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전봉석 2022. 3. 2. 05:11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삼으셨느니라

신 14:2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시 39:4

 

 

살아가는 동안 성민의식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이 친히 선택한 백성이요, 자녀라는 사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이에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삼으셨느니라(신 14:2).” 하며 앞서 들어갈 가나안을 두고 당부하는 모세의 설교가 구체적이다. 먹어야 할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 행하여야 할 일과 행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하여 구별된 삶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시편은 하늘 문을 여는 기도를 올린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시 39:4).

 

이를 좀 더 확장하면,

 

내가 나의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으며

나의 혀로

높이 찬송하였도다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66:17-18).

 

곧 우리 안에 품은 생각과 그 마음의 방향을 주가 아신다. 그것이 행위로 나타나고 생활 속의 현실이 된다. 일상은 우리의 영혼을 길들인다. 무엇을 먹고 안 먹고, 어떤 행함에 있어 그것이 곧 우리 영혼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것이겠다. 그러므로 거짓 없는 신실한 마음이 우선이다. 이는 기도로 분별된다. 기도는 예수 이름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 영혼에 쏟아 붓는 일이다. 기도하는 마음은 성령이 주도하신다.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게도 한다. 교회의 유익이 되며, 자기 영혼의 버팀목이기도 하다. 곧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길을 연다.

 

코로나가 창궐하면서 교회마다 겪는 어려움은 성도의 안이함이다. 기도회가 줄고 대면예배가 제약을 받으면서 헛헛한 마음은 세상을 향한다. 옛 친구들을 찾고 저들과 함께 헛된 곳을 기웃거리게 된다. 애써 성경공부로 다지고 기도로 무장시켰다 싶은데, 이것이 지속되지 못할 때 순식간에 옛 생활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일러,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2-13).” 하는 약속의 말씀은 언제나 유효하다. 저가 흔들리고 그릇 행하는 것은 무엇보다 기도가 멈춘 반증이다.

 

“성심으로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며 오직 침상에서 슬피 부르짖으며 곡식과 새 포도주로 말미암아 모이며 나를 거역하는도다(호 7:14).” 안이한 기도와 겸하여 모임은 주를 거역하게 할 뿐이다. 기도를 손으로 쓰고 또는 누구의 사연을 적어두는 까닭은 그러는 동안 주 앞에 아뢰는 것이다. 성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다. 성심(聖心)은 거룩한 마음이다. 앞에 말씀 언(言)에 이룰 성(星)를 더하면 정성 성이 된다. 성심(誠心)으로 거룩한 마음-성심(聖心)을 이루는 것일 텐데, 오늘 시편은 이를 알리고 있다.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

(시 39:5).

 

곧 거룩은 거룩하신 이 앞에 자신을 보이는 일이지, 어떤 행위로가 아니다. 이에 입을 열어 주께 아뢰고 고하는 기도는 필연적이라 하겠다.

 

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하지 아니하니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

(2).

 

우리가 흔히 알듯 기도는 카타르시스를 해소하는 게 아니다. 통성으로 외치고 울부짖음으로 고하거나 재잘거림으로 중얼거리는 게 기도가 아니다. 존 번연은 말하길, ‘기도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분별 있는 마음이다.’ 카타르시스는 비극을 보며 우울과 불안을 해소하는 기법으로 마음을 정화시킨다. 한껏 울부짖으며 기도하고 나면 속이 후련하고 시원하다는 표현은 그래서다. 이는 심리적으로도 안정을 주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닌 것이다.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나의 목이 마르며

나의 하나님을 바라서

나의 눈이 쇠하였나이다

(시 69:3).

 

기도하는 사람은 영혼이 맑고 마음이 고요하여 거짓됨이 없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보고 한 눈에 아셨다. 이에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48).” 저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었다는 것으로 기도하는 자임을 연상하게 된다. 곧 기도란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51).”

 

이에 지혜자는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잠 15:8).” 곧 그럴듯한 예배를 원하시기보다 상한 심령으로 주를 찾는 자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7).

 

곧 주께 아뢰지 않으면 사람 붙들게 돼 있다. 주 앞에 나아가지 않으면 세상으로 가까이 가기 마련이다. 마치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 하여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는 보통의 마음’이란 그런 것이다. 영적으로 어쩌지 해도 우리는 사람이라, 우리로 성민의식을 잃지 않게 하려는 오늘 모세의 설교는 매우 구체적이다. 무엇을 먹고 먹지 말아야 하는지를 일일이 기록하고 설교하는 까닭은 그렇게 허용되는 빈도가 늘어 우리로 이방인의 삶을 따라 살게 하기 때문이다. 기도는 다른 의미로 탄식이다. “에브라임이 스스로 탄식함을 내가 분명히 들었노니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멍에에 익숙하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렘 31:18).” 오늘 시편도 이를 알고 있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시 39:6-7).

 

우리가 어떠한지?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다.’ 흔히 유행이나 문화라고 하나 실은 그림자 따라서 행하고, 취하고 그 뒤를 다니는 일이라. 남들처럼 남들 따라 남들 같이 사는 게 세상일이다. 그 일은 허무하여서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우리 이야기의 대부분이 돈이고 그 돈이 헛됨은 소설이나 영화의 소재로 흔하다. 이에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하고 시인은 반문하고 한탄하며 그 답을 얻는다.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내려놓는다는 말과 마음을 비운다는 말을 종종 하는데 이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주께 맡김이다.

 

나를 모든 죄에서 건지시며

우매한 자에게서

욕을 당하지 아니하게 하소서

(8).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고 헛된 일로 세월을 보내는 것에 대하여, 나의 힘으로는 이를 감당하기 어렵다. 사람 마음은 다 같아서 “물에 비치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 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치느니라(잠 27:19).” 서로 아닌 척 해도 다를 게 없다. 그러니 누가 누굴 욕하겠고 누구더러 뭐라 할 소리가 있겠나?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함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까닭이니이다

(시 39:9).

 

이 모두를 주관하시는 이를 앎으로 기도는 대상이 오직 한 분에게로 향한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삼상 1:10).” 이보다 더 나은 처방은 없다. 내가 안 믿는 이와의 상담이나 저의 조언을 가소롭게 여기는 것은 저나 나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누가 상담을 오면 이런저런 말을 듣거나 들려주되 우리는 함께 기도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누구보다 내가 나아서 저의 말을 듣거나 저에게 어떤 말을 조언하는 것이 아니다. 저로 인하여 나 또한 주를 바라고, 저의 일로 나의 일을 주께 아룀이어서, 교회를 떠난 상담은 무리하다.

 

누가 상담사 자격증을 딴다고 해서 내가 저에게 우려했던 것도 그것이다. 안 믿는 자의 사연을 들어줄 수 있겠나? 저는 스스로 원하는 처방이 있을 텐데 이를 말씀으로, 주 앞으로 이끌 수 있겠나? 나는 그것이 자신 없어서 꺼린다. 아니,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같이 주께 아뢰고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마무리하는 지금도 때론 어떤 슬픔에 눌려 내가 더 죽을 지경인데… 주의 마음으로가 아니면 어찌 한 영혼을 마주할 수 있겠나? 대화나 상담은 원하는 것을 내어주는 장사치가 아니다. 대부분은 저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일이다. 헤집어 그 속을 들여다봐야 하는 임상해부학과 같다. 이에 우리의 처방은 기도뿐이다.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

 

내 심장이 뛰고

내 기력이 쇠하여

내 눈의 빛도

나를 떠났나이다

(시 38:8-10).

 

우리가 서로 이야기 하는 것도 이제는 모두 기도다. 그 마음에 주의 이름을 부르며 상대의 말을 듣고, 주를 바라며 나의 속을 뒤집는 것이다. 존 번연의 말처럼 기도란 성령의 강력한 힘으로만 가능하다. 주의 도우심으로 하는 게 기도다. 아니면 나르시시즘에 빠져 ‘자기 연민, 자가 사랑’으로 자아도취에 흡수될 뿐이다. 정신도 육체도 자신에게 집착하면 더는 기도가 되지 않는다. 주의 이름을 부르고 주께 아뢰지만 실은 자기애의 실현이다. 그렇게 소원을 빌고 또 이를 바라며 살다보니, 그림자처럼 떠돌밖에.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시 103:1).

 

기도는 주를 송축하는 곳으로 흐른다. 하여,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62:1).

 

기도의 바탕은 동일하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5).

 

나의 구원도 나의 소망도 그에게서 나오는 것을 일깨우고 잠잠히 주를 바라는 것. 이는 막연한 감정이나 느낌이 아니라, 주를 찬송하는 데서 일어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103:2-5).

 

이를 오늘 모세는 설교하는 것이고, 시편의 다윗은 기도하는 것이다.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하지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

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하지 아니하니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

(시 39:1-2).

 

세상이 악하다 하여 입을 다물면 근심이 더할 뿐이다. 그리하여,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불이 붙으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3-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