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시편 86편 / 주는 나를 돕고 위로 하시는 이

전봉석 2022. 3. 17. 17:59

220320 주일

 

 

시편 86편

주는 나를 돕고 위로 하시는 이

 

시 86:11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시 86:16 내게로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주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 주의 여종의 아들을 구원하소서

시 86:17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

 

 

들어가는 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데도 흔히 면역력을 길러야 한다. 이때 우리는 누구라도 만사형통 모든 게 잘 되기를 바란다. 성경이 제시하는 그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영혼이 잘 되면 범사가 잘 된다.’ 그런데 영혼이 죽었고 그의 기능을 상실하면, 오히려 범사가 잘 되는 게 저주로 작동한다. 그런데 오늘 우리를 지배하는 면연체계가 무얼까?

 

거두절미하고 돈이다. 돈 앞에 장사 없다. 요즘은 애나 어른이나 돈이면 만사형통하다. 공산주의 유물론이나 자본주의 유물론이나 결국은 그 사상이 하나다. 공산주의 유물론은 ‘돈만이 유일하다’고 하고 자본주의 유물론은 ‘돈만이 중요하다’고 한다. 돈은 더 이상 화폐 그 이상의 힘과 권력을 가졌다. 일찍이 칼 마르크스는 말하길, ‘나는 못 생겼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돈으로 살 수 있다’고 하였다. 돈이 최고의 선이 되어버린 세상이다.

 

예수님은 이미 이를 아시고,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셨다. 이미 인간의 마음이 돈 곧 보물에 있음을 아셨기 때문이다(마 6:19, 20).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21).” 이것이 우리의 실상이다. 그렇게 말씀하신 뒤 그 뒤에 다소 애매한 표현으로 덧붙이셨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22-23).” 여기서 우리의 눈은 어떤 의미일까? 분별력이다. 이 길이 맞는지, 이것이 내 것인지. 눈이 보여야 우린 길을 찾고 옳은 길로도 갈 수 있다. 즉 우리 영혼이 잘 되기 위해서는 영적인 눈이 성해야 한다. 소경이 어찌 길을 인도하겠으며 무엇을 분간하고 판단할 수 있겠나? “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시니(마 15:14).” 이처럼 눈은 몸의 등불이며 모든 사물을 분간하는 것이다. 돈이나 재물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언제부턴가 그 돈이 맘몬이 되어 하나님이 되었다.

 

오늘 시편은 다윗의 시로 그 앞에 교만한 원수들의 박해와 핍박을 하나님께 호소하는 내용이다. 악인들이 악한 이유는 악을 악으로 분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은 무엇을 보고 어떤 것을 분간해야 하는지, 오늘 시편은 이를 알려주고 있다.

 

본문이해

오늘 시편은 제3권(73-89편의 시)에 해당하는 시편으로 유일하게 다윗이 지은 시가 한 편 수록된 것이다. 앞서도 밝힌 바, 교만한 원수-돈으로 무장한 사람들로부터 핍박당하는 다윗의 시다. 그 답답함을 주께 호소한다. 또한 곤고하고 절박할 때 주를 찬송함으로 기도한다. 이를 3연으로 나누어, 1연은 1-7절로 절박한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한다. 2연은 8-13절로 경건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주권을 확신한다. 마지막 3연은 14-17절로 은혜 베푸심을 믿고 구원을 간구하는 다윗 고유의 마무리로 이어진다. 오늘은 이를 따라 세 가지 우리가 주목하는 것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절박할 때 아버지께 간구하는 것은 자녀의 특권이다(1-7).

“여호와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시 86:1).”

 

결국은 돈인데, 가난과 궁핍이 우리 영혼을 황폐화시킨다. 이에 그와 같은 어려움 속에서 주를 찾는 게 성도다.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항상 그의 얼굴을 찾을지어다(대상 16:11).” 이는 의무이면서 동시에 권리다. ‘하나님 신뢰’의 기본이다. 그럴 때,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3).” 하시는 성경의 약속은 가장 기본적인 약속이다. 이때 바울 사도는 이르기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곧 우리가 할 일은 기도와 간구로의 아룀이다.

 

“나는 경건하오니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 내 주 하나님이여 주를 의지하는 종을 구원하소서(시 86:2).”

 

저는 어찌 그리도 당당히 경건하다고 아뢸 수 있을까? 어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의인이라 할 수 있을까? 우린 누구도 경건할 수 없고,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 그럼 우리가 경건할 수 있는 길은 ‘주를 의지하는 것’뿐이다. 오늘 다윗은 자신을 ‘주를 의지하는 종’으로 묘사함으로 당당히 경건하다고 아뢴다. 우리가 경건하고 의로운 증거 가운데 하나는 이 땅에서 박해를 당한다는 사실이다. 남들처럼 돈돈거리며 돈을 신으로 섬기며 살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손해도 많다. 그런데 성경은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당연하게 여겼다.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시 86:3).”

 

다윗도 고난 없이 이 길을 가지 못했다. 얼마든지 사울을 먼저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저는 주의 은혜를 기다린다. 이를 부르짖고 구하였다. 야곱도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여겨 형 에서를 능가할 수 있었고 얼마든지 자기 뜻을 따를 수 있었다. 그러나 저는 간절하게 주가 주시는 복을 바랐다. 자신의 부와 권력이 아무 소용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 32:26).” 그리하여 저는 결국 야곱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예수님은 일러,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눅 11:8).” 곧 우리의 간구는 정당하다. 오히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기쁨은 우리가 ‘상한 심령’으로 주를 바랄 때였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 34:18).”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오니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시 86:4).”

 

앞서 들어가는 말에서 요한은 나이 90세가 넘어 우릴 위해 기도하였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 우리는 영혼이 주를 바라는 사람들이다. 이 자리에 모인 것도 단지 이 땅에서 잘 되고 강건하기를 바라는 것 때문이 아니다. 예수님은 단호하게 이르신 바 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 19:29).” 이 말씀이 주는 느낌은 참으로 가혹하다. 하지만 그만큼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음을 알게 하신다.

 

“주는 선하사 사죄하기를 즐거워하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시 86:5).”

 

사죄하기를 즐거워한다는 것은 회개하는 성도다.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인자하시다. 앞서 다윗은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 하고 쫓겨나서도,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4:8).” 하는 놀라운 ‘영혼의 잘됨’을 보여주었다. 겉사람은 모욕과 치욕을 당했고 수치심으로 치를 떨 상황이나 바울도 이에 대하여는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여기서 이런 건 낙심할 일이 아니다. 결국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나 1:7).” 이 얼마나 복되고 감사하고 든든한 말씀인가? 결국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사 58:11).” 이는 엄연한 사실이다.

 

“여호와여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시 86:6-7).”

 

이것이 믿음이고 소망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믿음은 이처럼 바란 게 이루어지지도 않았는데, 이미 받은 줄로 아는 것이다. 모든 믿음의 사람들의 공통점이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쯤 되면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고 하나님을 부인하지만,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39-40).” 우린 알기 때문이다. 곧 우리 ‘영혼이 잘됨’은 현실적인 어떤 것으로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의심하면 얻을 수 없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 1:6-7).”

 

2. 은혜와 긍휼은 하나님의 주권이다(8-13).

“주여 신들 중에 주와 같은 자 없사오며 주의 행하심과 같은 일도 없나이다(시 86:8).”

 

일찍이 모세는 장담하였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 28:2-6).” 그런데 어떤가? 말씀보다 돈이 더 빠르다. 기도보다 돈이 더 위력 있어 보인다. 주의 은혜와 긍휼을 기다리느니, 다들 이구동성으로 ‘돈만 있으면 살기 좋은 세상이야!’ 하고 찬송한다. 그래서 다윗은 앞서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시 39:6).” 곧 이 돈의 허무함을 알고 있었다. 그 권세와 위력이 허상임을 말이다. 바울은 단도직입적으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돈이란 그처럼 허무하면서도 무서운 것이다.

 

“주여 주께서 지으신 모든 민족이 와서 주의 앞에 경배하며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리이다(시 86:9).”

 

이미 믿음의 사람들은 결말을 알고 있다. “만일 내가 내 소망을 금에다 … 재물의 풍부함과 손으로 얻은 것이 많음으로 기뻐하였다면 … 그것도 재판에 회부할 죄악이니 내가 그리하였으면 위에 계신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리라(욥 31:24-28).” 저는 고통 중에도 자신이 부자고, 그 권세로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그러지 않았음을 상기한다. 예수님도 엄히 말씀하시길, “…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둘 다를 섬길 수 있다는 것은 오산이다. 성경은 우리의 악함과 약함을 아시기 때문에 강조한 바 있다.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잠 23:4).”

 

“무릇 주는 위대하사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오니 주만이 하나님이시니이다(시 86:10).”

 

우리는 삶 가운데서 ‘기이한 일’을 자주 경험하며 산다. 알거나 모르거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자하시다.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삼상 12:24).” 우리에겐 실패도 실패가 아니다. 종종 신앙을 간증하는 분들의 고백을 들어보면 억지스러울 정도로 황당한 사례들도 많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시 86:11).”

 

이는 오늘 시편의 핵심구절이라 하겠다. 주의 말씀을 가까이 할 때 돈의 위력이 아무리 세상을 쥐고 흔든다 해도 우리의 기쁨은 아랑곳할 게 없다. 여러 편의 시구에서 이를 찬송하고 있다.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시 25:5).” 결국 우리가 돈의 신 맘몬과 맞설 수 있는 것은 ‘주의 도’뿐이다. 일심으로 우리는 이 진리를 붙들어야 한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생각하셔서 평탄한 길로 나를 인도하소서(27:11).”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도 우리를 인도하신다. 왜?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 주의 영은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143:10).”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오리니 이는 내게 향하신 주의 인자하심이 크사 내 영혼을 깊은 스올에서 건지셨음이니이다(시 86:12-13).”

 

이미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보아 잘 안다. 이에 지혜자는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 이것이 신앙의 원리이고 성경의 핵심이며 천국 생활의 기본수칙이다. 그러니 부디,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엡 4:14).” 세상을 보면 답이 없다. 거기서 누구를 지지한들 좀 더 나은 세상이 될 것이란 착각은 버려야 한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 1:6-7).”

 

3. 은혜 베푸심을 믿고 구원을 간구함(시 86:14-17).

“하나님이여 교만한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의 무리가 내 영혼을 찾았사오며 자기 앞에 주를 두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러나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시 86:14-15).”

 

자기 삶에 주를 두지 않는 사람들이 세상을 지배한다. 모든 규율과 법칙이 하나님이 노하시는 쪽으로 정비되면서, 민주주의니 인권이니 하는 말로 미화된다. 이때 우리가 바로 알 것은 하나님의 인자와 진실이 오늘도 참고 또 기다리신다. 이 시국에 우리가 해야 하는 사명이 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우리는 엄연히 주의 것임을. 아무리 세상이 어떠하다 해도, 하나님은 “가련하고 가난한 자가 물을 구하되 물이 없어서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마를 때에 나 여호와가 그들에게 응답하겠고 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사 41:17).” 이처럼 주의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시다.

 

나오는 말

“내게로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주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 주의 여종의 아들을 구원하소서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시 86:16-17).”

 

자주 언급하는 것처럼 우리는 주께 구한다. “내게로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저는 우리의 아버지시다. 우리는 그의 종이다. 이 시대에 ‘주의 종’으로 쓰시려고 오늘을 살게 하셨고, “주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 주의 여종의 아들을 구원하소서.” 하시는 주의 인자하심으로 주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고로 “은총의 표적”은 우리가 이 땅을 살며 사랑하며 배우는 것이다.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세상은 우릴 보고 부끄러워한다. 아, 이 얼마나 복되고 귀한지!

 

결국 바울 사도의 고백처럼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는 것에 경탄과 찬송이 드려지는지? 언제까지 돈돈거리며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이 돈의 노예처럼 모든 관심과 열심을 돈벌이에 쏟고 살 것인가? 좀 산다는 사람들이 더 죽는 소릴 해댄다. 우린 결코 저들의 종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전 7:23).”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의 고백은 하나다.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

(시 86: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