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우리가 종일 하나님을 자랑하였나이다

전봉석 2022. 3. 7. 05:16

 

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라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이니라

신 19:21

 

우리가 종일 하나님을 자랑하였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셀라)

시 44:8

 

 

스스로 자신에게는 엄격하게, 남에게는 관대하게 대할 필요가 있겠다. 아닌 건 아닌 거다. “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라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이니라(신 19:21).” 이를 보복의 차원으로만 해석하여 남에게 겨누면 가혹하겠다. 하지만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우리가 경계하여 자신을 주 앞에 세우는 일이 필요하다. 때론 우리가 너무 은혜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무엇이든 용인하고 허용하면서 말이다. 저가 믿는 자인지? 의아한 사람으로 말이다.

 

구원의 전제는 회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겔 18:32).” 마음의 마음이시다. 구원은 믿음으로 얻으나 믿음은 회개로 증거된다. 회개는 전인적인 전환을 말하는데, 먼저는 지식의 전환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말씀 앞에 서면 스스로 죄인인 것에 대해 어찌나 송구하고 부끄러운지, 감사함은 모든 생각을 바꾸게 한다. 다음은 감정의 전환이다.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9-10).”

 

근심함으로 회개한다? 이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는가, 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되는 근심은 구원에 이르고, 교회를 이루고, 한 영혼을 주 앞으로 인도하는 데 이른다. 다음은 의지적인 전환으로,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4-5).” 곧 자신을 돌이키는 데 있어 이것이 녹록하지 않는 것은 기질이고 형질이기 때문이다. 흔히 성격이라 하는데 내 의지나 판단으로 주의 뜻을 바꾸려고 하는 것에서의 전환이다. 가령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경우 그 이유는 분명하였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 4:3).”

 

그럼에도 기도하고 또 기도하기를 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바꾸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뜻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는 데 있다. 결국은 죄가 문제가 아니라 회개하지 않는 게 문제다. 별로 자신은 회개할 게 없다고 느끼는 한 그의 영혼은 강퍅하고 구원은 제자리걸음을 할 뿐이다. 우리가 인격적인 존재라 하는 것은 이와 같이 지성과 감정과 의지가 모두 동원되는 구원을 이루어갈 때를 의미한다.

 

아버지의 설교를 들으며 새삼 그 말씀의 깊이가 새로웠다. 지극히 교과서적인데 성경을 성경으로 풀어 해석하는 데는 변함이 없었다. 특히 모처럼 마스크를 벗고 (다들 줌으로 예배에 참석하다보니) 찬양을 하고 말씀을 증거하는 데 있어 여전히 목소리가 쩌렁쩌렁한 데서 어릴 때 생각이 났다. 그렇게 찬송을 잘 하셨다. 또한 어딜 가나 그처럼 말씀 전하는 일에 열심이셨다. 내 기억으로 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여수 애양원에 입원하였을 때, 늘 그 병원을 순회하듯 방문하여 말씀을 전하는 장로를 보았는데 저는 소경이라. 가끔 회상하는 그이로 성경 66권을 모두 암기하는 자로 손양원 목사 때부터 애양원 교회를 섬기던 노인이었다. 마침 당시 교회 담임목사는 해외로 출타 중이었고, 저이가 아버지를 보자 수요예배 설교를 부탁하셨고 아버지는 기꺼이 이에 응하여 영광으로 삼으셨다. 그 일을 계기로 내가 병원에 있던 몇 개월 동안 아버지는 여수에 오실 때마다 새벽예배나 수요예배 설교를 자처하였다. 그렇게 인연이 되어 내가 퇴원하면서 가게 된 교회가 경기도에 있는 모 정착촌 마을의 교회였는지도 모른다.

 

어느덧 일흔아홉, 어제는 마침 아버지의 생신날과 겹치기도 하여 전날부터 아내는 생일상을 준비하여 같이 점심을 나누기도 하였다. 뵐 때마다 한 뼘씩은 늙어가는 것 같으나,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아버지의 설교 앞에서는 늘 이 말씀이 증명되는 것 같다. 다 아는 내용인 듯하나 새롭고 들을 때마다 새로운 까닭은 우리의 구원이 여전히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단지 믿음으로 구원 받은 것으로 족해하는 영혼은 어딘가 문제가 있다. 아이가 태어나면 자라고 성장하는 것이 마땅하듯이 우리의 회개가 전인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다음의 다섯 가지 확신으로 점검할 수 있는 거였다.

 

첫째, 반드시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자신이 주를 영접하였다고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분명한 확신이 있음인데,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5:39).” 이는 성경을 앎으로 구주를 더욱 온전히 아는 일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3).” 스스로 자기 안에 영생이 있음을 아는 게 이를 반증한다.

 

둘째, 하나님이 나를 그 무엇보다 사랑하신다는 확신에서다. 이 사랑은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서 얻은, 자격증 같은 게 아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그때도 지금도 죄인이나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일 4:9).” 우리가 살아있음을 아는 근거이고 주를 더욱 사랑하게 되는 동인이다.

 

셋째, 하나님은 반드시 나의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확신이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7-8).” 이를 액면 그대로 믿음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데 게으르지 않다. 이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구한 뒤 잊어버리는 것은 받은 줄로 믿기 때문이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에 대해서도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곧 죽기까지 나를 위하심이니 무엇인들 들어주지 않으시겠나?

 

넷째,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확신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5).” 이는 성경의 가장 원론적인 진리로 주의 약속은 영원무궁하시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 곧 주가 내 안에 계시다는 확신,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 그러므로 어떠하든지, 설령 내가 바라고 구한 게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주는 나와 함께 하고 계시다는 확신으로라면 그 모든 게 선하고 의로우실 것임을 확신한다.

 

다섯째, 이에 모든 결국, 승리는 하나님의 것임을 확신한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요한의 설교는 세상을 이기고 승리하는 게 무엇인가를 바로 한다. 곧 지금의 내 처지가 어떠하든지, 비록 나의 몰골은 내가 생각하고 바라던 것과는 거리가 멀다 해도 그것으로도 우리가 주를 바랄 수 있고 승리를 확신하는 까닭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5).” 이와 같은 반문이 우리 안에서 강하게 역사한다. 고로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곁에 나란히 앉은 아내는 내가 설교를 받아 적으며 귀를 기울이는 것을 눈여겨보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그리 훈련되었다. 아버지는 설교를 받아 적게 하였고, 그것으로 교사는 주일학교를 지도하는 교안으로 삼게 하셨다. 한 주간 구역예배 모임이나 성도들의 교제 속에서도 주일에 증거 된 설교를 두고 묵상하고 나누게 하였다. 한참 신앙이 순수하게 자리 잡았던 나의 중학교 시절, 또래 아이들과 주축을 이뤄 성경공부 모임을 가졌는데 우리의 교제는 주일에 받아 적은 설교원고였다. 곧 말씀으로였고 그 안에서 서로들 사랑을 하고 함께 동행을 할 수 있었다. 나의 기억은 그때가 가장 아름다웠고 순수하였던 것 같다. 특히 우리 모임은 누가 지도자도 없었고 우리끼리 자발적으로 모이게 된, 같이 세례를 받은 동기들이었고 그 안에서 풋풋한 사랑도 눈을 떴던 것 같다. 그 가운데 나를 포함해서 셋이 목사가 되었고, 둘이 누군가의 사모가 되었으니… 가끔은 그때를 떠올리면 가슴 한쪽이 뜨거워진다.

 

뿌리는 보이지 않으나 잎으로나 열매로 그 뿌리의 온전함을 알 수 있다. 그와 같이 우리의 이 다섯 가지 확신이 우리의 원론적인 믿음의 근거가 된다. 속된 말로 믿는 사람은 너무 많다. 모두가 교회를 다니고 모두가 신앙을 가진 듯하다. 한데 그 삶은 전혀 별다른 것이 없고 오히려 안 믿는 자보다 더한 경우도 더러 보게 되는 것이니, 자 여기서 오늘 모세의 말씀을 자신에게로 적용하여 보자. “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라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이니라(신 19:21).” 자신을 쳐서 복종시킨다는 바울의 고백이 그러하지 않던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그만큼 자신에게 엄격할 필요를 알게 하심은 주님의 설교에서도 마찬가지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마 18:8).” 문제적으로는 이 얼마나 가혹한가?

 

한데 우리가 소위 은혜의 시대를 산다고 여겨 스스로를 해이하게 내버려두고 있는지, 허용하는 것이 너무 많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하면 더는 할 말이 없어진다. 남들 다 그래, 하면 그게 어디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겠나? 우리가 주를 찬송하고 자랑할 수 있는 것은 나름 그 모든 관심이 주에게로 향함으로 가능하였다. 내 어린 날의 동화 같은 기억들이 그대로 사멸되지 않고 오늘을 살게 하는 것에 감사하다. 옛날엔 그랬지, 하는 회상이 아니라 오늘에도 여전한 나의 날들이 된 것이 기적 같다. 하여,

 

우리가 종일

하나님을 자랑하였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셀라)

(시 44:8).

 

오늘 시인의 감격이 내 것이 되어 감사하다. 이런저런 지긋지긋한 날들도 숱하였고, 그때마다 탈선되어 하나님을 등지고 살았던 때도 길었는데 주의 긍휼하심은 나를 한 번도 떠나신 적이 없다. 우리가 주의 자녀이면 아무리 죄를 지어도 자녀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면 아무리 몰골이 말이 아니어도 주의 선민이다. 참 신앙과 구원의 확신은 이처럼 하나이었다. 곧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실 수 없었다. 곧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23-24).”

 

주의 사랑은 못 말린다. 누가 그 사랑을 훼방하겠나? 이는 결국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딛 1:2-3).”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말씀으로라도 우리에 대한 사랑을 접으실 수 없고, 그는 사랑이시라. 그 하나님의 영원하신 속성 때문에도 우리를 사랑하심이 중단될 리 없다. 하면 믿음으로 전진이다. 엊그제도 나의 젊은 동기 목회자들을 생각하며 간구하였던 것처럼 부디 주저하지 않기를. 미심쩍어하며 우회하지 않기를. 그러는 동안의 세월은 가열 차고, 시간의 속절없음은 가차 없었다. 아이들은 자랐고 나는 늙고 나이 들었다. 그런 동안은 후회뿐이다. 아닌 것은 아닌 거다! “네 눈이 그를 긍휼히 여기지 말고 무죄한 피를 흘린 죄를 이스라엘에서 제하라 그리하면 네게 복이 있으리라(신 19:13).” 사랑은 가차 없는 냉정함을 포함한다.

 

살리기 위해서도 썩어가는 팔이면 잘라야 한다. 눈이 죄를 범하게 하면 뽑아야 한다. 스스로의 결행이 필요하다. 죽기 살기란 막연한 구호가 아니다. 어제도 잠깐 생일 상 앞에서 나눈 이야기가 ‘그땐 참 그랬다.’ 하는 나의 말에 나의 어머니는 전적인 하나님 신뢰를 강조하였다. 죽이시든지 살리시든지, 아버지가 맡으시라! 하고 걸어온 길이었다. 주를 믿고 신뢰함이란 낭만적이거나 고상한 일상이 아니다. 치열한 전투요, 죽을힘을 다하는 사투이다. 어찌 부모의 마음으로 그때를 견딜 수 있었겠나? 우리가 주께 맡긴다는 것은 이처럼 가열 차고, 끔찍하다. ‘가열 차다’는 표준어가 아닌데 통상적으로 사용할 뿐, ‘가열하다’로 쓰이는 게 맞다. 가열하여 자신을 모두 태워버리지 않으면, 스스로 자식을 짊어지고, 집안일을 도맡고, 이런저런 책임과 의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주의 길을 가기는 어려울 따름이다. 다만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밟아야 한다.’ 자신의 욕구를 걱정과 근심을…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러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

(시 44:5).

 

아니면 스스로 의지할 것을 구하게 되는데,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

(6).

 

오늘 시편의 말씀이 우리로 무엇이 중하고, 그러므로 무엇을 붙들고 바라고 의지해야 하는지, 믿음의 확신을 확신하도록 한다.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17).

 

그럴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우리가 종일

하나님을 자랑하였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셀라)

(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