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신 13:3
내가 넘어지게 되었고 나의 근심이 항상 내 앞에 있사오니 내 죄악을 아뢰고 내 죄를 슬퍼함이니이다
시 38:18
저들은 ‘이적과 기사를 보이고,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따라 섬기자고 말한다.’ 저들은 세상이며 그 어떤 결과이다.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기사와 이적’으로 마음을 현혹하기에 충분하다. 한데 그 속셈은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것이다. 이에 “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3).” 곧 우리의 이런저런 현실적인 문제가 우리로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고 당장의 결과와 유익을 따르게 한다. 이에 “너는 용서 없이 그를 죽이되 죽일 때에 네가 먼저 그에게 손을 대고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대라(9).” 합심하여 저를 죽여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시험이다. “그는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에게서 너를 꾀어 떠나게 하려 한 자이니 너는 돌로 쳐죽이라(10).”
우리 안의 어떤 야욕에 무엇에 대한 욕망이 그러하다. 저를 진멸하고 저의 물건에 손도 대지 말아야 한다. “너는 이 진멸할 물건을 조금도 네 손에 대지 말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그의 진노를 그치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시고 자비를 더하사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심 같이 너를 번성하게 하실 것이라(17).” 상대적으로 조상들은 이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였고 그때마다 징계를 받음으로 단련되었다. 그러므로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목전에서 정직하게 행하면 이같이 되리라(18).” 이에 우리에겐 두 가지 방책이 있다. 하나는 말씀을 듣는 일이다. 다른 하나는 이를 지켜 행하는 일이다. 행여 하나님이 진노하시면…
주의 진노로 말미암아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말미암아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
(시 38:3-4).
또한,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
내 심장이 뛰고 내 기력이 쇠하여
내 눈의 빛도 나를 떠났나이다
(9-10).
곧 우리가 주의 사랑을 잃고는 살 길이 없다. 이로 인하여,
내가 넘어지게 되었고
나의 근심이 항상 내 앞에 있사오니
내 죄악을 아뢰고
내 죄를 슬퍼함이니이다
(18).
회개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그 어떤 죄라도 회개하면, 우리 하나님은 용서하신다. 우리에 대한 애착이 유별나시다. 애착(愛着)은 몹시 사랑하여 끌리고 떨어지지 않는 마음이다. 때로는 끌려가게도 하시지만 반드시 돌아오게 하신다. 어제는 평소대로 설교원고 초안을 작성하였다. 하루 가운데 새벽에 일어나 말씀 앞에 앉아 묵상하는 시간과 아침에 일찍 교회로 나아가 그것을 되새기고, 기도노트에 누구의 사연을 적고 가만히 혼자 있게 하시는 시간이 귀하다. 누구의 기도 부탁은 일상이 되었다. 그때마다 적어두지 않으면 잊거나 외면하기 십상이라, 나는 저의 이름을 손으로 적고 그의 사연을 메모한다. 특히 일주일의 첫날은 그러고 난 뒤 앞서 설교본문을 가지고 이에 뒷받침 성경 구절을 찾아보는 게 일이다.
그것으로 다음 날 아침 묵상글을 작성하며 개괄적으로 정리한다. 다음 날은 이를 일상으로 비추어 살펴본다. 다음 날은 이를 새기며 여느 책이나 누구의 사연이나 어떤 사회적인 일들과 연관을 지어 생각한다. 글을 쓰고 이야기를 한다. 어떤 일에 비추어본다. 수많은 우연 속에서 하나님이 다루시는 이야기의 전개다. 모두 연결이 돼 있다. 이를 열거하는 까닭은 그 하루하루가 한 걸음 한 걸음 천성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어서다. 다들 나이가 들면 죽는다고 하나, 우리는 본향을 향해 '돌아오게 하신다.'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땅에 은혜를 베푸사
야곱의 포로 된 자들이
돌아오게 하셨으며
(시 85:1)
우리로 돌아오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수고와 애씀은 우리의 상상 그 이상이다. 이를 알 때 참된 복음은,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 6:1).” 이는 우리가 현혹되어 그때마다 그릇 행한 것으로 그러하였다. 이제는 ‘여기’에 있다 보니까 아직도 ‘거기’에 있는 이의 이런저런 사연이 그럴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의 고집과 아집이 우리로 주를 멀리하게 한다. 서로의 ‘기도 부탁’이 그러므로 격려이고 위로가 된다. 일찍이 말씀하시길,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 19:5-6).” 이는 조건이 아니라 당연한 이치다.
집에 돌아갈 때 아내는 가끔 포장된 식재료를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킨다. 자주 가는 무인 판매점에 들러 어제는 부대찌개와 육개장을 샀다. 그런데 매번 가는 시간대에 저와 마주치는 것인지, 갈 때마다 덤으로 무얼 자꾸 준다. 어제는 식혜를 주었다. 전에는 5천 원짜리 부대찌개 1인분을 샀는데 9천 원짜리 김치찌개거리를 덤으로 내주었다. 매번 받기만 하고 나는 줄 것이 없어, 어제는 엉뚱하게도 명함을 건넸다. 무슨 말 끝에 아이가 고2, 고1이라는 소릴 듣고서였다. 언제부턴가 나는 줄 것이 없어,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행 3:6).” 이와 같은 심정으로 저와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왔다. 아침 일찍 누구의 기도부탁이 있었는데 그것이 오후께 내게로 돌아온 것 같았다. 천천히 걸으며 되새기다 이를 깨달았다.
말씀은 일상이고 기도 응답은 실제다. 성경 말씀도 뜬구름 잡은 소리가 아니다. 내 곁의 이야기고 누구 안의 역사이다. 그런저런 이야기 속에는 성경이 들어 있다. 하나님의 이야기가 담겨난다. 그러니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가령 이른 아침에 누가 어떤 내용을 두고 기도를 부탁할 때, 나는 주가 함께 하실 것을 확답한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잠 24:16).” 곧 우리는 의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이다.
오늘 본문도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우려하는 상황을 경고한다. 그러나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사 41:9).” 우리는 결코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산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49:15).” 이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그의 사랑이다.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그 이상의 관심이다. 일상으로 우리 삶을 주도한다. 오후께 어느 무인가게에서의 일은 여러 수많은 점들이 모여 선을 그은 듯 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곧 ‘주의 관여’가 어찌 다음 이야기로 전개될지는 모르나, “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렘 31:3).”
이와 같은 말씀이 증거다. 우리 믿는 자에게 우연이란 없다. 사소함도 없다. 우연은 아무런 인과관계도 없는데 일어나는 뜻하지 않은 일이다. 사소함이란 보잘것없고 별 것 아닌 듯한 일이다. 한데 그냥 지나쳐 대수롭지 않게 여겨도 될 것이 하나의 이야기로 그어진다. 하나님의 세계와 맞닿아 있는 우리 이야기다. 하나님 앞에는 ‘어쩌다 생긴 일’이 없다. 하다못해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 10:29).” 그저 아무도 몰랐을, 관심도 없었던 일이 실은 ‘주의 주도하심’으로였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31).” 그러게! 최소한 우리는 참새보다 귀하지 않은가? 실은 아들의 1차 회계사시험이 끝나고, 좀 어땠는지 궁금하지만 묻지 않았다. 이상할 정도로 나는 아이의 당락에는 크게 기도를 두지 않는다. 오히려 붙으면 한 번에 붙을까 하여 주께 아뢰고, 떨어지면 그 상심할 마음을 두고 주께 아뢴다. 결과는 어차피 하나님의 것이다! 다만 나는 아이의 마음을 두고 주께 고한다. 곧 우리의 사소함은 그 이상의 의미와 의중이 담겨 있다. 때론 하나님의 의중을 알 수 없으나 의미는 뚜렷하다. 우연을 가장하신 주의 섭리와 역사는 추측이 아니라, 선명한 근거로 제시된다. 이를 성경은,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땅에 은혜를 베푸사
야곱의 포로 된 자들이
돌아오게 하셨으며,
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그들의 모든 죄를 덮으셨나이다 (셀라)
(시 85:1-2).
즉 이 모두는 주의 일이다. 아무리 세상이 우릴 쥐고 흔든다 해도, “바로가 곧 그의 병거를 갖추고 그의 백성을 데리고 갈새 선발된 병거 육백 대와 애굽의 모든 병거를 동원하니 지휘관들이 다 거느렸더라(출 14:6-7).” 우리가 저들을 상대하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사 43:2-3).” 이와 같은 결과로 오늘 우리는 산다. 그러니 이 한 날이 얼마나 큰가? 우리는 이를 다 알고,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사람들이다. 그저 여느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이 아니다. 어쩌다 벌어지는 우연한 일에 휘둘리는 존재가 아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 18:17)."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을 숨기신 적이 없다. 우리는 성경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다. 성경이 없던 시절 아브라함에게도 숨기지 않고, 모세와도 대화하시며 일을 행하시던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사랑을 받는 자이면, 결코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는 않는다. 자신이 겪는 일의 결과가 중요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다. 곧 결과가 어떠하든지 하나님은 선을 이루시기 위함이란 것을 안다. 알면,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25).” 하신 말씀을 들었을 텐데? 우리에게는 성경이 있다. 말씀대로 하신다.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 같이, 네 죄를 안개 같이 없이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44:22).” 이사야의 이러한 말씀은 날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누구를 만나고 우연히 저의 이런저런 사연을 듣거나 어떤 일로 맺어질 때,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는 재해석되고 재설정된다. 다시 말해 저를 통해 나에게, 나를 통해 저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야기를 이루신다. 이는 내가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서가 아니다. 어떤 자격을 갖추어서도 아니다. 조건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 그 은혜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어제 내가 저에게 명함을 건네고, 목사인 것을 알리고, 안 믿는 저에게 그리 말하였던 것은 우연도 내가 한 것도 아니다. 어떤 전개로 이야기가 펼쳐질지는 알 수 없으나 저는 나에게 매번 친절하였고, 나는 이를 하나님께로 돌린 것이다.
주의 모든 분노를 거두시며
주의 진노를 돌이키셨나이다
(시 85:3).
누가 알겠나? 주의 뜻이 무엇이신지는. 다만 돌이켜 저들을 주 앞으로 오게 하실지, 나로 저들을 두고 기도하게 하심으로 나에게 주의 관심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으나 확신하는 한 가지,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욥 23:13-14).” 이를 지혜자는 받아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전 7:13).” 하고 단정하였다. 나는 이 말씀에서 안도한다. 안도함으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14).” 형통하든지 곤고하든지 모두가 주의 날이라. 주가 주도하시는 삶일 따름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민 23:19).” 누누이 성경이 밝히는 것처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 19:5-6).” 늘 그날이 그날 같지만 성령은 우리의 일상에서 역사하신다. 그 안에 다채로운 주의 역사하심이 있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시 100:3).
하면,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그러니까 그 결과가 어떠하든지,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 6:1).” 하는 호세아 선지자의 간곡한 표현이 나의 위로다. 그래서 기도하게 된다. 지속적인 기도는 영적 진보의 힘이다. 갈 바를 알지 못하나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분노를 거두소서
(시 85:4).
때론 감당하기 어려운 일 앞에서도 주께 당당히 이를 요구한다. 누굴 위해 주께 아뢴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삼상 12:23-24).” 이는 지도자 모세만의 일이 아니다. 주의 사랑을 아는, 주를 사랑하는 우리의 의무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그럴 때 하나님은 들어주시고, 이를 기쁨으로 삼으신다.
아침 일찍 문자로 기도로 부탁하곤 하는 친구는 예전의 친구다. 어린 아이처럼 사사로운 것까지 부탁한다. 말 그대로 옛날에 같이 대학을 다녔던 친구로 못 본지도 수십 년이 지났다. 나는 저의 기도 부탁을 들을 때면 주의 마음을 알겠다. 아, 하나님이 이것으로 기쁨을 삼으시겠구나! 하는 것을 말이다. 내가 뭐라고, 때론 남들에게 말하기 힘든 사연을 알리며 기도를 부탁한다. 이는 내 뒤에 계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비록 신앙은 어리고, 온통 그 간구는 세상 염려 일색이지만,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은 우릴 위해 기도하신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기도하게 하신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합심하여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은 들으신다. 상대적으로 믿는다는 누구는 함께 기도하자고 해도 반응이 없다! 정작 기도가 급한 사정을 내가 아는데, 그의 영혼은 냉랭하다. 구원의 기쁨을 잃은 영혼은 황막할 따름이다. 삶은 거칠고 끝도 없는 지겨움에 숨이 막힌다.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이해는 한다. 그러나 내가 이해하는 게 뭐 중요하겠나? 기도가 나오는 것은 저의 절박함에서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기도와 삶과 성령의 내주하심의 정의다. 우리가 무엇을 잃고 사는지, 저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한껏 거리를 둔다. 그 거리만큼 기도도 멀다. 오히려 단순하여서 어린 아이 같은 기도 부탁을 해대는 친구가 훌륭하다. 때로는 지겨울 정도로 기도를 부탁한다. 하지만 그와 같은 지속적인 기도가 우리로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나는 듣고 노트에 적는다. 그리고 습관처럼 열어본다. 우리에게는 공짜가 없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하나님께도 우리는 엄연한 가치가 있는 존재다. 거저 주신 은혜라고 거저 나를 가지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어떤 일로 마음이 어렵다가도,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살후 1:12).” 하시며, 오늘에 두신는 나의 한 날의 소중함을 되새기게 된다.
내가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무릇 그의 백성, 그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그들은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말지로다
(시 85:8).
그렇지! ‘내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리니’ 하는 고백이 나오기까지, 앞서 4절에서 7절까지의 주저함을 알아야 한다. 우리 모두는 그러하였다. 내 안에 내재된 죄성을 인정해야 한다. 실은 이 모든 게 나를 위한 것임을! 하여,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시 40:1).
내가 주의 말씀을 들을 때, 주께서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계셨음을 알게 된다. 곧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합 2:1-2).” 어쩌면 이처럼 이른 아침에 깨우시고 말씀을 듣게 적게 하심은, ‘달려가면서도 읽게 하기 위하심이다.’ 곧 구원이란 주를 경외하는 자의 것이었다.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은 이 모든 일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심을, 모든 결과는 주의 것임을, 그 어떤 사소함도 우연도 모두가 주의 오랜 계획하심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인 것을.
진실로 그의 구원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우니
영광이 우리 땅에 머무르리이다
(시 85:9).
이를 앎으로 죽어도 양보할 수 없는 게 생겨나는 것이다. 아니면 오늘 말씀과 같이 언제 훅, 하고 넘어갈지 모른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딤후 4:10).” 이것이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날이 오면 수많은 사람들이 아우성칠 것이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저들의 착각은 무엇이었을까? 더는 돌이킬 수 없는 때에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3).” 아, 이 끔찍한 상황을 상상하면 오금이 다 저린다.
“내 공의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내 팔이 만민을 심판하리니 섬들이 나를 앙망하여 내 팔에 의지하리라(사 51:5).” 우리가 무엇을 중히 여기고 두려워해야 할지를,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롬 13:11).” 그러므로 긍휼과 진리는 하나님 안에서 길을 만나고, 의와 화평은 서로의 고백에서 길을 낸다. 성도의 교제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동행이다.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
(시 85:10-11).
말씀을 준비하고 이를 전하는 일을 하며 살게 된 것은 축복이다. 이와 같이 공휴일 아침, 여느 날보다 일찍 일어나 몇 시간째 이러한 말씀으로 깊이를 더하시는 은혜를 누가 이해할 수 있겠나?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 앞에 있나이다
(시 89:14).
하는 고백이 내 것이 되었다. 이에 이제는 확신하는 바,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 3:22).” 하나님은 끝까지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그러기 위해 모든 환경과 사건을 조성하신다.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
(시 85:12).
세상이 아무리 어떻다 해도, 저들이 부러울 때도 혹은 질투가 날 때도 있지만,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학 1:6).” 그러나 나의 삶 가운데는 모자람이 없었다. 이를 아무리 알려주고 함께 돌아가자 해도 소용이 없는 것에 대하여는, “그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내가 이 땅과 산과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땅의 모든 소산과 사람과 가축과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한재를 들게 하였느니라(10-11).” 어쩌겠나? 이 모든 환경을 조성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신 것을.
또 내가 기름진 밀을 그들에게 먹이며
반석에서 나오는 꿀로
너를 만족하게 하리라 하셨도다
(시 81:16).
이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나는 이제 이 한 구절의 말씀으로도 충분하였다.
의가 주의 앞에 앞서 가며
주의 길을 닦으리로다
(시 85: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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