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

전봉석 2022. 3. 15. 05:09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 명령과 규례를 행할지니라

신 27:10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

시 52:8

 

 

우리에게 향한 주의 인자하심은 실질적이다. 어떤 어려움이 ‘도엑’과 같이 우리 영혼의 원수로 같이 있다 해도,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 하고 복을 빌어주시는 데는 아무 것도 우리를 무너뜨릴 수 없다. 성경은 일러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4).” 하시는 주의 마음을 알겠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데도 흔히 면역력이 길러야 하는데 하물며 주의 자녀로 산다는 일은 숱한 도엑과 도엑으로 인한 어려움이 더해지는 일이다. 도엑은 다윗의 숨은 곳을 사울에게 알려 무고한 선지생도 수백 명을 죽인 장본인이다. 그러할 때 우리 영혼의 면역력이란 무엇이겠나?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고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악에서 물러나는 일이다. 도엑은 그렇지 않음이…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

(시 52:7).

 

우리 영혼이 잘 돼야 모든 게 형통하다. 그때의 형통함이 복이다. 그런데 영혼은 죽었고 그의 하는 일만 잘 되면 이는 저주다. 하나님의 자녀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세상 사람들로는 영혼과 상관없이 삶으로 가능하다. 우리 주변의 이런저런 어려움을 보게 되는데 다 이유가 있다. 괜한 어려움이 없고, 어떤 어려움도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인 게 있다. 어떤 절박함에서도 하나님께 간구하고 그의 도우심으로 살 수 있는 자가 그 영혼이 잘 됨을 본다. 어제는 그렇게 시편 86편을 두고 말씀을 정리하였다.

 

여호와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

(시 86:1).

 

우리 영혼의 잘 됨은 일의 형통함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어려움 가운데서 주의 능력을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항상 그의 얼굴을 찾을지어다(대상 16:11).” 이는 전적인 ‘하나님 신뢰’로 가능하다. 성경은 이를 약속하셨고 또한 이행하심을 나타낸다.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3).” 그런데 우리로 그럴 수 없게 하는 숱한 ‘도엑’에 도사리고 있다. 이런저런 염려와 근심일 수 있고 당장이라도 위협하는 모진 세파일 수 있다. 그러할 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누구의 이런저런 사연에서뿐 아니라, 우리의 실전에서도 이를 실감한다. 경건하게 살고자 하면 시련은 마치 필연적인 것처럼 우리를 걸고 흔든다. 그럴 때 다윗은 주를 부름으로 그의 이름을 의지하였다.

 

나는 경건하오니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

내 주 하나님이여

주를 의지하는 종을 구원하소서

(시 86:2).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 주를 더욱 바랄 때 가해지는 고통을 마땅하게 여겼다.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행 14:22).” 이러한 여러 경험으로 저는 우리에게 전한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누구라도 어려움을 회피하고 평안함만을 추구하고 살지만 인생사 그리 녹록하지가 않다. 더욱이 경건한 자로 산다는 일은 스스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경계하며 산다는 의미인데, 그러할 때 기도의 가장 기본은 낙심하지 않는 것이겠다.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

(시 86:3).

 

천하의 다윗도 야곱도 우리 주님도 고난 없이는 이 길을 가지 못했다. 그럴 때 저들을 붙든 것은 ‘영혼의 잘 됨’이었다.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 32:26).” 어쩌면 경건한 삶이란 축복을 간청하는 삶으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눅 11:8).” 이 땅에서 잘 되고 강건하기만을 바라는 게 아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기쁨은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가 사는 것’이다.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오니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

(시 86:4).

 

이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 19:29).” 이 말씀은 표면적으로는 가혹한 것 같으나 그 무엇보다 우선하지 않는 것이 주를 향한 마음이고 이를 헌신이라 한다. 신앙의 기초는 그렇듯이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확신을 잃지 않는 일이다. 이게 참 생각처럼 그리 쉬운 게 아니어서…

 

주는 선하사

사죄하기를 즐거워하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

(시 86:5).

 

우리가 우리의 연약함을 아뢰고 주 앞에 승복하는 것은 그의 선하심을 알기 때문이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34:8).

 

신앙의 체험이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친구는 그의 작은 아들만 전염병에 감염되고 온 가족이 멀쩡하였던 것을 두고, 그럴 때 더욱 주께 감사하는 거야! 하고 말해주자, 그렇지! 하고 금세 인정하였다. 이런저런 일을 겪다보면 우리로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하신 성경의 말씀을 삶 가운데서 느끼고 누리게 된다. 성경의 모든 믿음의 사람들도 그러했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나 1:7).” 즉 우리에게 주신 이 놀라운 은혜와 특권을 우리가 누리지 못하고 산다면 이보다 더 초라한 하나님의 자녀가 어디 있겠나? 하나님은 기필코 우리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신다.

 

그런데 이를 별로 수긍할 수 없는 누구는 자신은 왜 그런가? 하고 물었다. 저는 자신의 기도를 하나님이 한 번도 들어주신 적이 없다고 항변하였다. 내가 듣기로는 들어주셨는데도 그럼 또 그것을 억지, 우연으로 돌려서 남들 다 그러는 것으로 간주하고 만다. 이를 야고보 사도는 엄중히 이르되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 4:3).” 하였다. 실은 저의 구하는 게 온통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 저들처럼 바라는 것과 저들처럼 누리고 추구하며 살고 싶은 욕망이 전부이다. 하지만 성경은 그리 이르지 않으셨다.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시 91:15).

 

이런 걸 보면 우리가 너무 악한 탓인지, 순탄하고 무난할 때는 주를 별로 찾지 않는다. 오히려 싫어하고 멀리한다. 자신이 잘난 줄 안다. 하지만 어려움이 터지고 환난이 주어지면 그때에 저의 신앙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마치 그동안 반석 위에 지었는지, 모래 위에 지었는지 알 수 있다. 곧 어려울 때 우리는 주의 이름을 부를 줄 안다. 서로 기도를 부탁하고 스스로도 주 앞에 아뢴다. 그러할 때,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이는 엄연한 성경의 약속이다.

 

이와 같은 때에 스스로 겸비하여,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하면서 성경은 힘주어 약속하신다.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이상은 이사야 58장의 약속이다(9-11). 예수님은 일러 우리로 우리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날 것이라 하셨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역사 속에서도 그러한 이들로 인하여 노예해방이 가능하였고, 사회적인 악한 구조가 허물어져 남녀가 자율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럴수록 주는 우리를 감찰하신다.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시 118:5).

 

온통 세상이 강퍅해져 ‘데이트 폭력’이니, ‘아동학대’니 하는 일들이 그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빚어지고 있다. 그러한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바라고 어떤 것을 붙들고 살아갈 수 있을까?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에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

(138:3).

 

고로 우리의 기도가 그 능력이 크다. 곧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 5:14-15).” 가만히 주를 생각하며 온 마음과 온 정성을 기울여 마음을 집중하는 일, 기도는 그런저런 상황을 두고 주께 요구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는 일이다. 반드시 우리 주는 응답하신다. “가련하고 가난한 자가 물을 구하되 물이 없어서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마를 때에 나 여호와가 그들에게 응답하겠고 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사 41:17).”

 

끊임없이 같은 일이 반복되고 어떤 어려움으로 질식하는 것은 그만큼 주께 아뢰고 주를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경은 분명히 일러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그리하여 다윗은 주께 아뢰는 것이다.

 

여호와여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시 86:6).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은 성도로 사는 자의 기본자세다. 당장은 아무런 변화도 없고, 내가 원하는 바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지만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7).

 

이것이 믿음이고 소망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그렇게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실제로 살았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39-40).” 설령 약속된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낙심하지 않을 것은 ‘더 좋은 것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 1:6-7).”

 

아주 가끔은 이와 같은 말씀으로 상처를 받기도 한다. 그래서 교회를 떠나고 하나님을 부정하게 되는 사람들도 여럿 보았다. 누가 이런저런 어려움을 호소하며 기도부탁을 한다. 나는 그 친구에게 된 줄로 믿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 것을 말해준다. 하지만 뜻하는 대로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우리 안에는 어떤 배신감이 든다. 그럼에도 그러한 배신감까지 가지고 주 앞에 엎드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확신하는 것, 바른 신앙이란 결국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이다.

 

주여 신들 중에 주와 같은 자 없사오며

주의 행하심과 같은 일도 없나이다

(시 86:8).

 

어두울수록 더욱 빛을 내는 것처럼 우리는 물러설 곳이 없을 때 모든 걸 주 앞에 던지게 된다. 나에게 가장 놀라웠던 순간이라면 모든 게 삽시간에 몰아치듯 거둬내고, 나로 강권하사 주의 길로 들어서게 하신 것이다. 그래놓고는 연이은 강타 속에서 나는 오히려 참 신앙의 바른 자세를 알게 된 것 같다. 더욱이 목사고시에서 논술이 낙방의 원인이 되고, 이듬해에는 인성검사에서 두 번째로 낙발할 때는 솔직히 할 말이 없었다. 하나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하는 게 나의 전부였다. 그렇게 두 번씩이나 기껏 잘 찾아 왔는가, 했던 주의 길에서 미끄러지면서 자칫 또 다시 낙오할 뻔하였다.

 

언제 이맘 때였을까? 어제가 친구 동생의 기일이라고 하니… 저이의 죽음이 나를 살린 셈이다. 그때도 기적처럼 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글방 근처 어느 병원으로까지 하나님이 이끌지 않으셨더라면, 그래서 내가 저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쩌면 나는 그 즈음해서 그만두고 내 길이 아닌가보다 하고 옛 생활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우리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영적으로 저는 나에게 더하신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이었다.

 

비록 이 땅에서는 슬픈 이별이라 하겠으나 언젠가 우리는 주 앞에서 다시 만날 것이다. 그리고 함께 외칠 것이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출 15:11).” 나는 지금도 그때의 일을 떠올리면 놀랍고도 기이하고, 내 생에 가장 큰 은혜의 순간이 아니었나! 확신할 수 있다.

 

강권하심으로 끌려온 터에 신대원도 한 해 떨어뜨리시고 그러는 동안 새벽예배를 쌓고 가정예배를 먼저 세우시더니, 어렵게 마친 3년간의 신대원 시절을 마치고 평생을 일궈 먹던 논술 과목에서, 한 번은 인성감사에서 두 번 떨어뜨리시니까… 그때야 알 것 같았다. “밀 대신에 가시나무가 나고 보리 대신에 독보리가 나는 것이 마땅하니라(욥 31:40).” 한다 해도,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1:21).” 여러 부수적인 기도 응답이 답이 아니었다. 여호와의 이름이 곧 답이었다. 욥의 고백은 이를 일깨운다. 그렇게 우리로 주만 앙망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 42: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