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말씀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
수 21:45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아오소서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돌보소서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가지니이다
시 80:14-15
하나님의 궁극적인 약속은 안식이다. 오늘 본문 후반에 이르러 ‘주께서 주위에 안식을 주셨다’는 표현이 나온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사 주리라 하신 온 땅을 이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다 주셨으므로 그들이 그것을 차지하여 거기에 거주하였으니 여호와께서 그들의 주위에 안식을 주셨으되, 그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하셨으므로 그들의 모든 원수들 중에 그들과 맞선 자가 하나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모든 원수들을 그들의 손에 넘겨 주셨음이니라(수 21:43-44).” 이는 오래 전에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다. 그리고 언약이 이루어질 때 안식이 임하게 하셨다. 비로소 레위 지파의 땅을 분배하고 자기 소명을 다하게 하심으로 안식을 더하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진술에 의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말씀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45).” ‘선한 말씀’이 응하였다는 것. 성경은 말씀이고, 말은 언어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표정과 몸짓, 상대의 숨 고르는 모습과 여운까지도 모두 포함한다. 요한은 일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하는 아름다운 표현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데 주목하게 한다. 이는 단지 언어나 문자로만이 해석되는 구조가 아니다. 말은 그 모든 주변의 환경까지도 하나가 된다. 곧 말이란 말하는 자와 듣는 자의 하나 됨과 그에 따른 주변의 모든 요소와 그때의 상태나 상황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내포한다. 그렇게 다시 들으면, 읽으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 할 때의 이 문장은 정의가 아니라 세계다.
이를 읽고, 듣고 이해하는 데 있어 성령의 광범위한 역사가 아니면 이해할 방도가 우리에게는 없다. 시대를 달리하고 역사와 배경을 엄연히 다르다 해도 성경은 매시간 매순간마다 살아있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이를 쓰든, 읽든, 듣든, 깊이 생각하여 오래 머물든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6).”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이를 어찌 문자의 사전적인 의미나 지시적인 의미만으로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겠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말도 그가 사용하는 언어의 뜻만으로 그 의미가 전달되는 것이기 보다, 표정과 시선과 어투와 주변을 에우는 모든 활동이 한데 어우러져 의미를 생산하고 전달한다. 하물며 너와 나의 말 속에서도 그 진실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는데 하물며 성령의 주관심이란,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4).” 이와 같은 말씀 앞에 헉, 하고 숨을 멈추게 한다. 당하는 치욕이나 고난에 대하여 함부로 소명을 운운할 수 없는 것은,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빌 1:22-23).” 할 때의 그 심정은 죽기까지 주를 사모하는 마음을 강조하는 것으로 단순히 죽고 싶다는 의미를 전달하고 싶었던 게 아니다.
고난을 몸에 이고 산다는 것,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이를 예수님의 제자 되는 길로 다시 이해할 때,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하신 말씀은 결코 시적이거나 낭만적인 표현이 아니다. 한 마디로 죽어야 한다는 소리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그렇게 놓기 어렵고 끔찍할 정도로 탐하는 모든 것에 대한, 자기 부정을 의미한다. 내 기분, 내 생각, 내 판단과 내 결정들을 모두 부인하는 일. 스스로 무시함으로 하나님의 뜻만이 온전하기를 바라는 것. 이를 내가 어찌 감당하겠나 하고 자신 없어할 때, 말씀이 붙드신다는 것.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롬 15:20).”
말씀에 붙들림을 받을 때 수평적 이동이 아닌 수직적인 관계를 우선하게 된다. “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21).” 곧 오늘 날 우리 교회들만 해도 그 형편이 마치 서로 돌려막기 하듯 성도가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것으로 숫자가 늘거나 줄고, 심지어는 다른 이의 밭을 함부로 범하듯 회유하고 빼내가는 경우들도 허다하다. 이단들이야 그게 저들의 역할이나 그러려니 하겠지만, 이와 같은 현상을 앞에 두고 ‘네 십자가를 지고. 네가 따르라’ 하시는 말씀을 경솔하게 들을 수는 없다. 다음의 세 구절은 그래서 같은 뜻을 내포한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막 8:3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9:31).”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10:33).”
인자가 죽어야 하실 것과 고통을 당해야 하실 것과 다시 살아나야 하실 것에 대하여 미리 알게 하시고 말씀하시는 것인데, 이 일이 실현되기 전까지는 아무도 이 말을 받을 수가 없었다. 문자적으로나 그것이 의미하는 지시적인 의미로는 말이 안 된다. 이 의도된 죽음과 피하지 않는 상황을 두고 사람의 언어 체계로 어찌 수용할 수 있는 세계이겠나? 한데 예수님은 한술 더 떠,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그야말로 요즘 표현대로 ‘쩝’이다. 할 말을 잃게 만든다. 그런데 문제는 앞서 시편의 표현에서처럼 사람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세상 그 무엇으로 값을 치를 수가 없다.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그 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시 49:7-8).
그런 걸 내가 어찌 해보겠다고 수고하는 일이나 남을 위하여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기까지 희생을 한다’ 해도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그런 걸 두고 나는 마치 헛발질을 해대듯 씨름한다. 나의 나 됨조차 어찌하지 못하면서 감히 아내나 내 곁의 누구를 두고 끙끙 앓듯 애쓴다 한들. 그럼에서 시인은 그 방법이 있음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내시리로다 (셀라)
(시 49:15).
우리를 구원하실 속량의 값으로 주가 오셨다는 소리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목적이 분명하고 아주 치밀하게 오랫동안 준비하고 계획하신 일이다. 이는 인자의 목적이면서 아버지의 계획이시다. 그 아버지의 뜻은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 6:40).” 오늘은 죽으나 내일은 살 것을 약속하심인데, 이는 영생이라. 머리로는 알아들을 수가 없다. 당연히 베드로와 같은 반응은 언제든지 우리 안에서도 일어난다.
의당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마 16:21).” 이와 같은 말씀에 찬성하는 제자가 오히려 더 이상한 사람 아닌가?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22).” 어쩌면 베드로의 항변은 당연하였고 사람의 도리이며 상식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23).” 아, 이 가차 없는 말씀 앞에 오히려 당황스럽다. 그리고는 한 술 더 떠 우리 주님은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24).” 곧 우리더러도 죽을 각오를 하고, 죽으라는 소리다. 십자가는 짐이 아닌 형틀이다. 이고 사는 게 아니라 그곳에 못 박히는 것이다.
마음이 어려워 혼자 꿀꿀해하던 하루였다. 나 혼자 씨름한다고 될 일도 아니었다. 숨이 막힐 것 같아서 모처럼 차를 몰고 중고 낚시점으로 갔다. 짧은 것 두 대를 샀다. 하나부터 열까지 도로 준비하려니까, 받침이며 낚싯줄, 바늘이나 봉돌 등등. 아무리 용을 쓴다고 아껴 쓰는데도 10만원을 훌쩍 넘겨버렸다. 어디 나갈 수 있는 복장이 아니어서 그것을 준비한 것으로 만족하고 돌아왔다. 기껏 다 처분하고 도로 이게 무슨 짓인가 싶은데, 친구와의 통화에서 나의 목소리에 생기가 느껴졌나보다. 상대가 먼저 알고 물었다. 말의 위력은 이처럼 놀랍고 참으로 숨길 수가 없는 것이다. 어투만으로 짐작케 한다. 표정은 말할 것도 없고, 무슨 단어를 쓰느냐가 아니라 저의 진정성은 그의 안에서 나오는, 어떤 '단어의 정화된 힘'에 의해 생겨난다. 겨우 중고로 것도 의자니 파라솔이니 하는 기본적인 것도 포기하고 오로지 낚시 도구만 몇 개 도로 장만했을 뿐인데도 나의 들뜬 마음은 숨길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빨리 날이 좀 풀리고 온기가 돌면 가까운 저수지에라도 나가서 앉았을 생각을 하니, 마음은 저 혼자 들떠 있었다.
아, 하다못해 이 땅에서의 취미니 여유로도 이처럼 앞뒤가 다른데 하물며 하나님이 준비하신 안식에 대하여는……. 오늘을 사랑하는 일, 내게 주신 이 모든 환경과 상황을 인정하고 기뻐하는 일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기뻐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마음을 감싸는 것 같았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 아, 이제 성령이 아니시면 내 생에 답이 없구나, 하는 안도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3).” 내가 이처럼 주를 바라고, 세상 그 무엇으로 평가하거나 평가받지 않음으로 평안할 수 있는 것,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3-14).” 아, 이와 같은 진리 앞에 나는 이제 두 손을 든다.
고작 중고 낚싯대 두 대와 가장 기본적인 채비들로 떡밥까지 차에 실어놓고는,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생동감은 친구는 대뜸 눈치를 채고 알았는데… 주의 영을 내 안에 모시고 살면서 나는 과연 어떠한지? 오늘은 또 안녕하신지?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13-14).” 됐다 그럼! 복음의 결론은 안식이다.
‘여호와께서 그들의 주위에 안식을 주셨다.’ 오늘 말씀 가운데 이를 붙드는 것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말씀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수 21:45).” 반드시 말이 모든 말씀은 응할 것이다. 이루어지는 그 날 우리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주를 찬송할 것이다. ‘하나도 남음이 없이’ 말씀이 이루어진다는 것.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아오소서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돌보소서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가지니이다
(시 80:14-15).
이와 같은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도 말씀을 듣고 믿고 알고 의지하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하실 때의 이 든든함은 무엇이겠나? 그뿐인가?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16-17).” 이를 내 안에서 증거하시는 영이 계셨다! 지금은 아무리 어렵고 힘들다 해도, 아니 그 이상을 고통을 겪으며 내적 갈등으로 시련을 당하고 있는 누구에게,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
주께서 그들에게
눈물의 양식을 먹이시며 많은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
(3-4).
저를 위해 기도함이 곧 나에게로 돌아와 나를 위로하였다.
주의 오른쪽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에게
주의 손을 얹으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오리니
우리를 소생하게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18-2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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