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규례와 법도를 행하라고 네게 명령하시나니 그런즉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지켜 행하라
신 26:16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7
우리에게 고통을 주사 우리로 주의 도우심을 바라게 한다. 루이스의 말처럼 고통은 주의 확성기다. 큰 소리로 나를 부르시는 수단이다. 하여 그와 같은 근심으로 주를 더욱 열심히 구한다. 이에 바울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죄를 죄로 알고 이를 통회하고 자복하게 하는 것도 그렇다. 이에 오늘 모세는 이른다. “오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규례와 법도를 행하라고 네게 명령하시나니 그런즉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지켜 행하라(신 26:16).” 저는 유난히 오늘을 강조하고 있다.
“네가 오늘 여호와를 네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또 그 도를 행하고 그의 규례와 명령과 법도를 지키며 그의 소리를 들으라(17).” 오늘이다. 항상 우리의 날은 오늘이다. 오늘도 이처럼 평소와 같이 일어나 말씀 앞에 앉을 수 있어 기쁘다. 몸도 마음도 어지간하여 주를 바라는 데 적절한 정도여서 감사하다. 곧 “여호와께서도 네게 말씀하신 대로 오늘 너를 그의 보배로운 백성이 되게 하시고 그의 모든 명령을 지키라 확언하셨느니라(18).” 그 수많은 날들 가운데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만의 오늘이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다른 날은 나의 날이 아니다. 주가 더하시면 항상 우리의 날은 오늘이다.
그래서 모세는 결론을 도출한다. “그런즉 여호와께서 너를 그 지으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사 찬송과 명예와 영광을 삼으시고 그가 말씀하신 대로 너를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라(신 26:19).” 이는 약속이며 하나님이 이행하실 은혜이다. 이를 붙들고 오늘 다윗은 회개한다. 저의 인생에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이를 은폐하려 한 사건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가증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저는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알고 있었다. 하여,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7).
다소 뻔뻔한 것 같지만 이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엄연하셨다.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22).” 이를 알면 통회하고 자복하는 마음 외에 다른 더 좋은 방도가 없음을… “그가 스스로 헤아리고 그 행한 모든 죄악에서 돌이켜 떠났으니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겔 18:28).” 돌이켜 죄에서 떠나기만 하면 ‘반드시 살고 죽지 않을 것’을 성경은 보증하고 계신다. 이에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33:11).”
이 엄하고 지엄한 말씀 앞에서 누구는 기뻐하고 누구는 무심하다. 이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근심을 주셔서 주의 뜻을 바라게 하신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 7:11).” 오늘 시편은 이를 입증하는 기도이고 앞서 신명기 본문은 ‘오늘’이라는 동안의 은혜인 것을 알게 하신다. 그 오늘, 나는 어떠하신가? 하고 되묻는 것 같다.
뜬금없는 친구의 전화에 요즘은 먼저 놀라곤 한다. 대체로 부모님들이 연세가 있으셔서 행여 슬픈 소식인가, 하고 말이다. 주일 오후 저의 전화도 그러했다. 친구는 그저 좀 어떤가? 하고 안부로 시작하더니 결국 평생을 몸 바쳐 살아온 영화판을 떠나게 되었다며 이런저런 근심을 토로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긴 저도 그게 평생 본업이 될 줄 몰랐으나 하나님은 그때마다 저를 무슨 영화제로 연결하셨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름은 열심히 살았다. 꽤 알려진 영화제 국장으로 실무를 담당하면서 이런저런 일에 매진하였는데 돌연 모 항공사가 해체되어 병합되면서 그들이 추진하던 영화제를 그 전통과 자취를 그대로 가져가 모 인터넷 TV에서 흡수한 것인데, 것도 이제는 실무 차원에서 인터넷 영상 차원으로 추진하면서 실무팀의 성격이 모호해진 것이다. 나야 그쪽 일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으니 들은 바 대로면 그렇다. 그래서 그 영화제 임원들로 있던 선생들이 하나둘 그쪽 일이라면 빠지기로 하고, 실무팀의 수장으로 본인의 입지도 모호해진 모양이었다.
결국 이달 말까지 모든 일선에서 철수하고 본의 아니게 은퇴 아닌 은퇴를 강요받은 셈이 된 것인데, 막상 그러고 보니 막막하고 모든 게 허무한 모양이었다. 어제도 실무처리에 있어 넘길 것은 넘기고 없앨 것을 없애려고 출근을 했다가 전화를 한 모양인데… 우리 나이가 늙지도 젊지도 않은 애매한 순간이라 그 동안 다른 일은 해본 게 없으니 선뜻 어떤 일을 찾아야 하나 생각이 많은 모양이었다. 그런저런 이야기를 들은들 내가 뭐라 할 말은 없고, 정리되면 4월 중에 한 번 오겠다고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풀이 죽은 저의 목소리에 덩달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오늘이란 그런 것이다. 오늘은 더 이상 오지 않을 날이고, 오늘 외에는 나의 날이랄 수 있는 게 없다. 오늘이 아니면 감당이 안 되는 것들뿐인데 그 오늘이 항상 우리를 속이는 것이다. 이에 오늘 모세는 이르는 것이다. “네가 오늘 여호와를 네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또 그 도를 행하고 그의 규례와 명령과 법도를 지키며 그의 소리를 들으라(신 26:17).” 오늘은 다시 오지 않고 오늘이 아니면 더는 돌이킬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 51:9-10).
다윗은 과연 밧세바를 범하는 동안 그것이 죄인 것을 몰랐을까? 그 된 일을 은폐하려 여러 상황을 모해할 때 그것이 가증스러운 것을 천하의 다윗이 정말 몰랐을까? 죄란 이처럼 사람을 ‘홀림과 끌림’으로 이끌어 일순간 모든 것을 정지시키듯 마비가 되게 한다. 저가 알면서도 그 일을 저질렀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순간 저의 영혼은 하나님을 놓쳤다. 그러자 모든 게 너무 치밀하였고 자신의 생각과 판단으로는 모든 게 가하다고 여겼다. 자신으로 인해 임신한 밧세바의 일을 은폐하려 전장에 나가 있는 군인 우리야를 끌어들여 이를 어찌 무마하려 할 때도, 이에 그 일이 여의치 않자 저를 전장 깊숙이 디밀어 죽음에 이르게 하기까지… 천하의 다윗도 죄의 ‘홀림’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그 ‘끌림’은 한낱 욕정으로였고 그렇게 무너진 영혼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굴려했다. 이제 저는 주의 이름을 부른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1).
곧 우리의 오늘을 이끄시는 이가 성령이셔야 함을, 성령을 놓치게 하는 것이 죄의 ‘홀림과 끌림’이어서 어느 순간 돌아보니 자신의 추악한 모습에 스스로도 기가 막히고 놀라울 따름이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12).
그 즐거움, 주를 아는… 주의 영이 나를 이끄시는 즐거움을 잃어버리면 우리 영혼은 껍데기뿐이다. 이에 욥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강물이 소용돌이칠지라도 그것이 놀라지 않고 요단 강 물이 쏟아져 그 입으로 들어가도 태연하니 그것이 눈을 뜨고 있을 때 누가 능히 잡을 수 있겠으며 갈고리로 그것의 코를 꿸 수 있겠느냐(욥 40:23-24).” 누가 강물의 코를 갈고리로 꿰어 붙들 수 있겠나? 주의 은혜도 이와 같아서 주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데 누가 이를 훼방하고 없이 할 수 있겠나? 이는 엄연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롬 5:17).” 곧 우리는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다.’ 받게 하시려고 주 안에서 우리로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도 하게 하신다. 이에 친구는 비로소 어릴 적의 순수하였던 믿음을 회복할 수 있을까?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 42:1).
이와 같은 갈급함도 오늘이라는 동안의 일이라, 저는 과연 알까? 주일 오후 느닷없는 친구의 전화에 긴장하였다가 왠지 나는 희소식을 듣는 듯 한편으로는 그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게 되었다. 나도 그러했으나 저 또한 너무 오래 세상일에 젖어 있었다. 영화제란 게 세상의 모든 문화를 총 망라한 산업이라 그 시장이나 규모는 말할 것도 없고, 화려한 저들의 날들 또한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어서 스타들은 스타들대로 그 밑에 딸린 스텝들은 스텝들대로 겉은 화려하나 속은 엉망이라. 간간히 저들의 뒷이야기를 듣곤 하면서 영락없다고 느낀 것은 죄의 ‘홀림과 끌림’이었다. 어느 것이 먼저랄 것도 없다. 대중의 이목이 집중된 곳에는 죄 또한 집중 포화를 멈추는 법이 없다.
이를 나는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이 이를 조명하시기 때문이다. “가련하고 가난한 자가 물을 구하되 물이 없어서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마를 때에 나 여호와가 그들에게 응답하겠고 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사 41:17).” 이와 같은 주의 은총이 아니면, 오늘은 아무에게도 일어나지 않는다. 오늘이라는 날이 이 지구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 그리하여 가련한 영혼이 물을 구하되 물이 없어 갈증할 때에, 그들의 혀가 마를 때에 주를 찾고 주가 응답하시는 게 가장 귀하고 놀라운 축복인 것이다. 이를 시적인 운율에 맞춰 읽어보면,
내가 헐벗은 산에 강을 내며
골짜기 가운데에 샘이 나게 하며
광야가 못이 되게 하며
마른 땅이 샘 근원이 되게 할 것이며,
내가 광야에는 백향목과
싯딤 나무와 화석류와
들감람나무를 심고
사막에는 잣나무와 소나무와
황양목을 함께 두리니
무리가 보고
여호와의 손이 지으신 바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가
이것을 창조하신 바인 줄 알며
함께 헤아리며 깨달으리라
(사 41:18-20)
이 말도 안 되는 주의 은총 앞에 머리 숙여 경배와 찬송을 올려드리지 못한다면 이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겠다. 친구의 이런저런 사정 이야기가 단지 친구니까 했을까? 저의 끝마디가 의미심장하였다. 목사로서 기도 좀 해줘라! 저는 몰라도 저의 영혼은 주를 갈급하며 살았던 시절이다. 꽤 오랜 시절을 말이다. 나름은 교회를 떠난 적 없고 믿는 자로 산다고 살았지만 동시에 세상의 안 믿는 저들과도 다를 바가 없는 생을 살아왔던 것이니… 그럼에도 우리가 다른 것은 ‘주의 자녀는 몽돌과 같다.’ 아무리 바닷물에 잠겨 살았다 해도 그의 속에는 물이 스며든 적이 없다. 늘 젖었으나 저는 한 번도 젖은 적이 없는 영혼으로 그 안에 주를 모시고 살았다. 나는 저의 끝말을 그리 이해하고 안도하였다.
오늘 다윗의 회개도 그러하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시 51:1-2).
우리는 언제든, 오늘이다. 오늘은 은혜 받을 만한 때이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더는 없을 오늘이 우리에게는 영원하다. 이를 앎으로 비록 끔찍한 죄를 지었으나,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6-7).
이 얼마나 당당하면서 송구하고, 민망하면서도 당연한 간구인지… 우리가 그래도 되는 것은, 저는 나의 아버지시라!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0-11).
얼마든지 우리의 죄가 아무리 깊고 크고 넓고 멀다 해도 주의 사랑은 이보다 더 크고 넓고 위대하시다. 그러므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이에 우리는 죄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주 앞에 나아온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12-13).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17).
이와 같은 확신이 복이다. 은택이란 이런 것이다.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그 때에 그들이 수소를
주의 제단에 드리리이다
(18-19).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0) | 2022.03.16 |
---|---|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 (0) | 2022.03.15 |
하나님이 빛을 비추셨도다 (0) | 2022.03.13 |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0) | 2022.03.12 |
우리가 주의 전 가운데에서 (0) | 2022.03.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