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313 주일
시편 85편
주의 의가 주의 길을 닦으신다
시 85:13 의가 주의 앞에 앞서 가며 주의 길을 닦으리로다
들어가는 말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길이 있다. 즉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고속도로와 나란히 가는 국도는 같은 쪽으로 가는 것 같으나 어디쯤에서 갈린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이 둘은 하나일 수 없다.
롯과 아브라함은 갈라서야 했고, 사라는 하갈을 내쫓아야 했다. 이스마엘과 이삭은 함께 할 수 없었고, 에서와 야곱은 다른 길로 갔다. 믿는 자들이 세상과 나란히 지낸다 해서 같은 길을 가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2).” 그렇게 믿는다는 자들이 늘어나는 시절이다.
요한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보고 분노하였다. 저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마 3:7).” 바리새인은 규칙에 집착하고 율법으로 자기 의를 삼는다. 사두개인들은 당시 제사장직을 독점하고 산헤드린이라는 정치기구를 만들어 귀족적인 삶을 살았다. 예수님도 분노하시길,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 12:34).” 곧 아닌 건 아닌 거다. 어둠과 빛이 같이 할 수 없다. 죄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의가 함께 할 수 없다. 예수님은 일러,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35).” 스스로 애써 구원을 이루려는 모든 것은 악하다.
오늘 본문은 이를 분명히 밝혀준다. 하나님의 뜻 외에 다른 무엇도 온전할 수 없다. 이를 알고 앞서 믿음의 사람들은 끊을 것을 끊었고, 걸어갈 길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40).”
선과 악이 혼탁한 시대에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기준이 선을 대신하고 나섰다. 누구를 지지하고 어떤 진영논리에 합류하여 스스로 자신의 것을 지키려 한다. 이에 오늘 시편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과 우리가 끝까지 씨름해야 할 것을 알린다.
본문이해
본문은 남 유다가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와서 지은 시이다. 당시 느헤미야, 학개, 말라기와 같은 선지자들이 활동했다. 본문을 크게 두 연으로 나누었다. 1연은 1-7절로는 ‘하나님이 본국으로 돌려보내주신 데 대한 감사’를 전한다(1-3). 이에 하나님은 끝까지 자기 백성을 회복시키시고 진노를 풀어 긍휼을 알게 하심으로 죄를 회개하게 하신다(4-7).
2연은 8-13절로 ‘하나님이 앞서 걸으시며 불가능한 길을 닦으신다.’ 당시 이스라엘은 회복불능이었다. 나라는 황폐하였고 백성들은 흩어졌다. 그런 중에 하나님은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심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돌아오게 하신다. 저들은 포로된지 70년 만이다.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멸망한지는 50년이 흘렀다. 민족들은 흩어졌으나 ‘남은 자들의 귀환’으로 결집되었다. 이를 시인이 주목하는 것은 ‘끝까지 망령된 길로 가지 않으면, 하나님은 반드시 회복시키신다는 것과(8-9) 이는 주의 백성을 향한 저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인 것을 확신한다(10-13).
전에도 언급한 것처럼 이제 우리는 죄가 아니라, 회개를 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회개할 게 없다.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시대가 확산된다. 그러나 회개가 없으면 회복도 없다. 우리가 명심할 것은 어떤 죄라도 주 앞에 회개하면, 우리 하나님은 반드시 용서하신다.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이미 확정되고 보증된 성경의 진리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오늘 시편 85편을 통해서는 두 가지 확실한 진리, 하나는 하나님은 반드시 죄에 대해 진노하신다는 것과 다음 하나는 우리가 회개하면 그 어떤 죄라도 반드시 회복시키신다는 것이다.
1.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1-7)
① 하나님의 은혜는 기도 가운데 이루어진다.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땅에 은혜를 베푸사 야곱의 포로 된 자들이 돌아오게 하셨으며, 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그들의 모든 죄를 덮으셨나이다 (셀라)(시 85:1-2).” 우리로서는 필연적으로 죄 가운데 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몽돌과 같이, 바다에 잠겼어도 몽돌 속으로는 물이 스며들 수 없다. 이에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 6:1).” 죄 가운데 살며 죄가 없을 수는 없다. 이에 우리로 ‘하나님께 돌아가자.’고 호세아는 외친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일러 왜 그래야 하는지 전하게 하셨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 19:5-6).” 이를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확신하였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② 그 어떤 죄라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 “주의 모든 분노를 거두시며 주의 진노를 돌이키셨나이다(시 85:3).” 어떤 죄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는 없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잠 24:16).”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사 41:9).” 곧 우리 구원은 만반의 준비가 되어 이루어진 일이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49:15).”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고, 사랑이시다.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의 죄를 저질렀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가 더 크고 광대하시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③ 우리를 돌이키시고 분노를 거두신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분노를 거두소서(시 85:4).” 다음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사 43:2-3).” 이와 같은 선지자들의 증거는 하나님이 직접 약속하신 것을 기록한 것이다. 이에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민 23:19).” 하고 노년의 모세는 되묻는다.
④ 우리는 회개하며 간구한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분노를 거두소서(시 85:4).” 이를 알면 우리는 목적이 있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뭘 하든, 어디에 있든, 어떤 환경에서든지, 우리는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우리로 주의 영광이 되게 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사명이다.
2. 하나님의 영광(8-13).
①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무릇 그의 백성, 그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그들은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말지로다(시 85:8).” 몸은 죄로 회귀하려는 본능이 있다. 이때 하나님의 진노는 단순히 화를 푸시는 게 아니라 화평을 우리에게 더하심으로 몸이 안다.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이 그래서 급선무다. 신앙은 개념이나 추상적인 느낌도 아니다. 확신에 따른 행함이다. 이를 위해,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곧 오늘 우리가 사는 것도,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살후 1:12).”
② 이는 심판하실 때 드러난다. “진실로 그의 구원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우니 영광이 우리 땅에 머무르리이다(시 85:9).” 이는 하나님의 공의다. “내 공의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내 팔이 만민을 심판하리니 섬들이 나를 앙망하여 내 팔에 의지하리라(사 51:5).” 그러므로 심판의 날이 언제일지, 오늘일지 내일인지, 우리는 모른다. 분명한 것은 오늘 우리에게 주신 은혜로 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롬 13:11).” 그러므로 오늘은 자다가도 깰 때다. 하나님으로 영광을 받으시도록, 다윗은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시40:1).” 하고 고백하였다. 곧 우리가 들어가 살 영원한 나라도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다.
③ 긍휼과 진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시 85:10-11).” 곧 우리가 받은 은혜는 현실에서 가깝고, 우리의 구원은 현실에서 증명된다. 이는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하심이 우리로 찬송하게 하신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 3:22).” 하여 오늘 시편도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시 85:12).” 이 땅에서는 막연하다. 그것은 모두 뚫어진 전대와 같은 죄 때문이다.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학 1:6).” 이것은 죄로 인한 세상의 이치다. 애써 수고하여도 얻는 게 적다.
나오는 말
“의가 주의 앞에 앞서 가며 주의 길을 닦으리로다(시 85:13).”
현실을 살려면 죄에 죄를 더해야 한다.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 그들이 이르기를 그는 자기의 일을 속속히 이루어 우리에게 보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는 자기의 계획을 속히 이루어 우리가 알게 할 것이라 하는도다(사 5:18-19).” 한 마디로 자신이 하나님을 잘 안다고 여길 때 죄를 죄로 여기는 감각이 무뎌진다.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 자신이 아는 것을 의지할 때는 말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띠가 사람의 허리에 속함 같이 내가 이스라엘 온 집과 유다 온 집으로 내게 속하게 하여 그들로 내 백성이 되게 하며 내 이름과 명예와 영광이 되게 하려 하였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렘 13:11).” 이상하게 많이 안다, 잘 안다고 여길 때 함부로 군다. 사람 관계도 그렇다. 그러나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출 9:16).” 하나님이 우리로 이 땅을 특별히 살게 하신 까닭은 “주께서 이와 같이 주의 백성을 인도하사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나이다(사 63:14).” 하는 이와 같은 고백으로 영광을 받으시려하심이다.
유명한 토크자 오프라는 ‘하나님은 질투의 신’이라며 교회를 떠났다. 유명한 배우 브레드피트는 ‘자신을 최고’라고 말하는 하나님은 ‘자아도취에 빠진 신’이라 여겨 하나님을 버렸다. C. S. 루이스도 회심하기 전에 ‘하나님은 칭찬과 허영심이 강한 여자 같다’고 하였다. 그러니 사람의 이해로는 하나님의 섭리를 감당하지 못한다. 이에 우리는 말씀으로다. 성령이 아니시면 알 수도, 깨달을 수도, 삶으로 살아갈 수도 없다. 이에 우리의 약함을 두고 성령은 탄식하시며 오늘도 기도하신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그러므로 우리가 가는 길은 하나뿐이다. ‘하나님의 의’를 따라 사는 것, 어떠하든지 하나님은 선하시고 의로우시며 자비하시고 긍휼이 많으시다는 것, 이에 “의가 주의 앞에 앞서 가며 주의 길을 닦으리로다(시 85:13).” 아멘.
'[설교원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편 87편 / 나의 모든 근원 (0) | 2022.03.24 |
---|---|
시편 86편 / 주는 나를 돕고 위로 하시는 이 (0) | 2022.03.17 |
3) 회심(회개, 인생의 방향전환), (겔18;30~32) (0) | 2022.03.06 |
시편 84편 /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 (0) | 2022.02.25 |
시편 83편 / 온 세계의 지존자 (0) | 2022.0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