 백성들에게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신 9:5).” 곧 우리에게 약속하신 성경을 이루심이다. 그럼 어찌 행해야 할까?

 

① 교회를 중심으로 세상에 종노릇하지 말아야 한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전 7:23).”

 

②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고후 6:7).”

 

③ 기도에 나태하지 말아야 한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④ 범사에 감사해야 한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그러할 때, 비록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시 84:6).” 오늘 시편은 이와 같은 약속을 상기시킨다.

 

둘째, 순례자의 목적지는 하나님 앞이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7).”

 

우리가 주일에 교회를 간다는 것은 각기 ‘하나님 앞에 나타나리이다.’ 하는 것의 입증이다. 사랑하는 사이의 기본은 그의 앞에 서는 것이다. 이런저런 오늘의 상황이 우리로 교회를 멀리하게 하지만 그럴수록 붙들어야 할 것이 있다.

 

①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신뢰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셀라)(시 84:8).”

 

② 우리는 엄연히 주의 부르심을 받은 자녀라는 사실이다.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보옵소서(9).”

 

③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좋은 것을 우선해야 한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10).”

 

④ 하나님은 우리의 방패요, 은혜와 영광이 되신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11).”

 

나오는 말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12).”

 

우리의 가장 큰 복은 ‘주께 의지하는 자’로 사는 일이다. 분명히 성경은 우리에게 약속하시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23:1).

 

하는 고백을 우리에게 주셨다. 지금의 환경과 처지가 각각 어려우나 이는 모두 끝날 것이다.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를 들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춤추며 나오리라(렘 31:4).” 곧 우리의 회복은 기정사실이다. 이를 누가 더 믿고, 덜 믿고, 순종하고 안 하고의 차이에 따라 그 삶의 고달픔은 결이 다르다. 믿는 자로 살면서도 항상 어린 아이처럼 징징거리고 떼쓰고 자기 필요만 요구하는 천덕꾸러기 성도들도 참 많다. 그래서도 오늘 우리는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시 84:7).” 하는 말씀으로, 우리는 장차 어떤 모습으로 천국에 서야 할지, 되새기게 하신다.

 

앞서 성경의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지킨 신앙이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6).” 존 번연이 <천로역정>에서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왜 우리가 순례자의 삶을 사는지, 곧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3).” 우리는 저들이 바라보는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다. 달라야 한다. 달라져야 한다. 그러할 때,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시 84:5).

 

하는 오늘 시편의 노래가 내 노래가 될 것이다. 이에 우리는 앞으로 당당히 걸어 나가며, 우리의 주께 간구하는 것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셀라)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보옵소서

(시 84:8-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