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이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여 무죄한 자의 피 흘린 죄를 너희 중에서 제할지니라
신 21:9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시 46:1
부득이한 상황에서의 모든 판결은, “너는 이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여 무죄한 자의 피 흘린 죄를 너희 중에서 제할지니라(신 21:9).” 하는 기준을 세워야 한다.
누가 피살되어 그 범인을 알지 못할 때 암송아지의 목을 꺾고 안수하여 ‘여호와여 주께서 속량하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사하시고 무죄한 피를 주의 백성 이스라엘 중에 머물러 두지 마옵소서.’ 하고 아뢰었다(1-8). 또는 적군의 포로 된 여인을 아내로 맞을 때 정결하게 하고, 저로 애곡할 기회를 주되 아내로 맞았다. 그러다 저를 싫증나 돌려보낼 때 돈 주고 팔아서는 안 된다(10-14). 혹은 두 아내가 있어 하나는 사랑하고 하나는 미워할 때 그들 자식 중에 미움 받은 아내의 아들로 ‘참 장자’를 삼게 하였다(15-17). 더욱이 패역한 아들은 그 부모가 성읍으로 끌어다 장로들 앞에서 판결하고 모두가 돌로 쳐 죽임으로 악을 제하고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게 하였다(18-21). 또한 죄를 진 자로 나무에 달아 죽이면 시체를 밤새 두지 말고 장사하여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땅을 더럽히지 말도록 하였다(22-23). 곧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이에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구주 예수를 묵상하게 한다.
일상에서 별의 별 일을 다 겪을 때에 그 기준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 정결이며 누구라도 자기 임의로 감정에 따라 어떤 일도 처리해서는 안 되었다. 완악한 아들을 부모 된 자로 저를 끌어다 돌로 쳐 죽인다거나 사랑 받는 아내의 아들과 미움 받는 아내의 아들을 공정하게 하려하여 기업 무를 장자권을 미움 받은 아내의 아들로 우선하게 한 것 같이, 원시적이고 극단적인 방식 같지만 이에 주를 경외함으로 일처리를 한 것 같이다. ‘이에 기준은 여호와께 정직함이었다.’ 즉 사람의 이해와 상식, 또는 앞서는 감정보다 하나님을 의식하여 우선해야 하는 선의 기준을 세우는 데 목적을 두었다.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는 마음이 어렵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의 감정은 그 이상으로 악랄하고 처참하다. 가령 이번 대선 과정을 지켜보면서 누구의 옳고 그름을 떠나 서로의 비난과 갈등은 가히 저속하고 비열하며 악랄하기 그지없다. 어떻게든 한 표라도 더 얻기 위한 졸렬하고 악의적인 갈등을 부추긴다. 그래서 우리도 경험한 것처럼 자국민끼리의 다툼이나 시비가 내전을 확산될 때 다른 어느 민족과의 전투보다 처참하고 잔인한 것을 본다.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거스를 때 그 태도가 더 극악한 까닭도 그 때문이다. 서로 잘 아는데 앙금이 가면 그 썩어 들어간 부위는 잘라내야 하는 법이다. 오늘 시편은 그런 점에서도 우리의 본색을 두고 위로하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시 46:1).
주의 판단과 기준이 너무 가혹하시다 싶다가도 우리의 악의적인 상태나 마음 앞에서는 할 말을 잃는다. 더더욱 우리의 기도하기가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길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4-15).” 우리가 아무리 저열하고 거짓되다 해도 이는 주의 은총으로 용서될 수 있어도 무당이나 미신에 의한 통치의 죄는 용서 받지 못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런 기준으로 이번 선거에서 누구를 대통령으로 뽑아야 할지, 차악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진영논리로 함몰되면 모든 판단은 흐려진다. 누구 찍어? 하고 묻는 아내에게 나는 잠깐 그리 설명하였다. 흠과 티가 될 죄가 있고, 악의적이고 습관적인 죄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네 자녀들은 빨리 걸으며 너를 헐며 너를 황폐하게 하던 자들은 너를 떠나가리라(16-17).” 스스로 자신의 허물과 죄악 됨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창 32:27-28).” 죽기 살기로 주 앞에 엎드리는 자에게 용서와 긍휼하심도 있다. 우리 영혼은 기도를 멈출 때 악한 것들이 혼재한다. “그러므로 주 내가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으로 그들을 뒤덮을 것이라 그 모든 골짜기에 차고 모든 언덕에 넘쳐 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가득하여 목에까지 미치리라 임마누엘이여 그가 펴는 날개가 네 땅에 가득하리라 하셨느니라(사 8:7-8).”
때가 어느 땐데… 할 때, 나는 여전히 우리의 악의적인 것들 앞에 치를 떤다. 가령 요즘은 공부하러 오는 아이들 가운데 중등부 아이들의 가정이 차례로 확진되어, 지난 주 이번 주간 나는 오후 일찍 집으로 왔다. 그럴 때면 자폐성 아이가 수업을 하는 시간과 겹치고는 하는데 아이는 자기 성질에 못 이겨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다. 늘 아내에게 얘기로만 듣다가 실제 그런 상황을 겪다보니, 어제는 아이에게 언성을 높이고, 돌려보내라고 아내에게까지 뭐라 하였다. 아이의 막무가내인 성질머리에 내가 더는 못 참고 화를 낸 것이다. 엊그제는 초콜릿을 사다 주고, 어찌 얼레고 달래면 되겠나 했더니 허사였다. 아이가 돌아가고 아내는 내게 ‘목사님이 애를 돌려보내라 하면 되겠어?’ 하고 면박을 주었다. 여기저기 모든 학원에서 쫓겨나 아무 데서도 받아주는 곳이 없는 아이였다. 하필 어제는 들어서면서 아이엄마와 마주치며 인사까지 했던 터라, ‘늘 아이 때문에 애 엄마가 애간장이 타는데!’ 하는 말이 나를 부끄럽게 하였다.
고상을 떨며 말로는 누군들 선을 행치 못할까? 정작 이를 감당하는 데 있어서는 그야말로 사명감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벌써 아이는 3년째가 되어 간다. 지금은 그래도 많이 좋아진 것이다. 들은 바로는 제 분에 못 이겨 뒹굴기도 하고, 화장실에 똥을 칠해놓기도 하고, 아파트 복도나 엘리베이터에 오줌을 싸갈기는 바람에 민원이 들어오기도 하였었다. 정작 그 아이를 내가 겪으면서 그동안 아내의 노력이 대단하단 생각을 하였다. 나는 고작 며칠 아이가 울고 떼쓰는 것에도 결국 짜증을 내며 돌려보내란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었는데… 많이 좋아진 거라며, 이제 구구단도 외우고 한글도 술술 읽고 하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하기 싫어 못하겠다고 떼를 쓰는 일이야 여전히 다반사고, 그냥 돌보내면 애도 애 엄마 심정은 어떻겠냐며 아내는 나를 뭐라 하였다. 그걸 떠나 아, 내가 누구를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는 데는 생각보다 미숙하구나, 하는 것을 알았다.
한 영혼을 사랑한다는 일, 이는 한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일 그 이상의 엄청난 의미다. 저는 주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으심을 받은 자이다. 그러면 주의 영광을 살펴야 하고 인정해야 한다. 주의 영광을 인정하지 못할 때, 그 사람만 보이고 그러니 덩달아 욕하고 비난하고 입에 담지 못할 저주도 서슴지 않는 것이다. 결국은 저를 지으신 하나님께 향한 비난이다. 어제는 아내의 핀잔을 듣고, 내가 참 멀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내는 아주 단순하다. 물론 화도 나고 짜증도 나고 하기 싫은 마음이야 누구보다 더하겠으나, 돈벌이로 하는 일이면 당장에 그만두고 돌려보내면 그만일 터, 얼마 전에도 무슨 학원에서 이틀 만에 쫓겨나는 사건이 있었고 아이엄마는 돌려 받은 돈을 쥐고, 그 속상함을 아내에게 풀어놓았던 모양이다. 그러니 우리는 주를 대신하여 그들 앞에 선다. 들어주고, 위로 하고, 권면하며 권징 하는 사람들이다. 이를 위해서도 하나님의 선, 의로우심에 대해 바로 알아야 한다.
눈 가리고 아옹 하는 꼴은 정치판에서나 그와 부화뇌동하는 인파들로 충분하다. 우리로 휩쓸려 다니지 않기 위해 기도로 그 중심이 굳건할 필요가 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히 12:3).” 그렇게 주는 나를 참으셨다. 기다리셨고 포기하지 않으셨다. 주를 생각할 때,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4-5).” 그러니 이는 삶이고, 살아가는 이야기 속의 일이다. 극단의 인내와 노력도 필요하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 사명이 없이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다.
기도는 삶이다. 적용되지 않는 기도는 허공에 흩어질 뿐이다. 지혜자는 자신의 경험을 두고 말하였다.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전 5:1).” 하여 기도하고 이를 삶으로 살아내지 못하면 이는 모두 거짓되다. “네 입으로 네 육체가 범죄하게 하지 말라 천사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께서 네 목소리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6).” 기도와 삶이 따로 분리될 수 없는 이유다. 기도와 삶이 다른 사람은 역겨운 인생으로 흐른다. 고로 그게 힘들어서도 우리는 통회하고 자복하며 주 앞에 엎드린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7).
우리가 저 아이를 두고 또는 그 가정을 위해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여전한 것 같으면서도 많이 좋아지고 달라지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주를 사랑함은 구호가 아니다. 실전이고 실제다. 이는 전투와 같다. 누구를 지지하되 상대를 욕하지 않는 것도 필요하다. 누가 될지, 누구로 주께서 세우실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럴 때 우리가 구할 것은 기도뿐이어서 주의 뜻이 이루어지는 데 필요한 이가 정권을 잡을 수 있기를.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진영의 승패를 놓고 씨름하는 게 아닐 거였다.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사 57:15).”
우리의 기준은 언제나 하나님이다. 오늘 본문도 다소 거칠고 인간적이지 못한(?) 결정을 내리는 듯하나 하나님이 기준이다. 하나님 앞의 정직이 우선이었다. 그리하여 용서받지 못할 죄로는,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마 6:7).” 스스로도 알아듣지 못하고 감당할 수 없는 말들로 주절거려서는 기도가 아니다. 특히 죄악을 품고는…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시 66:18).
또한,
그가 심판을 받을 때에
죄인이 되어 나오게 하시며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
(109:7).
곧 죄인의 기도는 죄로 변한다! 모양은 기도인데 그것이 저주가 되고 죄가 될 수도 있다. 주께 영광을 올리는 기도가 아니면,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 14:13-14).” 곧 누구를 사랑하는 일은 그 영혼을 생각함이고, 저의 영혼을 대하는 일은 주를 사랑하는 일이다. 아버지로 영광을 받으시게 하지 못하는 모든 것은 악하다. 기도도 악하다. 이는 말씀을 중심으로 한다.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 28:9).”
그러니 어제 나의 부끄러움은 그것이었다. 말로는 ‘한 영혼, 한 가정을 위하여’라는 말을 잘 하면서 아이의 억지스러운 태도에 못 견디고 아이 앞에서 돌려보내라고 소리를 쳤으니…. 슬그머니 아이 옆에 가 앉아 초콜릿 사탕을 두 알 내려놓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기는 하였는데… 참으로 미안하고, 송구하고, 한심하였다. 미안함은 아이에게고, 송구함은 하나님께이고, 한심함은 나 자신을 두고 하는 소리다. 나 또한 어려서 저리하였을 텐데… 아니, 살아오는 동안 나의 억지스러움과 죄 됨은 그보다 더했을 텐데… 그런 나를 용서하시고, 참고 기다리신 분이 계신 것을 나는 또 잊고 말았다. 가정예배를 드리며 이를 두고 기도하였고 아이를 위하여 주께 구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씀하신다(눅 18:1). 이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유 1:20-21).” 기도는 더딘 것 같으나 반드시 들으실 것이고, 이에 주의 긍휼하심으로 오늘을 산다.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셀라)
(시 64:2-3).
오늘 시편은 다양하게 우리를 비춘다. 이는,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1).
다른 무엇으로 힘을 얻고 옳은 판단과 분별력을 갖겠나?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행여 그것이 내가 아니었던가? 경건의 능력은 반드시 그 책임을 물으신다는 것이다. 그때에,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4-5).
이른 아침 주 앞에 엎드리는 이유였다.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어제의 이런저런 마음을 오늘 주시는 말씀 앞에 풀어놓고, 나는 허물과 죄로 죽어 마땅할 터인데 주께서 이처럼 긍휼을 더하시는 것이었으니,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10-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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