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나가서 적군과 싸우려 할 때에 말과 병거와 백성이 너보다 많음을 볼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애굽 땅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신 20:1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시 45:6
우리의 가나안은 전쟁의 나날이다. 그럴 때 적군의 병력과 규모에 놀라 위축되기 십상이다. 오늘 첫 구절의 말씀은 우리로 그 전쟁의 주체가 누구이신지를 바로 알게 한다. “네가 나가서 적군과 싸우려 할 때에 말과 병거와 백성이 너보다 많음을 볼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애굽 땅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신 20:1).” 하여 그만그만한 사연으로 마음이 분산되는 자는 제외하였다(5-9). 이웃 사랑은 전쟁에서 유보되지 않는다. 새 집, 새 포도원, 새 아내를 얻는 사람에게도 그 부담을 전가하여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다. 마음이 허약한 사람도 제외다. 이는 주신 분복을 누리기도 전에 전사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곧 이러한 내용은 승리를 확신하고 그 결과는 하나님의 것임을 상기시킨다.
믿음의 전투는 준비된 자의 몫이다. 개인적인 사정을 고려하고 승리에 따른 무기나 병력에 좌우되지 않는다. 오직 함께 하시는 하나님만으로 의뢰하는 것이다. 믿음의 전투는 승리를 전제로 치른다. 고로 무장된 자만이 당당히 맞서 싸울 수 있다.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4-17).”
이를 오늘 시편의 한 구절로 축약하면,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시 45:6).
우리의 왕 우리의 구주는 영원하시며 공평하시다. 이를 바로 분별하고 사는 자에게 거룩한 승리도 보장된다. 성경의 역설은 우리의 연약함이 승리의 관건이다.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시 10:17).
우리의 무장은 겸손이고 우리의 겸비함은 주가 준비하신 마음으로다. 사람의 악함을 주가 아신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그럼에도 하나님의 창조 역사는 구원의 날을 향하여 진행되고 있을 뿐이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8:21-22).”
이에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6-8).” 그러한 우리를 위해 성령을 보내셨다. 우리 죄를 대신하여 성자께서 죽으심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이를 알 때, 세상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주가 이루시고 거두시고 승리로 마감하실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시 51:15).
그러니 오늘 우리의 삶이 이 거룩한 전쟁에서 예외될 사안들을 얼마나 많이 짊어지고 사는지. 누군 밭을 사고, 소를 사고, 장가들어 주인의 초대에 결국 응할 수 없을 지경이다.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이는 보편적으로 사는 일이 죄다 그렇다는 소리가 된다.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눅 14:17-20).”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지. 너무 많은 데 정신이 팔려 정작 주의 일에서는 열외가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주일을 지키는 일에서부터 매일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생활에 이르기까지, 너무 분주하고 너무 산만하다.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될 일을 괜한 의로움으로 관여한다. 바울은 이에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올곧음이란 하나로 바르고 곧다. 여러 곳에 분산될 때 하나도 이루지 못한 채 사는 게 늘 복잡할 뿐이다. 사람 관계에서나 집안일에서까지. 그리하여 성경은,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근신이란 말과 행동을 삼가, 힘쓰고 한 길로 행함이다.
모처럼 누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애써 주를 가까이 하고 교회로 나오려던 걸음이 ‘보이스피싱’으로 몇 천을 날린 뒤 돈벌이로 급급한 날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저에게 날품팔이로 젊음을 그리 보내면 어쩌겠나? 하고 나무라듯 교훈하지만 저에게는 들릴 리 없다. 해야죠, 가야죠, 하겠죠 뭐, 하는 식으로 남의 말 하듯 받아 더는 뭐라 이를 수가 없었다. 늘 우리를 위협하는 것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누가 또 어떤 이에게 자신의 명의를 빌려주어 무슨 일을 하는 데 사용하게 하려 했다. 당장 자신도 그 일을 두고 기도하면서 알아보고 준비하는 중인데… 가끔 나는 저들의 두서없음을 두고 어리둥절하다. 보면 오늘의 모습이 그러할 수밖에 없다. 스스로를 허용하는 것이다. 그리 두면 그리 되는 일에 억울해 할 것도 없겠다.
그러니 우리의 약함은 악함으로 이어져 바람에 안개 쓸려 다니듯 이리 몰렸다 저리 몰렸다 하느라 한 치 앞도 분간하기가 어렵다. 저 둘의 예로도 알 수 있고 성경의 이런저런 이해를 구하는 자들의 딱한 사정도 이해는 간다. 그러니 송구하다는 것인데, 그러느라 예정된 잔치에나 전쟁에서 예외가 된다. 그에 따른 영광을 준비하신 이의 영광은 묵살되듯 뒤로 밀린다. 예수님은 일러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먼저와 나중의 원리가 뒤바뀌게 하는 것이 사탄의 일이다. 우리로 자꾸 열외가 되게 한다. 그로 인하여 예수께서 우리 몫을 감당하셨다.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12:40).” 이를 안다면 우리의 우선권은 무엇이어야 할까?
각자 저마다의 옳음을 따라 산다. 그와 같은 비유로 예수님은 기도하는 사람 둘을 비교하셨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눅 18:10).” 기도마저 자기만족에 겨운,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11).” 자부심이란 얼마나 뻔뻔하고 위태로운지,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12).” 스스로의 의로 배부르다. 한데 또 한 사람은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13).”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하는 것은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주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게 한다. 마치 자식을 위해, 가정을 위해, 누구 일에서도 자신이 아니면 안 되는 것처럼 여기는 것은 그 열심으로 자기 의를 채우려고 하는 일과 같다. 상대적으로 주를 신뢰함이란 주로 즐거워하는 일이다.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공의를 행하여 그의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하는도다(사 58:2).” 그런데 정작 그 열심이 자신으로 일을 처리하려고 하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4).” 주는 안중에도 없고 주를 위해 사는 삶이란 얼마나 가증하고 허무한 일인지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7-8).” 성령으로가 아니면 모든 게 헛되다. 나의 열심은 스스로의 자부심이 되고, 믿음은 자신의 신념으로 완고하게 하며, 남을 위하여 희생하는 일은 의무감으로 내몰리기 일쑤다. 이에,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9-11).” 우리가 나서서 목회를 정하고 선을 구하며 의를 도모하는 모든 일은 궁극적으로 악하다.
내가 아는 누구는 자신의 경험에서 목사 되기를 선택하였고, 목회의 방향도 스스로의 판단과 기준으로 낭만을 꿈꾸었다. 저의 이런저런 말을 들으면서 어딘가 답답하고 마음이 안 좋았던 것은 그때마다 응답을 운운하고 하나님을 들먹이는데, 정작 내가 듣기로는 모두가 자신의 보람과 사회 참여에 따른 사람들의 이목을 주의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계획이란 그와 같아서 “그러나 그들이 말하기를 이는 헛되니 우리는 우리의 계획대로 행하며 우리는 각기 악한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리라 하느니라(렘 18:12).” 로버트 M. 퍼시그의 <선을 찾는 늑대>와 같이 자신의 길을 찾아 달려가는 것이지, 주의 일은 오히려 스스로를 배제함으로 성령이 주권자로 나를 인도하시기를 기다린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 14:12).”
이런저런 사연과 사정을 접할 때면 오히려 그것이 나로 주 앞에 더욱 고개 숙이게 한다. 누구는 좀 어떤지 전화라도 해볼까 하다 그만두는 것도 저를 내가 어찌 감당할 수 없어서, 저의 무기력은 오직 주만이 다스릴 수 있음을 인정하며 마음에만 둔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 이외의 것에 스스로 나서지 않게 되었다. 이는 주가 맡기시는 일 외에 다른 것으로 행여 나의 보람을 삼을까 하여 주의 하는 것이기도 하다. 뭐라 한들? 저들의 공통점은 하나 같이 내가 어쩔 수 없다는 데 있었다. 왜냐하면 자신도 스스로 어쩔 수 없어서 저러고 있는 것일 텐데… 결국은 성령으로밖에 달리 길이 없었다. 단호하게 말하지만 성령이 아니시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도 없다.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계 3:9).”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이 영광, 지혜의 왕은 알고 있었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잠 16:1).” 이는 저의 부친 다윗에게서 보고 배운 것이다.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시 25:1).
이에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슥 12:10).” 결국 우리의 애통함도 주심으로 거둘 수 있는 일이라. 성령을 부어주지 않으시면 저들의 마음은 그 어떤 수로도 돌이킬 수가 없음을… 어제는 아이와의 통화에서 이를 느끼며 통회하였다. 마치 남 이야기 하듯 그러죠 뭐, 하는 말에 저의 다급하지 않은 심령을 두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란 것을 확인할 뿐이었다.
그러니 오늘 말씀도 결론은 그것이지 않나?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는 것,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 6:18).” 보면 다들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산다. 누구는 그 사연으로 주를 더욱 바라고, 누구는 그 사연으로 인하여 자꾸 열외가 된다. 다음으로 미룬다. 엉뚱한 데서 바쁘다. 그러니 마음이 점점 하나님과 멀어지는 일은 당연하겠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 29:13).”
누굴 보면 너무 바쁘다. 할 일이 너무 많다. 너무 오만 가지 일에 얽매인다. 그것을 의로 여긴다. 한데 가만히 들추어 그 속을 보면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다. 저들에게서 떨어질까 두려워한다. 그러느라 하나님의 일은 명분뿐이다. 실상은 법벌이의 고단함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남들의 이목에서 헤어나질 못한다. 예수님은 한탄하시듯 일러,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마 25:8-10).” 난감함이란 이런 것이다.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이 곧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시 86:11).
일심이란 올곧음이다. 하나의 마음으로 행하는 길, 우리가 천성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은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신 5:32).”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일,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요 16:12).” 이에 우리 안에 성령을 주셨다. 하여,
내 마음이 좋은 말로
왕을 위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글솜씨가 뛰어난
서기관의 붓끝과 같도다
(시 45:1).
주를 바람이 온전하기를,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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