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이 그 제단을 엣이라 불렀으니 우리 사이에 이 제단은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라 함이었더라
수 22:34
이르시되 내가 그의 어깨에서 짐을 벗기고 그의 손에서 광주리를 놓게 하였도다
시 81:6
두 지파 반이 모세 때에 요단을 건너지 않았다. 그때에 약속한 대로 식솔은 그곳에 남기고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이들만 요단을 건너 7년간 전쟁을 치러 안식을 얻었다. “그 때에 여호수아가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 지파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너희가 다 지키며 또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일에 너희가 내 말을 순종하여 오늘까지 날이 오래도록 너희가 너희 형제를 떠나지 아니하고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그 책임을 지키도다(수 22:1-3).” 하고 여호수아는 이를 인정하고 저들을 돌려보내게 되었다. 그때에 저들에게 당부한다.
첫째, 여호와 하나님을 절대 떠나지 말라는 것.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계명을 지켜 그에게 친근히 하고 너희의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니라(5).” 둘째, 서로 싸우지 말고 얻은 것을 나누라는 것. “너희는 많은 재산과 심히 많은 가축과 은과 금과 구리와 쇠와 심히 많은 의복을 가지고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서 너희의 원수들에게서 탈취한 것을 너희의 형제와 나눌지니라(8).” 이는 성도의 기본원리다. 예수께서도 일러,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 12:30-31).”
그러나 서로 떨어지면 오해가 생기게 돼 있다. 저들이 돌아가 요단 동편에 제단을 쌓았다. 제단은 주께 구별된 자가 주도하여 예배를 드리는 곳으로 이미 영적 중심지로 삼은 실로에는 제단이 있었다. 그러자 서편에 남은 아홉 지파 반이 이를 반박하여 싸우러 일어났다. “이스라엘 자손이 이를 듣자 곧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그들과 싸우러 가려 하니라(수 22:12).” 각각 지파의 천부장들이 주축이 되어 나서려하자 여호수아는 비느하스를 보냈다. 비느하스는 제사장 엘리아살의 아들이다. 저들에게 종교적인 문제는 정치적인 문제와 다를 게 없었다. 이는 엄연히 우상 숭배이고 반역의 빌미였다.
이에 두 지파 반이 이를 두고 오해가 있음을 밝힌다. “우리가 번제나 소제나 다른 제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성막 앞에 있는 제단 외에 제단을 쌓음으로 여호와를 거역하고 오늘 여호와를 따르는 데에서 돌아서려는 것은 결단코 아니라 하리라(29).” 이는 단지 나중에 후손들이 서로 나뉘어 대적할까 하여 증표로 세운 것이라는 설명이다(27-28). 여기에는 문제될 게 없다. 그런데 이는 오해의 작은 불씨와 같아서 두 지파 반이 마음이 변하여 우상 숭배를 할까 한 것이다. 훗날 예수님은 수가 성 여인에게 이르실 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 4:21).” 하시고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22-23).” 곧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24).”
오늘 본문에 이는 장소나 위치가 아니라 서로의 반목과 오해로 인한 자기주장에 따른 것이다. 또 다른 우상의 한 예가 된다. 앞서 모세는 이러할 것을 알고 경고하기를 “너희가 다 무장하고 여호와 앞에서 요단을 건너가서 여호와께서 그의 원수를 자기 앞에서 쫓아내시고 그 땅이 여호와 앞에 복종하게 하시기까지 싸우면 여호와 앞에서나 이스라엘 앞에서나 무죄하여 돌아오겠고 이 땅은 여호와 앞에서 너희의 소유가 되리라마는 너희가 만일 그같이 아니하면 여호와께 범죄함이니 너희 죄가 반드시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민 32:21-23).” ‘먼저와 나중’의 원리가 우리 생활에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죄가 반드시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 하시는 말씀이 가슴에 남는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하고 예수님은 일러 그 해결책을 명확히 하셨다.
서로 갈라지고 떨어져서 이를 이행하고 준행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때 우리를 주목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높일 때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시고 높이신다는 것이다.
그들은 종일
주의 이름 때문에 기뻐하며
주의 공의로 말미암아 높아지오니
주는 그들의 힘의 영광이심이라
우리의 뿔이
주의 은총으로 높아지오리니 우
리의 방패는 여호와께 속하였고
우리의 왕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에게
속하였기 때문이니이다
(시 89:16-18).
‘종일 주의 이름 때문에 기뻐한다는 것.’ 하며 ‘주의 공의로 말미암아 우리가 높아지오니’ 하는 신앙 고백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우선할 때에 ‘주는 우리의 힘의 영광이심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마 7:24, 26).” 서로 대비되는 이 두 사실을 두고 깊은 묵상이 필요하겠다. 주의 말씀을 듣고 행한다는 것과 듣지 않고 행하지 않는다는 차이는 어쩌면 당장의 문제가 아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칠 때에 판가름이 나는데, 이는 우리 앞에 놓인 심판의 때를 의미하기도 한다(25).
사람은 죄로 인해 영원히 창조주 하나님께 정죄함을 받게 되었다. 이를 위해 말씀이 오셨고,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그러한 이가 있어,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다.’ 한데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7:27).” 그 결과는 엄청나게 갈리었다. 하여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5:29).” 그리 여김이 마땅하고 이는 우리의 삶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하나님의 용사에게 주어진다는 것은 성경의 기본 이치이다(시 89:19-37).
그 때에 주께서 환상 중에
주의 성도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능력 있는 용사에게는
돕는 힘을 더하며
백성 중에서 택함 받은 자를 높였으되
(19).
곧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 1:6-7).” 하신 말씀을 늘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다. 이에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고전 16:13).” 여기서 남자답게는 성별의 의미가 아닌 용사의 의미로 읽힌다. 하면 하나님은 준비된 자를 쓰신다.
내가 내 종 다윗을 찾아내어
나의 거룩한 기름을 그에게 부었도다
내 손이 그와 함께 하여 견고하게 하고
내 팔이 그를 힘이 있게 하리로다
(시 89:20-21).
하나님이 찾아내셨다. 견고하게 하셨고 힘이 있게 하셨다. 이는 주의 일을 하는 데 있어 기본이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행 6:3).” 교회에서나 사회에서나 하나님은 우리로 주의 일을 맡길 수 있는 때를 기다리신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2:21).”
하루하루의 삶에서 나의 묵상은 필사적이다. 아니면 살 수가 없으니까. 이를 어제는 가정예배 후에 아내와 이야기를 하다 진지하게 밝혔다. 어쩌면 우린 늘 같은 일로 마찰을 빚고 별 것도 아닌 일로 다툼이 시작되기도 한다. 그런 가운데서 의외의 길이 열리고, 그러는 동안 하나님이 우리를 빚어 가신다. 저는 우리의 토기장이가 우리는 그저 흙이라.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사 64:8).” 아무 쓸모없는 흙인 줄 알았는데 우리로는 주가 쓰실 그릇이 되게 하신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롬 9:21).” 그러므로 우리의 쓸모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주인 되시는 이의 쓰심에 따라 달라진다.
아내와의 대화가 길어지면서 딸애가 왔고 두어 시간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마음이 풀리기도 하고 서로의 오해였던 것도 알 게 된다. 평소보다 조금 늦게 잠자리에 들려 하자 딸애가 건너와 요즘 이러저러하게 ‘썸’을 타고 있는 누구에 대해 말하였다. 말이란 우리가 서로 아, 다르고 어, 다른 것이어서 이해가 없이는 서로의 오해나 갈등만 생길 따름이다. 나는 들었고 딸은 말하고, 나의 결론은 한 가지 ‘주께서 어찌 인도하시는가 보자.’ 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세상이 우리를 강탈할 수는 없다. 이는 성경의 약속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이다.
원수가 그에게서 강탈하지 못하며
악한 자가 그를 곤고하게 못하리로다
(시 89:22).
이는 염연한 사실이어서,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27:2).
결코 저들은 우리를 당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56:11).
그래서 시편으로 사는 까닭은 우리 생의 원리가 성경 속의 성경으로 찬송과 영광으로 올려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벌들처럼 나를 에워쌌으나
가시덤불의 불 같이 타 없어졌나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을 끊으리로다
(118:12).
우리의 최대 무기는 주의 이름이다. 이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명한다.
나의 성실함과 인자함이
그와 함께 하리니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그의 뿔이 높아지리로다
(89:24).
나의 나 됨으로가 아닌 것은 하나님이 어찌 나를 이끄셨고 오늘에 이르렀고, 비록 아무 것도 내세울 것도 자랑할 것도 없지만 누구보다 주의 은혜 가운데 살고 있음을… 나는 딸애에게 들려줄 수 있어 감사하였다. 그렇게 말하다 잠이 들었는지 어쨌는지. 다만 기억이 남은 것은 아이들이나 나의 앞날을 두고 주께 그렇게 애달복달 속 태우지는 않는다. 이상하지? 아내와 자주 시비가 붙을 때도, 나의 고질적인 우울과 불안으로 씨름할 때도, 아들 문제로 온통 마음이 쓰이고, 딸애의 이런저런 이야기에 근심과 걱정이 앞설 법도 한데! 도리어 나는 ‘우리’의 일을 두고는 그리 염려가 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주 앞에 오고 상한 심령으로 씨름하는 누구 일로 애달아하면 모를까?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니 네 나라에 낙태하는 자가 없고 임신하지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 내가 너의 날 수를 채우리라(출 23:25-26).” 말씀이 이루실 것이고 이루셨고 이루어오셨다.
어제는 딸애에게도 그리 말해주었던 것 같다. 남들은 과년한 여식을 두고 부모 마음이 어찌 편할 수 있겠냐 하지만 여태 나와 내 가족에 대하여는 하나님이 어찌 행하셨는가를 누구보다 잘 안다. 물론 이래저래 마음이 쓰이고 은근히 걱정이 왜 없기야 하겠나만 하나님이 어찌 행하셨는가 하는 데는, “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왕상 3:13).” 나는 미처 구하지도 못한 것인데 주가 그때마다 채우셨다. 아이도 그 사실 앞에서는 고개를 끄떡거렸다.
그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
(시 89:26).
이 놀라운 확신은 내가 그리 여겨서가 아니라, 자꾸 잊게 하신다. 그래서인지 나를 위해서는 별로 빌 게 없다. 자식과 가족을 위해서는 별로 바랄 게 없다. 주께서 다 알아서 하실 것임을 잘 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차마 내가 어떤 삶을 살았던지에 대해서는 말해 뭐하겠나? 그럼에도 여기까지 함께 하신 이가 저 아이들을 건사하시고 다스리셨다. 우리 가정을 이끄시고 이제는 심지어 주의 일에 쓰임 받게 하셨다. 뭘 더…?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1).” 이를 위해 나로 기도할 수 없는 이의 상한 영혼을 두고, 안 믿는 가정의 아이들을 두고, 그 가정을 위해… 나는 어제 아내에게도 그와 같은 사실을 우선 알게 하려고, 말은 이어졌고 마침 딸애가 퇴근을 하여 와서 함께 이런저런 대화가 이어졌던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는 지지고 볶고 살면서도 이 가정이 주의 증거가 되기를 기도한다. 오늘 시편의 기도도 그것이다.
우리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기쁘게 노래하며
야곱의 하나님을 향하여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시 81:1).
우리가 할 일은 그게 다다. 그러할 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어깨에서
짐을 벗기고 그의 손에서
광주리를 놓게 하였도다
(6).
이를 삶으로 살면서 몸으로 느끼고 체험하고 주를 찬송할 있다는 것으로 경배와 영광이다. 그럴 때 우린 주의 이름만 부른다.
네가 고난 중에 부르짖으매
내가 너를 건졌고
우렛소리의 은밀한 곳에서
네게 응답하며
므리바 물 가에서
너를 시험하였도다 (셀라)
(7).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늘 택하라 (0) | 2022.04.15 |
---|---|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0) | 2022.04.14 |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가지니이다 (0) | 2022.04.12 |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0) | 2022.04.11 |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0) | 2022.04.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