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심이라

전봉석 2022. 3. 10. 05:13

 

네 형제의 나귀나 소가 길에 넘어진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형제를 도와 그것들을 일으킬지니라

신 22:4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 하나님이 뭇 백성을 다스리시며 하나님이 그의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

시 47:7-8

 

 

섞거나(5), 묶거나(10-11) 못 본 체 방임하여서는 안 된다(1-4). 항상 주를 바라며 살아야 한다. 이를 위해 옷술을 달게 하였다. “너희는 너희가 입는 겉옷의 네 귀에 술을 만들지니라(신 22:12).” 함부로 자신을 놓아두어서는 바른 길을 가기 어렵다. ‘방종하고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기 마련이다.’ 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민 15:38).” 그 술이 옷 끝에 달려 치렁거릴 때면 주의 말씀을 기억하고 이를 준행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39).” 그리하여 실천이 없이는 믿음도 거짓되다. “네 형제의 나귀나 소가 길에 넘어진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형제를 도와 그것들을 일으킬지니라(신 22:4).”

 

이에 우리가 취할 것은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일,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이는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자인 것을 증거 하는 삶이기도 하다. 부르심에 따라 우리는 주의 보좌 앞으로 나아간다. 오늘 시인은 이를 찬송한다.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

하나님이 뭇 백성을 다스리시며

하나님이 그의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

(시 47:7-8).

 

나는 어제 개표방송을 보면서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서로 첨예하게 갈리는 판단과 기준에 있어서도 아, 다르고 어, 다른 것과 같이 ‘이쪽’과 ‘저쪽’은 엄연하였다. 누구는 그 갈린 표 대로 다음 당선이 되었고, 누구는 낙선을 하였다. 그러면서 나는 늘 3위이면서 끝까지 완주하는 이를 응원하였고, 두 생각으로 살아가야 하는 민족의 슬픔을 생각하였다. 승자도 패자도 있을 수 없는 결과이다. 저들이 하나님의 준엄하심을 알아야 하는데, 이에 우리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거룩하신 이의 보좌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세상에서 나는 은혜의 보좌 앞에 서기를 바랄 뿐이다. 그가 우리 인생을 통촉하심이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시 11:4).

 

유난히 우리나라 대통령들의 비극적인 결말에서 늘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느낀다. 우리로 주의 보좌로 부르심은, “그 때에 예루살렘이 그들에게 여호와의 보좌라 일컬음이 되며 모든 백성이 그리로 모이리니 곧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에 모이고 다시는 그들의 악한 마음의 완악한 대로 그들이 행하지 아니할 것이며(렘 3:17).” 우리의 오랜 무속적인 삶과 현실에도 여전한 것들을 한탄하지만…. 모든 게 섞이고 혼재하여 하나님께 가증할 뿐이다.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이니라(신 22:5).”

 

우리 스스로 함부로 생각하고 선택하는 일에 대해서는 겪고 살었던 생애로는 부족한가보다. 이때마다 하나님은 재판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된다. 이에 이기는 자에게는 영광의 보좌가 기다린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계 3:21).”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렸다. 우리의 공적으로가 아니다. 다만 우리는 주 앞에 나아갈 뿐이다. 이는 영광의 보좌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 앞에서 우리는 나뉜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 25:31-33).” 그날에,

 

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

(시 82:1).

 

이런저런 갈등과 선택의 순간에 우리는 말씀을 생각해야 한다. 옷술을 겉옷에 다는 이유다. 그리고 하찮은 일에서도 우리는 그 사소함으로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이를 기억한다. “길을 가다가 나무에나 땅에 있는 새의 보금자리에 새 새끼나 알이 있고 어미 새가 그의 새끼나 알을 품은 것을 보거든 그 어미 새와 새끼를 아울러 취하지 말고 어미는 반드시 놓아 줄 것이요 새끼는 취하여도 되나니 그리하면 네가 복을 누리고 장수하리라(신 22:6-7).”

 

우리 앞에는 은혜의 보좌가 있고, 거룩한 자의 특권으로 이를 분별해야 하는 것이다. 저마다의 평가는 갈리지만 5년이 지나 새로운 이가 대통령으로 뽑혔다. 앞선 이의 남은 생은 어떠할지, 뒤를 이은 이의 행보를 가늠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이 모두를 판단하고 재판하실 우리의 참 재판장 되시는 이는,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계 20:11).”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시다. 유난히 격렬하고 치졸했던 이번 선거를 통해 어떤 두려움이 먼저 엄습하는 것도 같다. ‘하나님의 질투’는 모든 것을 사르는 불과 같이 무서운 것이다.

 

“그리한즉 나는 네게 대한 내 분노가 그치며 내 질투가 네게서 떠나고 마음이 평안하여 다시는 노하지 아니하리라(겔 16:42).” 두려워할 줄 모르면 의식하지도 않는다. 의식하지 않으면 자기 기준으로 판단한다. 자기들 좋을 대로 선택하며 사는 것인데, “그러나 내가 너의 어렸을 때에 너와 세운 언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60).” 나에게는 말씀이 있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 그래서도 주일학교가 중요하고 일찍이 주를 알게 하는 교육은 필요하다. 더러는 곁길로 빠져 먼 길을 돈다 해도, “내가 네게 내 언약을 세워서 너로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니, 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너로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겔 16:61-62).”

 

너무 늦은 때가 이를 것이다. 예수님은 이를 두고 노아의 때와 롯의 때를 비유로 말씀하셨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눅 17:26-29).”

 

그러하기까지 섞고, 묶고,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 양 털과 베 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지니라(신 22:10-11).” 비방거리로 삼아 버리기도 하였다(13-21). 다시 말해 혼합과 화합은 같은 의미다. 빛과 어둠을 섞고, 종교적 화합으로 묶고, 남자와 여자를 명확히 하지 못하며, 함부로 유부녀를 취하는 경우들이 그러하다(22). 다윗은 이를 두고두고 한탄하고 통회하였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시 51:7-9).

 

죄란 궁극적으로 사람에게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향한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10-12).

 

곧 오늘 우리가 잃어버리고 사는 기쁨은 이와 같은 원인으로다. 죄가 우리로 하나님을 멀리하고 세상을 더욱 바라게 한다. 바라던 바,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악을 혼합한다. 이에 지혜자는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 없는 창상이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하고 묻다,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잠 23:29-30).” 곧 나의 허용의 행동반경 가운데서 주를 멀리하게 하는 요인이 있다. 주는 한 번도 나를 멀리하신 적이 없으시다. 다만 그때마다 돌아보면 내가 주를 멀리하였는데 그것은 항상 세상을 더 사랑하던 때였다.

 

더는 나의 남은 생을 주를 멀리하지 않기를. 행여 나를 실망하게 하고 우울하게 하는 것이라도 주 앞으로 나아감으로, 이에 연연해하지 않으려는 것…. 실은 요즘 부쩍 마음이 어려운 두 가지 일이 있다. 하나는 손위 처남이 어느 도시에 사무실을 내고 개업 예배를 드려주기를 청하였다. 또 하나는 생각지도 못한 어느 아이가 집과 자신이 사는 아파트 외에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우울증에 걸렸다. 먼저는 아이의 일로 하필 또 그 곳이 전에 있는 글방 앞이라, 달려가서 만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통화만 하고 내내 마음이 어렵기만 하다. 앞서 그러할 때는 찾아가 예배를 인도하고 축복하는 것이 나의 일일 텐데, 나는 생각만으로도 어려워서 나의 병적인 모습을 두고 주께 입이 댓 발 나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심정을 틈 타 사탄은 이때다 싶은지, 밀 까부르듯 마음을 쥐고 흔들어댄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0-31).”

 

마음은 어렵고 몸은 마음 같지 않아서 그 자책은 고스란히 나를 억누른다. 어제도 종일 나 혼자 집에 있으면서 평소보다 가슴은 답답하고 불안하였다. 그럴 때면 내 안에 불쑥, 하나님께 대한 항의가 인다. 이럴 거면 더 나은 누군가를 세우시지, 왜 하필 나 같은 자를 두시어 제 몫을 다하지 못하게 하시는가, 하는…. 어떤 불안은 불평으로 이어지기 일쑤다. 뚱한 아이처럼 유관순의 스승이자 여성 독립운동가 <하란사>를 읽으며 마음을 추스렸다. 어쩌겠나? 아직 나의 남은 일이 있고, 가야 할 길은 먼데….

 

의기소침함도 사탄이 주로 사용하는 마음이다. 제 몫을 못한다는 자괴감이나 자책은 물론이고 기어이 쓸모없는 자로 자신을 내몰기까지 집요한 것이다. 한데 바울의 역설은,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 5:21).” 나의 나 됨으로 주 앞에 자의적인 죄의식은 죄다. 이 모두를 사하심이 주의 은혜였다. 한데 자책은 현재일은 물론 과거의 일에까지 그 책임을 묻게 한다. 나이 들어 환갑 진갑을 지나서도 어릴 때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로 인해 쩔쩔매는 것이 우리의 죄악 됨이다. 곧 우리의 죄는 주의 은혜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데 있다. 이에 사망이 왕 노릇하게 둔다. 미적거림과 방치가 같고, 외면함과 자기합리가 동시적이다.

 

그러나 바울의 역설은,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말씀을 가까이 하면 할수록 자신의 죄는 도드라진다. 죄가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주께서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귀하고 복된 것인가를 알게 된다. 그렇다고 죄를 허용할 것인가?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6:1).” 말도 안 될 일이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2).” 죄 가운데 여전하다 함은 자신이 스스로 웅덩이를 파려함으로 생수의 근원을 무시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고로 우리는 은혜 아래에 있다는 것, 이 사실 하나가 아니면 그야말로 구제불능이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 6:14).” 나는 이처럼 말씀을 따라가며 주 앞으로 나아간다. 나는 아무 자격도 내세울 것도 없지만 ‘상한 심령’으로 주 앞에 선다. 은혜 가운데 있다고 하는 것은 세 가지 특징으로 드러난다.

 

하나는 은혜가 곧 나의 왕이다. “영화로우신 보좌여, 시작부터 높이 계시며 우리의 성소이시며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렘 17:12).” 은혜를 알 때 주의 긍휼하심도 더욱 간절하여진다.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미 7:19).”

 

또 하나는 주의 인애의 기쁨을 회복한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18).” 설령 하나님의 징계로 오늘의 나로 고통당하는 것이라 해도(개인적으로는 그런 생각을 버린지 오래지만), 주는 결코 그 진노를 오래 품지 않으심으로 주의 인애를 알게 하시고 찬송과 영광을 받으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결국 그와 같은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게 한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 2:13).” 곧 나는 지금 면목 없고 송구할 뿐이지만 그것으로 질질 끌려 다니며 밀 까부르듯 하는 사탄의 농간에 놀아나지 않는다. 못났으면 못난대로, 어리석고 나약하면 나약한대로, 나는 손위처남에게 죄송한 마음을 전하였고 아이와의 만남은… 주께만 아뢰고 부탁드린다. 저들은 나의 이와 같은 속상함을 모른다. 알아주길 바라지는 않는다. 다만 주의 일을 다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속상할 뿐인데, 속상함으로 더욱 주의 긍휼하심을 구한다면 너무 뻔뻔한 일일까?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

지존하신 여호와는 두려우시고

온 땅에 큰 왕이 되심이로다

(시 47:1-2).

 

나는 오늘 시편의 찬송으로 두려움보다 위안을 얻는다. 나 같이 부족한 사람도 주 앞에 서게 하시고 주의 보좌로 나아오게 하심이 주의 영광이 되시기를. 부디 나의 부족하고 소심한 마음이 주의 기쁨이 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즐거운 함성 중에 올라가심이여

여호와께서 나팔 소리 중에 올라가시도다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라

우리 왕을 찬송하라

(5-6).

 

이 땅의 통치자가 또 누가 되었든지, 저의 5년은 어떠할지, 또 누구는 어떻게 판단하고 비난하며 비극적인 결말을 기대할지… 저마다의 생각이나 느낌은 다르겠으나, “우리 왕을 찬송하라!” 저는 우리의 통치자가 아니다. 하나님이 잠시 세우시고 맡기신 자리일 뿐이다.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

하나님이 뭇 백성을 다스리시며

하나님이 그의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

(7-8).

 

받아들이고 수긍함은 주의 선하신 뜻을 바라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높임을 받으실 것이다.

 

뭇 나라의 고관들이 모임이여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다

세상의 모든 방패는 하나님의 것임이여

그는 높임을 받으시리로다

(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