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전봉석 2022. 3. 3. 05:2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신 대로 네게 복을 주시리니 네가 여러 나라에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하겠고 네가 여러 나라를 통치할지라도 너는 통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신 15:6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

시 40:17

 

 

기쁨과 행복은 다르다. 행복은 자기를 만족하게 하는 일에서 온다. 원하고 바라던 일이 이루어질 때, 자기만족이 행복이다. 그러나 기쁨은 이유여하를 초월한다. 고통 중에서도 기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면 기쁨은 상실되지 않는다. 자기만족 그 이상의 충만함이 기쁨이다.

 

오늘 본문은 민수기 12-26장에서 곧 들어갈 땅 가나안에서 기뻐할 수 있는 근본적인 것들을 세부적으로 알려준다. 축약하면 십계명 중 제2 계명인 ‘우상을 숭배 금지’에 대한 재해설이라 하겠다. 우상은 하나님보다 우선하는 모든 것으로 신앙의 순수성을 잃게 한다. 어제 14장부터는 이를 실제의 삶에 있어 세부적으로 적용하여서 알게 한다. 어제는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알게 하고, 오늘 15장에서는 가질 수 있는 기간과 놓아주어야 하는 시기에 대해 밝힌다. “매 칠 년 끝에는 면제하라(15:1).” 곧 이는 사람이나 빚이나 자신의 소유로 삼았던 것에 대한 면제의 규례다. “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그의 이웃에게 꾸어준 모든 채주는 그것을 면제하고 그의 이웃에게나 그 형제에게 독촉하지 말지니 이는 여호와를 위하여 면제를 선포하였음이라(2).” 이는 우리 삶에서 실제의 복을 더한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4-5).”

 

기쁨은 절대적인 것이고 행복은 상대적인 것이다. 성경은 일러 우리에게 명령으로 기쁨은 요구하신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이는 이유여하가 없다. 그럴 때 이어지는 말씀에서 오늘 본문 민수기를 출처로 하고 있음을 짐작한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5).” 그러할 때 모세는 힘주어 약속의 말씀을 전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신 대로 네게 복을 주시리니 네가 여러 나라에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하겠고 네가 여러 나라를 통치할지라도 너는 통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민 15:6).” 다시 말하면 기쁨은 명령에 의한 것이고 행복은 주어지는 것으로 인함이다.

 

심리학에서 우리의 기쁨의 출처를 네 가지로 정리하였다. 곧 사람이 행복을 느끼는 것 첫째는, 사랑받고 있다고 느낄 때이다. 둘째, 자신이 소중하다고 생각한 것을 얻었을 때이다. 셋째, 자신의 형편과 사정을 긍정적으로 선히 여길 때이다. 넷째, 자신의 소중한 것을 남에게 나누어줄 때이다. 이 네 가지는 너무 상식적이어서 싱겁기까지 하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기뻐할 수 있는 것으로, 앞에 전제로 붙인 것은 ‘주 안에서’와 ‘항상’이다. 이 단서를 제공함으로 앞서 심리학의 그것을 충분히 수용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를 자신이 지금 처한 상황에서 자신이 기뻐하는 근거로 삼았다. 그에 비하면 저는 지금 늙었고, 병들었고, 로마 감옥에 갇혔다. 현실적으로는 가소로운 일이다. 그런 지경에 어찌 기뻐할 수 있단 말일끼? 그런데도 저는 헛소리처럼 명령한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앞서 심리학자들이 제시한 네 가지 기준에 맞추어 저는 확신하는 근거를 찾아보면, 첫째,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기뻐하였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2).” 여기서 '그로 말마암아' 곧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는 말씀에 근거를 둔다(요 3:16). 그래서 저는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3-4).” 다시 말해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한다!' 그럴 수 있는 게 사랑 받고 있다는 확신 때문이다. 나아가 그 사랑은 사나 죽으나 저는 주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알았다. 곧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14:8)” 주의 것이라는 말, 사랑을 하면 서로는 기꺼이 서로의 것이 됨으로써 기쁨의 소유가 된다.

 

둘째로 자신이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을 소유한 데서 기쁨이 오는데,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이 소유한 것에 대하여 확신하였다. 저는 자신을 소개할 때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빌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 1:1).” 즉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 된 것을 자랑하는 것이다. 그의 안에 있음을 먼저 알리고 항상 첫 마디를 뗀 것도 그래서이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갈 1:1).” 하고,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졌음을 알린다. 그렇게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빌 3:1).” 즉 자신이 주 안에서 기뻐한다는 것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했다는 것을 자부하는 것이다.

 

셋째, 그리하여 자신의 지금 자신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이를 ‘주 안에서’로 받아, 이를 가지고 선을 이루실 줄을 앎으로 받아들였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자신에게 주신 것을 있는 그대로 선히 여기고 받아들이는 일이다. 이에 기뻐하였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빌 4:10).” 하여 저는 지금의 어떤 고통도 개의치를 않았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이를 통해 저는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28).”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믿고, 의지하였기 때문이다. 놀라운 사실은 저의 기쁨이 심리학자들이 주장하는 근거를 능가하기에 결코 모자람이 없다는 것이다. 

 

이에 저는 어떠하든지 자족함을 배웠다고 한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 4:11).” 또한 어떠한 처지에서도 이를 이길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하였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12).” 이는 모든 게 다 하나님의 선을 이루시기 위한 것임을 저는 알았고, 그러한 능력도 주실 것을 저는 믿었으며, 그것으로 모든 것이 선이 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이는 자신의 탁월한 능력으로가 아니었다. 이는 오히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13).” 하는 그의 삶의 확실하고 분명한 의지였다. 늘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말이다. 

 

넷째, 저는 자신의 그 가장 소중한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고 나누는 데서 기뻐할 수 있었다.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 1:18).” 저는 그리스도를 전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어떠하든지, 오늘의 형편이 어떻게 되든지 개의치 않았다. 갇혀서도 이를 전하기 위해 글을 썼다. 나아가 증거할 수 있을 때는 죽음도 불사하며,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였다. 예수를 나누고 소개하고 증거함으로 그 기쁨은 고스란히 저의 마음을 채우고 있었다. 이는 ‘주 안에서’였다. ‘항상’ 말이다.

 

나는 이 글을 묵상하기에 앞서 누구와의 통화에서 저의 이런저런 사정을 들었다. 만일 저가 내 딸아이였으면 당장에라도 이혼을 시키고, ‘그런 놈’을 떼어놓고 싶을 정도로, 저의 사정을 들을 때마다 욕이 나온다. 화가 나고 속상하다. 저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나를 안타까움으로 몰아넣고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한다. 그것이 계속 감정적으로 치달으면, 당장이라도 달려가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려서라도 그만 살게 할 것 같다. 그렇게 화가 또 분이 내 안에 일어나 듣다보면 덩달아 감정이 상하기 마련인데, 당사자로 사는 저의 생활은 오죽할까? 싶어서도 안쓰럽다. 그렇게 통화를 끊고 마음만 어지럽더니, 하나님은 거짓말처럼 위의 말씀을 내 안에 펼쳐놓으신 것이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빌 4:3-4).

 

순간 나는 유구무언이다. 이런저런 사연으로 덩달아 속상해하고 욕을 하고 그 속으로 한심하게 여겨 미워하던 일에 대하여… ‘기뻐하라.’는 명령은 잔인할 정도로 가슴 깊이 울리는 것 같았다. 자, 이제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말씀의 명령이 그러하시니 기뻐할 것인지, 말씀은 그렇다 해도 현실은 그럴 수 없는 형편과 사정인 걸 고려하여 시비하고 원망하며 불평을 할 것인지. 분명한 것은 기쁨을 선택하면 기쁨을 더하실 것이다. 이는 우리 하나님의 스타일이다.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도 그리하실 분인 것을 믿음으로 말씀으로 안다. 경험으로도 알고 있다. 오죽하니 세상 학문으로 연구하는 심리학에서도 이를 강조하였다. ‘사람 일,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것, 그러니 어쩔 것인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할 것인지, ‘주 밖에서, 항상’ 슬퍼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선택하지 않으면 기쁨은 내 것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오늘 저가 온다. 저를 만나기에 앞서 그러저러한 사정을 알게 하시고, 이런저런 말에 휘둘려 덩달아서 한숨만 쉬었더니… 하나님은 어김없이 말씀을 주시고 명령하신다. 통화 끝마무리에 꿈쩍도 않는 현실을 두고 불평만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을 명심하라고 이른 게 또한 불씨가 되었다. 저는 지금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고 있는, ‘학습된 무기력’으로 저와 같이 점점 침체되고 있는 자신을 알게 하였다. 저는 고학력자이다. 주의 사역과 비전에 대한 열망함도 크다. 그런데 늘 그의 안에 내재된 감정은 의존하려는 성향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여기까지 함께 하신 이가 하나님이시다. 어릴 땐 친정 식구들로부터의 의존적인 성향을 극복하고 살아남게 하셨다. 결혼하고 신랑의 병적인 무기력증으로부터 자신을 자꾸 다그치며 여기까지 오게 하셨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로서 그 사랑을 받고 있다는 확신과 그 하나님을 누구보다 자신도 사모하고 사랑하고 있다는 확신과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이를 가지고 선을 이루신다는 확신과 그렇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소중한 것,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같이 나눌 수 있는 게 무엇인지를… 알고, 믿고, 이제는 선택해야 한다. 언제까지 꿈쩍도 않는 현실을 두고 씨름하다 안주하다, 울다 웃다 하며 그 가운데 함몰된 채로 살아갈 것인지….

 

우리의 일상은 주의 일 아닌 게 없다. 밥 먹고 똥 싸고, 누굴 만나고 어떤 일을 도모하고, 무엇에 관심을 두고 어떤 일에 열심을 다하든지, 선택하지 않으면 기쁨도 없다. 선택하지 않으면 순종할 수도 없다. 순종하지 않으면 불순종뿐이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마 26:75).” 베드로는 죄책감으로 슬피 울며 회개를 선택하였고,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27:5).” 유다는 죄책감으로 스스로 목을 매었다.

 

복과 저주가 우리 앞에 있다.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신 11:27).” 자 이제 어쩔 것인가?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면 저주를 받으리라(11:27-28).” 우리는 기뻐할 것인지, 슬퍼할 것인지. 행복할 것인지, 불행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이런저런 형편과 사정을 두고 씨름하는 일은 끝이 없다. 만날 그 타령이다. 그 소리가 그 소리다. 이에,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

(시 40:17).

 

주께 의뢰하고 주의 선하심만 바라고 나아가야 한다. 기다림과 부르짖음은 동시적이다. 오늘 시편은 이 둘이 하나인 것을 알린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1).

 

기다림은 막연한 무기력이 아니다. 되고 안 되고는 우리 몫이 아니다. 그래야 했다면 노아는 중도에 방주 짓는 일을 포기했을 것이다. 모세는 백성들의 반복되는 불평에 포기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막연한 약속에 포기했을 것이다. 성경의 모든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모든 ‘이김은 여호와의 것’이라는 사실,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21:31).” 결과는 주의 것이다. 우리는 다만 준행할 따름이다. 기다림의 엄청난 힘이다. 그리고 부르짖음이란 충실함이다. 믿고, 맡기고, 내버려둠으로써 그 어떤 외침보다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어떻게?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그러므로,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시 116:3-4).

 

우리의 부르짖음은 그 어떤 저항보다 강하다.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77:2).

 

다른 그 무엇으로도 나는 위로 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오직 주께 아룀으로 주를 바라고 주를 기다림으로 되었다. 이에 지금, 처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행할 뿐이다.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

(38:9).

 

요지부동인 것을 두고 괜히 자꾸 불평하고 원망하며 그것으로 위로 얻을 날을 기다리느니, 저가 안 하면 내가 한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으나 주의 명령이 곧 복이었다. 당장은 손해가 되고 심지어 더 큰 불행이 되어 나를 짓누르는 것 같지만 반드시 주가 이루실 것을 믿는다. 그러할 때,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시 40:2).

 

오늘은 주가 이루시는 새 날의 첫째 날이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