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
신 18:13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시 43:3
우리가 어찌 하나님 앞에서 완전할 수 있을까? 모세는 일러 “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신 18:22).” 그 말의 증험이나 성취함이란, 나무는 열매로 말하고 사람은 순종으로 보인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 7:18).” 이는 단순한 원리가 아니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3:10).” 두려움과 떨림으로 맡은 바 주가 더하신 일에 충일함이겠다. 하면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7:19).”
곧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신 18:13).” 하심은 그저 마음으로 뜻을 다하고 생각으로 모래성을 쌓는 일과 다르다. 사람은 누구도 하나님 앞에 완전할 수 없다. 오직 완전할 수 있는 길은 완전하신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를 맡김으로 내 책임은 없다.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은 완전하시다. 고로 나도 완전하다.
생각하기와 말하기, 말하기와 실천하기는 다르다. 삶이란 사는 일이지 생각하는 것도 누구에게 말하는 것도 아니다. 말은 쉽고 생각은 가벼우나 사는 일은 부대낌의 연속이고 다투지 않는 하루는 없다. 내 안에 이는 죄와 성령이 이루시고자 하는 일은 날마다 싸운다. 갈등이다. 회의다. 그럼에도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노인 바울이 말하였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그 나이에 그 정도 했으면 됐지 곧 죽음을 앞두고 기력이 쇠한 이가 할 소린 아닌 듯한데, 우리가 보기에는 충분히 이루었다. 저만큼 회심한 후 모든 걸 바쳐 충성된 그리스도인으로 산 자가 또 있었을까? 그런데 것도 감옥에 갇힌 현재, 조만간 죽음을 앞두고 있는 저로서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12-13).”
나는 늘 이 말씀을 묵상할 때면 정신이 번쩍 든다. 곧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늘 생각하기나 말하기로 할 일을 미루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는 허사다. 어제도 아이와 수업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였다. 개구리 다섯 마리가 있었다. 저들에게 위기가 닥쳤다. 두 마리는 위험을 감지하고 생각했다. 피해야 해! 하지만 세 마리는 생각도 못했다. 그런데 모두 결과가 똑 같았다. 왜 그랬을까? 생각으로는 안 된다. 생각은 삶이 아니다. 공부 잘 하는 아이와 못하는 아이의 뚜렷한 차이도 하나다. 못하는 아이는 늘 ‘할 만큼 했다, 벌써 다 했다.’ 하고 늘 우긴다. 공부 잘하는 아이는 ‘덜 했다, 더해야 할 게 남았다.’ 하고 말한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잘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15-16).” 바울이 전하여 주는 말씀도 그런 게 아닐까? ‘이룬 자들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한다.’ 오직 예수님만이 '다 이루었다.' 하실 수 있다. 어느 인간도 숨이 넘어가면서 다 이루었다 하고 말할 수 없다. 생각해보면 시간을 두고 온 게 너무 많다. 그때마다 나는 생각하기를 행동하기 대신 하였다. 특히 하던 일, 해야 할 일을 멈추고 생각하기로 행동하기를 미루었다. 그러는 동안 세월은 흘러 나이는 속절없이 흘렀다.
지금 내 앞에 두신 일, 내가 해야 할 일을 가지고 할 수 있는 만큼, ‘그대로 행한다.’는 게 중요하다. 때론 이 길이 맞나? 이대로 계속 해도 되나? 하는 회의와 갈등이 들 때에도, 멈춰 서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면서의 일이다. 이를 행할 뿐이다. 여기까지 인도하시고 함께 하신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믿는다면 주저할 게 없다. 어떠하든지 멈춤은 없어야 한다. 그런데 생각이 많다는 것은 행동하기를 미루고, 행동하기를 미루는 동안 다른 일이 자꾸 생긴다. 사탄은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을 기꺼이 제공한다. 무의식적 방어기제로 ‘싫은 마음은 곧 나쁜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 꼭 보면, 늦는 사람이 늦는다. 저에게 약속은 늘 그 정도다. 이런저런 이유가 많다. 그런 사람은 또 항상 할 말이 많다. 그에 따른 변명이 끝도 없다. 보면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희한하지? 사람의 특징은 억울할 뿐이다. 어쩌면 우리의 의식 깊숙이 처음 사람 아담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마음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니 탓을 한다. 탓은 변명이 되고 변명은 나의 억울함이 된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말, 범죄자들이 막판에 늘 하는 소리도 그것이다. 나무라면 받을 줄 모른다. 생각하기는 자기애의 발로다. 스스로는 옳은 것이다. 그러니 누구 말도 들리지 않는다. 천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저는 자신이 옳다.
한 마디로 ‘하기 싫음’이다. 불순종이 별 건가? 자신과의 타협이며 옹고집이다. 멈춘 상태이고 답보 상태다. 왜 그러고 있어? 하고 물으면 ‘생각해보고’ 한다. 믿으라, 하면 다음에! 하고 미룬다. 따르라, 하면 나중에! 하고 미룬다. 그 때는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저는 모른다. 우리는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음을 아는 사람들이다. 곧 그 정체성을 알지 못하면,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19).” 바울의 설교는 정곡을 찌르는 듯하다. 그렇게 우리의 생각하기는 행동하기를 멈추게 한다. 그런데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20-21).”
자신이 누구인지, 오늘 자신은 무얼 위해 사는지, 하나님의 주권을 온전히 알지 못함으로 주저하고 미룬 까닭이고 실은 하기 싫은 마음이 지배적이어서 그렇다. 먼저는 회개밖에 다른 길이 없다. 스스로 온당하다고 여기는 것을 회개해야 한다. 더 나아가 자기 임의로 결정한다. 반역도 별 게 아니다. 생각하기에서 스스로를 방기하는 것이 반역이다. 예수님은 그러자고, 여유를 갖고 천천히 따라오너라, 하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그대로, 그 상태로, 그걸 지고 따르라고 하신다. 다음에 보자, 하시지 않는다. 그럼에도 생각하기란 “여로보암이 에브라임 산지에 세겜을 건축하고 거기서 살며 또 거기서 나가서 부느엘을 건축하고 그의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로다(왕상 12:25-26).” 하여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리었다.
우리의 생각하기란 기도가 아니다. 기도란 생각하는 게 아니라 말씀을 듣는 것이고, 주의 뜻에 맡기는 것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두고 종종 우리는 기도 중이라고 표현하는데, 더 엇나가기 마련이다.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28-29).” 이와 같은 비극은 저의 생각하기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이 일은 자기 혼자만의 일로 그치는 게 아니었다.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경배함이더라(30).” 저로 인하여 덩달아 가족이, 함께 하는 이들이 다 같이 자기들 좋을 대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예배하고 주일을 엉망으로 만든다. 그럴 바엔 차라리 목회를 그만두고 여느 교회로 나가면 저도 좋고 저와 함께 하는 이들도 훨씬 나을 것인데,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 4:3).”
정욕이란 생각이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욕구다. 다음으로 미루는 일이고 엄청난 자기변호가 필요한 일이다. 생각이 많은 사람들이 쉬 늙는 것도, 이게 쉬운 일은 아니란 소리다. 이를 야고보는 간음하는 여인으로 비유하고 있다. 저들도 사랑이라 하고 그 사랑은 어떤 경우보다 뜨겁다. 하니 자신을 속이고 남을 능멸하는데도 이를 바로 잡지 못한다. 외도니 불륜이니 하는 부정적인 혼외의 사랑은 금세 뜨겁다. 곧 하나님과 원수 되는 일이란 뭔가 대단한 일을 벌이는 듯 엄청나다. 혼자 온 세상을 구하는 자 같이 대범하기도 하다. 대놓고 하나님을 적대시하는 일만 하는 게 아니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4).” 이웃 사회와 이롭게, 교회가 지역 주민들과 함께. 이러한 기치로 선봉에 서는 경우들도 많다.
우리가 기도한다면, ‘주의 뜻대로 구하는 자’는 결코 앞으로 나아가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내가 이처럼 과감하게 말하는 것은 나의 생이 그렇듯 어리석었다. 생각하기로 점철된 인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들은 신중하다고 했고, 누구는 생각이 많다며 추켜세웠다. 한데 그러는 동안 멈추기를 여러 번 하였다. 하나님은 그때마다 길을 여시고 할 수 있는 동인을 부여하시는 데도 나는 머뭇거리다 돌아섰다. 가다말고 다시 ‘생각하기’로 뜸을 들였다. 그때마다 세월은 잔인하게 흘러갔고 아이들은 무차별적으로 성장하였다.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후회만 남는다. 송구하고 감사할 뿐이지만, 후회는 후회다. 그러는 동안 내 아이들이 보고 느꼈을 아버지 상(像)은 생각하면 눈물만 난다. 우유부단하고 무력하고 말만 무성하였던 부친으로 기억될 것이다. 아이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놀라운 눈치와 그 너머까지 보고 느끼는 통찰을 가졌다. 모를 줄 알지만 다 안다. 그 부모 사이가 어떤지도 알고 아버지의 속셈도 안다. 그러면서 겉으로는 근엄하니 역겨울밖에.
예전에 글방 아이 가운데 아버지를 그렇게 자랑하던 아이가 있었다. 말끝마다 우리 아빠는요, 하고 말을 잇는데 어느 날 속 마음을 들어보니 저의 속에는 증오와 불만이 가득했다. 실은 그 부친이 어디 공무원인데 뇌물을 받고 쫓겨난 모양이다. 이를 물론 아이들이 어리니까 모를 거라 여기고, 친구 사무실에서 나름 높은 자리를 차지하며 일을 했는데 허세가 반이라. 저의 말은 아이들을 역겹게 했다. 뭐라 나무랄 때는 '죽여버리고 싶어요.' 하는 고백이 나왔다. 어떤 모습이었는지, 그림자처럼 그 아이에게 아버지란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뭐라 이르고는 자신은 그것을 실천하지 않으니 아이 눈에는 그것도 모두 사기꾼 같은 것이었다. 중2 모를 줄 알지만 다 알고 있었다. 실은 혼외 여인이 있다는 사실까지도. 나는 아이의 이런저런 말에 어디까지 진실일까? 곧이곧대로 믿어도 될까? 하고 아이를 은근히 의심하다 아이와의 사이가 틀어진 적도 있다. 물론 지금도 그 아이의 말이 다 사실인지, 거짓인지 나는 모른다. 설령 모든 게 꾸며낸 이야기라 해도 참 불행한 일이다.
그래서 바울은 강조한 것일까?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빌 3:17).” 설마 자신은 잘하고 있으니까 자신을 본 받으라고 자신했겠나? 저는 전적으로 주께 맡긴 사람이었다. 이는 자신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맡긴 이에 대한 확신으로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 확신은 요한의 기록에서처럼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 곧 오늘 우리의 문제는 '그의 뜻대로'가 빠진 것이다. 그 믿음의 문제다. 믿음이 있다면서 행함이 없는 것도 그의 뜻보다 자신의 뜻을 우선하여 선택지를 고르는 것이다. 그 믿음은 가짜이거나 기력을 다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거저 얻은 바 된 것이지만 우리 안에 믿음이 있다면 다소 무모할지언정 미루지 않는다. 실패할 게 뻔해도 주의 뜻이면 그대로 행한다. 생각하기를 멈추고 행동할 뿐이다. 닥치고 볼 일이지 오랜 계획과 치밀한 판단으로 하는 주의 일이란 없다. 왜냐하면 생각하기는 하나님이 오래 전, 창세전부터 계획하신 일이다. 그걸 왜 또 생각한다고?
성경의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무모하였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현실적으로 저들은 몽상가 같았다. 말도 안 되는 일에 열심이었다. 가령 120년을 방주를 짓는 일에 몰두하였던 노아도 그렇다. 저의 속에 어찌 갈등이 없었을까? 왜 생각이 없었겠나? 저는 아무도 구원하지 못했다. 겉으로는 실패자다. 자기 가족들만 구원 받았다. 단 한 사람도 건지지 못했다. 세상이 악한 것을 우리가 어찌 할 수는 없다. 아무도 저의 말을 듣지 않았고, 저의 선교는 성과 없이 끝났다. 그렇다고 생각하느라 시간을 허비했던가? 멈추고 기도의 시간을 갖는다거나 다시 생각할 기회를 가졌었나? 또한 노인이 다 된 아브라함은 또 어떻겠나? 일흔다섯의 나이에 여태 안주하고 살던 고향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하나님이 가라 하시는 곳으로 길을 나선다는 게 가당키나 했겠나? 반대는 없었을까? 여러 현실적인 문제는 없었겠나? 말이 좋아 말씀을 따라 간다지만 거기가 어디쯤인지, 언제까지인지, 저는 생각할 시간을 좀 달라고 하지 않았다.
이렇게 돌아보면서 나야말로 생각이 많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후회한다. 그때마다 나의 완곡한 변명은 생각하기였다. 그러면서 늘 뒤로 미룬 게 한 번이 아니었다. 미룰 때마다 십 년씩의 세월이 가차 없이 흘렀다. 아이들은 자랐고 나의 나이는 가혹하게 매겨졌다. 이제 주 앞에 서서 생각해보면 나의 가장 어리석었던 일은 생각하기였다. 부끄럽고 송구하다. 내 곁의 친구들에게, 나의 젊은 동역자들에게 나는 늘 이 말을 해주고 싶어 한다.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야지! 그러다 장독만 깨는 한이 있어도, 무모하다 한들, 주의 일이다 싶으면 감당해야지!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살전 2:19-20).” 주의 일이 아닌 게 뭐 있겠나만 대놓고 사역을 감당하는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은 확신이 있다면, 생각하기를 멈춰야 한다. 생각은 기도가 아니다. 생각은 하나님이 하신다. 때론 기도하기도 멈춰야 한다. 발람과 같이 ‘기도해 보고’ 한다는 말이 얼마나 가증스러운지. 자기 뜻대로 하겠다는 소리와 같다.
오늘 시편은 이를 들추는 것 같다.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시 43:3).
누구도 자신의 판단과 기준으로 주의 일을 할 수는 없다. 주의 일은 내가 생각해보고 하는 게 아니다. 원하는 방향이나 목회 비전, 어떤 낭만적인 꿈 따위가 아니다. 앞으로의 전망도 아니다. 우린 다만 ‘말씀을 따를 뿐이다.’ 예수님은 작금의 현실을 극단적으로 보셨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눅 17:26-27).” 이는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는 게 문제란 말씀이 아니다. 무엇이 다급한지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도 사람들은 그리 안이하였다. 생각하기는 실제 다른 일로 부산하고 분주하다는 핑계다. 나름 저들은 자신의 할 도리를 다한다고 여긴다. 그뿐인가? 성경도 보고 기도도 하고 이 일 저 일, 하나님의 일로 여긴다. 그런데 주님은,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28-29).”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하는 일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당장 산불이 전국을 덮치고, 어디서 전쟁이 나서 3차 세계대전을 우려하고, 무모한 독재자는 핵폭탄을 사용하기 일보직전이며, 이상기후로 지구가 파괴되는 것도 가시적으로 보고 있는데도, 다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안이하다. 예수님은 간곡히 이르신다.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30).” 곧 이 시대의 특징은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주의 재림이 이토록 오랜 것은 오래 참으심으로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고자 하심이겠으나, 나의 우유부단함과 그 기회를 미루고 있는 데 따른 긍휼하심이다.
우리는 태평한데 성경은 다급하시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보라, 지금이다. 은혜 받을 때이다. 다른 날은 내 날이 아니다. 오늘이 구원의 날이다. 지금이 아니면 영영 그 때를 잃을 수도 있다. 목사도 못 되고 목회랍시고 우물쭈물하다 죽을 수도 있다. 자다가 깰 때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롬 13:11).” 모처럼 누구와의 통화에서 나는 저들의 답보 상태인 이야기를 들으며 슬펐다. 뭐라 힘주어 말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그랬다. 그럴 때면 누구의 말도 참견 같았다. 지적질로 들렸다. 듣기 싫다. 더더욱 거부감도 인다. 그래서 더 멀리 도망치려 했고 그 시간이 가열차게 흘러가 나이만 들었다. 세월은 결코 기다려주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인가? 보육원의 누가 죽으면서 나는 첫 회의에 빠졌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찌 이러실 수 있나? 하는 갈등이 일파만파 번져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자퇴하려고 했다. 그때 가까이 지내던 선생이 지나가는 말처럼 혹은 진지하게 해준 말이 있다. 생각한다고 주저앉아 있지는 마라. 나중에 그럼 뛰어가도 모자란다. 무모한 것 같아도 걸으면서 생각해라. 우선 자퇴만은 하지 말고, 정 힘들면 조퇴를 하든 결석을 하든 어떻게든 버티면서 앞으로 가라. 걸으면서 생각할 동안 조금은 처질 수 있어도 곧 따라잡을 수는 있다. 그러나 주저앉아 있으면 다시 일어섰을 때, 뛰어야 한다. 뛰어가도 도달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리고는 자신의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을 들려주었던 것 같다.
주의 일도 그런 것 같다. 때론 이러는 게 맞나? 내게 확신이 있나?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은 게 맞나? 하고 숱하게 ‘생각하기’는 나를 눌러 앉히려 한다. 그리고 잠시만 더, 한 해만 더 미루게 된다. 한데 성경은 ‘자다가도 깰 때가 이 때라!’고 외친다. 마치 롯의 손을 이끌고 소돔과 성을 다급히 도망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알 수 없는 게 두 개다. 하나는 주의 재림이 언제인지 알지 못한다. 또 하나는 자신의 죽을 날이 언제인지 알지 못한다. 어제 죽은 자들은 전날에 자신이 죽을 것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저마다의 계획과 미래도 있었다. 한데 그건 우리의 것이 아니다. 오늘, 지금이 아닌 시간은 내 것인 게 없다. 당장 오늘에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린 알지 못한다. 주께서 오라 하시면 가야 한다. 주의 일이 남았다고 방심할 일이 아니다. 주변에 보면 선교사로 나갔다가 죽고, 목회에 열심을 내다 죽고, 누구보다 주의 일에 장래가 확실하던 이들이 터무니없이 죽는다. 오라 하시면, 당장이라도 가야 한다.
영국의 희극배우이며 연출가인 버나드 쇼처럼 스스로 자기 묘비명에 새겨 ‘우물쭈물하다 이럴 줄 알았다.’ 하고 후회해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나는 어제 누구와의 통화에서 또 오전에 아이와의 수업에서 이러한 사실을 설명하고 싶었다. 그래서 난, 때로는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에라 모르겠다! 하고 한다. 결과는 하나님의 것이고 나는 다만 새로 허락하신 하루를 더 사는 일이었으니. 덕지덕지 허리에 어깨에 파스를 붙이고 앉아 묵상글을 쓴다. 단 한 영혼이 오든 아무도 오지 않든지 주의 교회를 지킨다. 노아처럼, 아브라함처럼, 바울처럼 무모하든 대책이 없든 주가 주시는 마음으로 앞으로 간다. 우물쭈물 할 겨를이 없다. 공휴일이고 주말이고 상관이 없다. 나의 날은 그저 다 평소이다.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시 43:4).
별 볼일 없고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일 같아도 묵묵히 또한 무던하게,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신 18:13).”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저 맡김이다. 주가 하시라, 다 맡겨드리는 것이다. 다만 나는 주께 아룀으로,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시 43:3).
다음 이야기는 모른다. 다만 확신하는 것은 지금 나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에 대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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