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전봉석 2022. 3. 12. 05:22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신 24:19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시 49:6-8

 

 

삶에 있어 인색함으로 사는 일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함이다.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신 24:19).” 성경의 기본 지침이시다. 떡을 물에 던지라는 말씀도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전 11:1).” 돌려받을 생각 없이 나누라는 의미다. 반드시 주가 갚으신다. 여러 날 후에 도로 찾는다함은 내게 필요할 때 이를 더하신다는 의미다. 이를 오늘 시편의 말씀으로 재해석하면 흥미롭다.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시 49:6-8).

 

우리 구원이 어찌 돈으로 그 값을 지불할 수 있겠나? 더욱이 자신이 자신의 것을 챙기고 사랑하는 데 있어서는 아무도 그것으로 형제를 구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마치 사는 것이 영원한 줄 알고 살기도 하니까,

 

그가 영원히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인가

그러나 그는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어리석고 무지한 자도 함께 망하며

그들의 재물은 남에게 남겨 두고

떠나는 것을 보게 되리로다

(9-10).

 

인생이란 이처럼 허망한 것이어서 가장 적절한 판단은 하나님께 드리고 맡김이겠다. 예수님은 일러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마 6:20).” 곧 우리가 가장 안전히 투자할 수 있는 것은 천국에 쌓는 것이다. 이 땅에서의 생각은 허망할 뿐이어서,

 

그러나 그들의 속 생각에

그들의 집은 영원히 있고

그들의 거처는 대대에 이르리라 하여

그들의 토지를 자기 이름으로 부르도다

(시 49:11).

 

그런들 길어야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 하셨는데 이를 알지 못하고 사는 일에는 짐승과 다를 게 없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의 길이며

그들의 말을

기뻐하는 자들의 종말이로다 (셀라)

(12-13).

 

몸을 이끌고 말씀 앞에 앉힌다. 어제는 목이 아프고 온 몸이 쑤셨다. 누구는 오미크론이 아닌가, 하여 ‘코로나19 자가 검사’를 하였으나 음성이었다. 혹시 몰라 혼자 떨어져 끙끙 앓고 잤다. 혹시 전날에 왔던 누구 때문은 아닌가? 하여 전화를 해보았더니 또 한 판 벌이고 울음이 가득 섞인 목소리였다. 그러니 저가 사는 이야기가 내게는 더 고달프고 아파보였다. 결국은 이혼까지 갈 것인지…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왜 또? 하고 묻다 그만두었다. 그리고 오늘 말씀 한 구절,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20).

 

저마다의 사연과 문제가 더 크다. 전염병은 창궐하고, 전쟁과 난리, 소문과 소문이 난무한 것이 딱 재앙의 날을 더하는 것 같다. 예수님은 앞서 이때를 말씀하시며 주의를 당부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마 24:4-8).” 얼마나 미혹하는 것들이 많은지, 개중에 게임은 애나 어른이나 정신을 못 차린다. 거짓 선동과 진리 아닌 것이 판을 흔들고 사람들은 불려다니는 안개처럼 이리저리 떠돈다. 서로 대적하며 곳곳에 기근과 지진 등 자연재해가 발생한다. 이 모든 게 재난의 시작이다.

 

나는 어느 가정의 이야기를 엮으며 저들이 안고 사는 문제의 심각성에 치를 떤다. 아이가 그대로 보고 자란다. 또 상을 둘러엎었다고 하니 그 속에 분이 가득하다.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15-16).” 그러니 누구더러 참고 살라고만 할 수도 없고 도망치듯 그만 끝내라고 권할 수도 없다. 나는 함구함으로 저의 이런저런 사정에 대하여 덩달아 휘둘릴 수는 없다. 선택의 문제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아뢰고 고함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그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있는지 점검해야 할 필요는 있겠다. 한데 문제는 저 자신이라.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 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17-18).” 그 속에 늘 곁가지가 자라서 온갖 새들이 깃드는 형국이라. 마틴 루터의 말처럼 죄란 머리 위를 맴도는 새들과 같아서 염려와 근심이 떠날 줄 모른다. 그러다 머리에 둥지를 트는데도 그대로 두는 것이 죄다.

 

그러니 참 말씀이 어렵고 무겁게 다가온다.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19).” 또한 “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20).” 하필이면, 사탄은 딱 그 시점에서 시비를 붙이고 싸움을 일으켜 분을 발산하게 하는 것이다.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22).” 그 고통이 중하기는 하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감하실 것이다.

 

아픈 와중에도 저들을 두고 마음에 걸렸고, 하나님이 어찌 진행하시려는가, 하는 생각으로 생각은 생각으로 꼬리를 물었다. 어제는 몸이 아팠고 그것이 오미크론 전염으로 인한 것인지, 날씨 탓으로 며칠 비가 온다더니 그것 때문인지 알 수는 없었다. 나는 아플 때면 마음은 오히려 가붓하다. 주신 몸으로 산다는 일은 주신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감사는 어려울 것 같다. 그래도 밤새 땀을 흘리며 끙끙거리며 잠들어서인지, 아침에 이처럼 평소처럼 앉아 말씀을 펼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아파도 주일은 지나고 아파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도 희한하다. 언제든지 오라, 하시면 가야 하는 세상에서 욕심보다 어이없는 일도 없겠다. “사람이 맷돌이나 그 위짝을 전당 잡지 말지니 이는 그 생명을 전당 잡음이니라(신 24:6).” 누구를 상대할 때 저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는 정당함은 거짓되다.

 

오늘 시편은 이를 일깨운다.

 

뭇 백성들아 이를 들으라

세상의 거민들아 모두 귀를 기울이라

귀천 빈부를 막론하고 다 들을지어다

 

죄악이 나를 따라다니며

나를 에워싸는 환난의 날을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

(시 49:1-2, 5).

 

죄악이 나를 따라다니며 에워싸는 환난의 날을 대비해야 한다. 이에 우리가 주의 보좌로 나아간다는 것은 주의 도우심이 아니면 나의 연약한 육신도, 저들 가정의 이런저런 어려운 처지도 감당이 안 된다.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계 1:17-19).” 우리가 이를 기록한다 함은 말씀대로의 삶이다. 또 누구는 여느 학원으로 아이를 보내느라 토요일에 하루 와서 잠언을 읽고 독해하여 묵상하는 시간을 다음으로 미루었다. 아이 일을 두고 이미 그리 결정한 것이어서 그러려니 하는 수밖에.

 

때가 가까울수록 우리의 선택은 그 하나하나가 우선권을 가져야 한다. 아니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살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는 시절이다. “그 사방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엎드려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을 들으니라(겔 1:28).” 더욱이 오늘을 살면서 가만히 주변을 보면 말씀을 가까이 하고 살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 같다. 그럴 겨를이 없는 것도 사실이고 너무 많은 문제들이 산적하여 여기저기서 펑펑 터져댄다. 당장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람이 사람을 마주하고 대하는 일에 있어서도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장 어렵고 힘에 부치는 법이다. 결국 아이의 생각이 그러하니 그러겠다는 아이엄마나 또 둘러엎은 상과 자기 분을 못 이겨 막말을 쏟아낸 상대 앞에서, 나는 어떻게 하라고 해줄 말이 없어서 함구하였던 것이다. 이미 많은 말이 있었고, 저들도 실은 다 안다. 하지만 당장의 일로 다가오지 않는 데야 별 수 있겠나?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죄과를 좋아하는 자요 자기 문을 높이는 자는 파괴를 구하는 자니라(잠 17:19).” 신기하지? 설마 다툼을 좋아할까? 싶은데 자기 속의 분이 풀릴 때까지 이 일은 거듭된다. 나는 모처럼 아팠고 끙끙 앓으면서 나의 몸의 연약함으로 오히려 주의 이름이 간절하였다. 좀 적당히 아프고 모자라고 늘 약함으로 그 가운데 그리스도의 능력을 모시고 산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전에는 이게 그렇게 싫었는데, 나의 약함이 어찌 복인가, 하는 것을 알겠다. 종종 누가 물으면 나는 살기 위해 주 앞에 나를 앉힌다. 아니면 살 수가 없어 그 마음이 온통 뒤죽박죽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할 터. ‘약한 데서 온전하여진다.’는 말씀이 나는 이제 참 든든하다.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는 바울 사도의 고백에도 크게 공감한다.

 

전에는 그것으로 무장하여 어찌 하면 세상을 더 원없이 살 수 있겠나? 궁리에 궁리가 떠나지를 않았는데 더는 바라는 게 없다. 주가 허락하심으로 살아 있는 날 동안,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시 57:11).

 

내 비록 온전하지 못하여 주의 뜻을 바르게 이행하지 못하며 산다 해도,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미워하지 마옵소서 주의 영광의 보좌를 욕되게 마옵소서 주께서 우리와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폐하지 마옵소서(렘 14:21).”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붙드시고 인도하실 것을 믿는다. 그러면 온 사방이 광채가 난다. “내가 보니 그 허리 위의 모양은 단 쇠 같아서 그 속과 주위가 불 같고 내가 보니 그 허리 아래의 모양도 불 같아서 사방으로 광채가 나며 그 사방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엎드려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을 들으니라(겔 1:27-28).” 주의 약속은 무지개처럼 하늘에 가득 떠있다.

 

어디가 아프고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이처럼 적당하여서 다시 또 일상을 시작하게 하심으로 감사하다. 그런 점에서 누구의 경우에도 차라리 그만 벗어던지고 자신의 남은 생이 주를 위해서만 살아가기를 바라기도 한다. 무엇을 하라마라 할 수는 없겠지만,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이와 같은 고백이 이제는 나의 것으로 들려지기를. 두 팔을 들어 하나님께 경배와 찬송을 올릴 수 있기를. 하여,

 

내가 주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을 가지고 오겠사오며

주의 공의만 전하겠나이다

(시 71:16).

 

나의 사는 삶으로 주의 살아계심이 증거 되기를.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의 길이며

그들의 말을

기뻐하는 자들의 종말이로다 (셀라)

(18-19).

 

하여,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2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