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전봉석 2022. 4. 14. 05:36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가까이 하기를 오늘까지 행한 것 같이 하라. … 그러므로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수 23:8, 11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그러나 너희는 사람처럼 죽으며 고관의 하나 같이 넘어지리로다

시 82:6-7

 

 

죽음을 앞에 두고 여호수아는 당부한다. 그 가운데 두 구절의 말씀이 가슴을 울리는 듯하다. 하나는 8절,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가까이 하기를 오늘까지 행한 것 같이 하라.” 또 하나는 11절, “그러므로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우리는 죽음의 문턱을 넘기며 말을 남긴다. 그 말은 평생 자신을 따라다닌 한 생이었고, 한 생을 통해 얻어진 통찰이다. 곧 여호수아에게는 오늘까지의 일을 두고 회상하기를 ‘하나님이 우릴 위해 싸우셨다는 것이다.’ “너희 중 한 사람이 천 명을 쫓으리니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 같이 너희를 위하여 싸우심이라(10).”

 

가나안의 특징은 싸움이다. 내 안에 전쟁이 그치지를 않는다. 이 땅에서 안식과 쉼을 얻는 것도 두렵다. 곧 이는 죄로 연결되어 그릇된 길로 가게 한다. ‘그러므로’ 하고 여호수아는 당부하는 것이다. 이는 평생을 두고 얻은 교훈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11).” 우리가 주를 사랑한다는 것, 이는 바울의 표현대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하였는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게 어떤 것일까?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찾아가면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 죽음까지도 유익하게 여기고 받을 수 있는 것은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20).”

 

오직 나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존귀하심이’ 나타나게 하는 것. 이는 과연 어떻게 가능할까?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이 될까? 시편에서 그 대답을 듣는다.

 

그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

(시 89:26)

 

곧 주를 인정하는 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단순히 믿고 그리 느끼고 깨달아 아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 살아드리는 일.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1).” 곧 이는 허상이 아니고 뜬구름도 아닌 우리 손에 주신 말씀으로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는다는 것은 듣는다는 것이고, 듣는다는 것은 스며든다는 의미다. 읽기는 단지 자신의 이해 정도에서 알고, 느끼고, 깨닫는 수준을 의미한다면 듣다, 스민다는 것은 햇볕에 얼굴이 타고 농작물이 삼투압작용으로 온도와 습도의 용도에 비례하여 성장하는 것과 같다. 곧 아무런 막이 없는 상태에 받는 압력으로 우리 삶의 영향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에게 일러,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요 1:50).” 하실 때에 저는 어떤 불투명막이 가려진 것처럼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46).” 하던 자신의 지식을 벗어내야 했다. 곧 읽기는 듣기와 다른 것으로 읽기는 머리에 머물기 쉽고, 듣기는 마음에 머물기 때문이다. 나는 누가 성경공부나 필사, 완독, 언어나 어원을 찾아가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는 것도 그로 인하여 머리는 커지는데 마음에 감동은 없고, 마음에 남지 않으면 생활로 드러나기가 어렵다. 아이들과 수업할 때도 듣고 있냐? 하고 물으면 들어요! 하고 대답하지만 귀로 말고 마음으로! 하고 도로 되받는 것도 그럴 때이다. 듣기만 하면 색이 바라고 나중에는 타들어가는 것과 같다. 우리 교회 창가 쪽은 남향이라 종일 볕이 든다. 식물들이 좋아하는 자리다. 하지만 이를 종종 돌려주고 자리를 옮겨주지 않으면 어느새 한쪽 이파리만 누렇게 타들어간다.

 

나다나엘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다. 듣는다는 것은 내 이야기로 스민다는 뜻이다.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11:27).” 나사로는 이미 죽어 무덤에 있은 지 사흘이 지났다. 그런 가운데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 믿음을 확인하신다. 그러자 곁에 있던 마르다는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27).” 하고 대답하는데 그 대답은 머리로 하는, 부투명막이 가려진 고백이었다. 그런 저에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40).” 하고 되받아 물으시는 것이다. 글쎄, 슬픔 중에 마르다의 마음은 어리둥절하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우리의 머리로는 부활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듣는다는 것은 실현이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하고 기도하신다(41). 곧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42).” 이미 믿는다는 저에게, 저들을 믿게 하려 하심이라는데, 그저 어리둥절할밖에!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하고 말씀하셨다(43). 이처럼 부활은 실제다. 우선적으로 우리의 죽음은 부활의 문이고, 그 부활의 실제는 오늘의 일상에서 날마다 실현되는 '나를 죽이고 나를 살리는 일'의 연속이 성도의 생이다. 죽어야 부활도 있다. 죽었던 나사로가 이 말씀을 듣고, 이에 따르는 일만 남았다. 곧 말씀을 듣는다는 일은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 시인하는 일이다.’ 곧 삶으로 살아서 날마다 죽는 날들이 성화이다. 고약한 심보에서 외골수 같은 고집과 아집이 죽는다. 성질이 죽고 거친 말투가 죽고 부정적인 생각이 죽는다. 죽지 않으면 부활도 없다.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20:18).” 무덤이 비었다. 죽었던 이가 사라졌다. 사라진 줄 알았는데 다시 사셨다. 이를 보고, 듣고, 어떻게 가만있을 수 있겠나?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존귀하심이란 우리로 가만있을 수 없는 어떤 놀라운 역사와 같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이 놀라운 고백은 저가 머리로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마음으로 새겨만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7).” 이를 알게 하시고 고백하게 하시고 그리로 살게 하시는 이가 아버지시다.

 

곧 “이르되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위하여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내가 피할 나의 반석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그에게 피할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폭력에서 구원하셨도다(삼하 22:2-3).” 다윗의 삶은 이와 같이 날마다가 생동감 넘치는 체험의 현장이었다. 저의 고백은 그저 읽거나 듣고, 머리로나 가슴으로 표현하는 정도의 것이 아니라, 삶이었다. 우리의 일상이란 그런 것이다. 곧 저의 삶에 그리스도가 성취되는 것이다.

 

내가 또 그를 장자로 삼고

세상 왕들에게 지존자가 되게 하며

그를 위하여 나의 인자함을

영원히 지키고 그와 맺은

나의 언약을 굳게 세우며

또 그의 후손을 영구하게 하여

그의 왕위를 하늘의 날과 같게 하리로다

(시 89:27-29).

 

말씀은 단순한 약속이나 허풍이 아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7).” 만군의 여호와는 전능자요, 우리를 지으신 이시요, 창조주가 되시는 분을 뜻하는 호칭이다.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렘 23:17).” 하실 때 저의 긍휼하심을 믿음으로 받아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곧 그 확실한 증거가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 만왕의 왕 하나님이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5-6).”

 

나는 이처럼 말씀을 따라가며 주가 더하시는 의미에 벅차다. 몸은 약하여 오래 앉아 글을 쓰거나 읽기가 어렵다. 다들 놀라곤 하는데, 나는 이 자판을 오른 손 하나로 친다. 서너 손가락이 열 마디의 몫을 하려니 어깨는 들리고 팔은 분주하다. 금세 피로감이 몰려오고 곧이어 허리가 엉덩이가 아프다. 공부하는 아들 녀석도 허리가 아픈지 바퀴달린 의자에 앉았다가 단단한 의자로 바꿔 앉기도 하고, 허리를 펴준다는 것을 사서 의자 위에 놓고 앉았다가 섰다가 하면서 몇 시간째 인터넷 강의를 듣곤 한다. 곧 무엇에 의해 어떤 어려움이나 조건은 견디고 이겨내는 것이다. 때론 그 어려움이 우리로 더욱 사모하게 한다. 나의 나 된 이야기는 구슬프고 아들의 수고는 안쓰러울 따름인데, 그럼에도 한다! 아무리 어떠해도 산다! 현실을 받아들인다는 것, 그 주신 이의 뜻에 만족할 수는 없으나 감당함으로 그 의미는 새로워진다.

 

즉 하나님의 진노는 때로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것이기도 하다.

 

내가 회초리로 그들의 죄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그들의 죄악을 벌하리로다

그러나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는 아니하며

나의 성실함도 폐하지 아니하며

내 언약을 깨뜨리지 아니하고

내 입술에서 낸 것은

변하지 아니하리로다

(시 89:32-34).

 

하나님이 세우신 원칙이고 약속이다. 다시 강조하시기를,

 

내가 나의 거룩함으로

한 번 맹세하였은즉

다윗에게 거짓말을 하지 아니할 것이라

(35).

 

다윗은 이야기 속의 저이면서 오늘의 나이다. 나는 가정예배를 드릴 때면 아들을 두고 저를 위해 기도하기를, 하나님과 나 사이의 일처럼 아들의 하나님이 저와 함께 하심을 믿는다고 확신한다. 곧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사 48:10).” 우리로 오늘의 어려움이나 어떤 역경, 고난을 두시는 까닭은 다 목적이 있다. 이때 여호수아의 아름다운 고백처럼 “너희 중 한 사람이 천 명을 쫓으리니,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 같이 너희를 위하여 싸우심이라(수 23:10).”

 

날 위해 싸우시는 하나님을 가장 생동감 있게 느낄 수 있는 현장이 이 지긋지긋한 일상으로다. 날이 궂고 몸은 아프고 팔은 천근인데, 그래서 꾀도 나고 마음은 저 혼자 흐트러지기 십상인데,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아, 나는 언제부턴가 이 말씀을 혼자 되뇌고 입 안에 머금고 웅얼거리듯 사랑한다. 곧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6-7).”

 

앞서 간 믿음의 사람들은 이를 통해 알고 있었다. 실은 우리가 아는 자연도 이를 잘 알고 있고, 저들에게서는 하나님의 성품을 느낄 수 있다.

 

그의 후손이 장구하고 그의 왕위는

해 같이 내 앞에 항상 있으며

또 궁창의 확실한 증인인 달 같이

영원히 견고하게 되리라 하셨도다 (셀라)

(시 89:36-37).

 

나는 이번 주간 시편 89편 다소 긴 구절의 시편의 세계에 빠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일에 순서에 따라 나누는 말씀인데 처음에는 몇 구절로 압축했다가 다시 읽으면 읽을수록 한 구절 한 구절이 모두가 찬송이라, 한 시간에 다 전할 수가 없어 두 시간으로 나누어서 다음 주일까지 염두에 두고 묵상하고 있다. 시편의 세계는 늘 보면 볼수록 놀랍다. 듣는 것에서 보는 것은 또 엄연히 다른 세계다. 욥의 고백을 새삼 끌어와도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이와 같은 고백이 놀랍게도 그 모진 고통의 끝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 더욱 더 울림이 크다. 이와 같이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말 3:6).” 이와 같은 말씀을 어찌 아무나 듣고 보겠나?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 하는 참 고백이 우리 안에서 나오기까지 얼마나 치열하고 맹렬한 싸움이 가열 차겠나?

 

결국은 하나님의 경고를 들을 수 있는 귀가 복이 있다.

 

… 주께서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노하사 물리치셔서 버리셨으며

주의 종의 언약을 미워하사

그의 관을 땅에 던져 욕되게 하셨으며

그의 모든 울타리를 파괴하시며

그 요새를 무너뜨리셨으므로

길로 지나가는 자들에게

다 탈취를 당하며 그의 이웃에게

욕을 당하나이다

 

그의 영광을 그치게 하시고

그의 왕위를 땅에 엎으셨으며

그의 젊은 날들을 짧게 하시고

그를 수치로 덮으셨나이다 (셀라)

(시 89:38-45)

 

결국은 불행은 아직 오지도 않았다. 궁극적인 슬픔과 아픔은 아직 당하지도 않았다. 이 땅에서의 고단함으로 죽겠다 하면 영벌의 세계에서는 돌이킬 수도 없이 영원할 것인데,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는 나가다가 해를 받느니라(잠 22:3).” 정신 차려야 한다. 가나안에 들어왔다고 끝이 아니다. 믿음으로 구원의 확신을 받았다고 이제 끝난 게 아니다. 비로소 시작이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히 11:7).” 나는 내 영혼이 엄살을 부릴 때 히브리서 11장을 펼친다. 앞서 간 믿음의 사람들의 행적을 듣는다. 참 기구할 따름인데 그게 복이었다. 죄의 심각한 파괴력은 우리로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마음은 다른 데 가 있게 하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죽음 앞에서 백성들에게 당부한다.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수 23:11).” 우리가 주를 사랑한다는 것,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하시는도다

(시 82:3-4).

 

우리의 일상은 실전이었다.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것은,

 

그들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여

흑암 중에 왕래하니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리도다

(5).

 

이는 전의 내 모습이고 오늘도 여전하여 불쑥, 이는 감정의 소용돌이기도 하다. 할 때에,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6).

 

하시는 이 놀라운 증거가 우리로 새 힘을 얻게 하지 않던가? 한데,

 

그러나 너희는 사람처럼 죽으며

고관의 하나 같이 넘어지리로다

(7).

 

결국의 인생은 허무하였고 허무한 곳에서 우리는 피어난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존귀하심을 알고 이를 따라 내 삶에 스며지게 하는 것으로, 나는 주의 소유이다.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심판하소서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

(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