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

전봉석 2022. 4. 16. 05:43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그가 산지 주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주민들은 철 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삿 1:19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시 84:5

 

 

각개전투와 같다. 각각의 지파가 분배된 땅을 점령한다. 한데 그때마다 남겨지는 족속들이 있다. 누구는 철을 다루는 민족이라, 누구는 골짜기에 있어, 누구는 아이와 여자들이라… 남겨진 다양한 이들이 훗날 두고두고 저들의 가시가 된다. 그런 가운데 갈렙이 기럇세벨을 점령한 옷니엘에게 그의 딸 악사를 준다. 갈렙은 노인으로 나이 85세였다. 악사가 시집 가면서 자기 몫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남방으로 보내시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하매 갈렙이 윗샘과 아랫샘을 그에게 주었더라(삿 1:15).”

 

각 지파의 이런저런 상황을 접하면서 쫓아낸 자와 쫓아내지 못한 자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족속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까지 예루살렘에 거주하니라(21).” 할 때에 두고두고 저들이 모든 죄악의 온상이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오합지졸 같이 각자들 그 몫을 감당하는 데 있어 누구는 전적으로 말씀을 따르고 누구는 그때의 상황에 따라 일을 전개한다. 가령 처음 유다를 지명하여 가나안을 점령하라 하셨는데 저는 형제 시므온에게 같이 가자고 끌어들인다.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않았으나 저들을 승리로 이끄시는 인자하심을 볼 수 있다. 이어지는 7절에게 유다는 승리를 거둔 뒤 하나님의 명령대로 저들을 처분하지 않고 저들의 풍습대로 손가락과 발가락을 자르고, 그 상 아래에서 먹을 것을 주워 먹게 한 후 예루살렘으로 끌고 가서 죽였다.

 

이런 일들은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21:25).” 가나안을 점령하는 유다의 행위가 모든 지파와 족속의 행위로 드러나며 사사기 내내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1:28).” 그러는 동안 저들의 문화와 풍습은 암암리에 이스라엘의 정신을 흐트러뜨렸을 것이다.

 

우리는 글을 읽을 때 그 내용의 의미나 전개도 중요하지만 글쓴이의 의도를 파악하려 한다. 가령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마 12:2).” 하고 마태는 바리새인의 지적을 언급한 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7).” 예수님의 뜻을 전한다. 우리의 한계인 날씨는 파악하면서 영적인 목적은 이해 못하는 것을 드러낸다.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16:3).” 왜 그러는 것일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4).”

 

성경의 결론은 하나다. 우리가 악하고 음란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돈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눅 16:14).” 들을 수 있는 귀와 볼 수 있는 눈이 멀거나 막혔다. 관심 있는 것만 보고 듣는다. 탐욕과 방탕이 그 배경이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마 23:25).” 바리새인으로 지목되는 저들이 거슬러 올라가면 오늘 본문의 저들의 후손이다. 곧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다 할 때 조금씩 가미시키고, 본래의 것에 보태는 자기의지 때문이다.

 

늘 마음에 새기게 되는 것은 설교문은 창작이 아니다. 묵상은 개인의 독창적인 창작물이 아니다. 그래서도 누가 나의 묵상글에 대해 뭐라 좋게 말할 때 나는 주의하는 것이 행여 그만큼 나의 재주가 말씀의 본질을 흐릴까 하는 것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을 점령하여 들어갔고 그때마다 하나님의 명령에 조금씩 자기 생각을 더해 일을 처리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이 후에 두고두고 문젯거리가 되는 것은 애굽에서 출애굽할 때에 ‘섞여 나온 무리’들이 어떠했는가 짐작할 수 있다. 말씀을 읽고 볼 때 그 의미를 되새기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백성이 이 율법을 듣고 곧 섞인 무리를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모두 분리하였느니라(느 13:3).”

 

성경의 지적과 같이 돈을 사랑하고 사람을 의식하면,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마 23:7).” 그 좋아하는 것이 불순하여서,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 5:44).” 곧 우리의 순수한 믿음을 훼손하는 이유였다. 나아가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9).” 우리의 근본이 실은 그러하다. 모세 때도 그러했고 여호수아 때도 그러했던 것처럼 저들에게 지도자가 없을 때도 다를 바가 없다. 곧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20).”

 

마치 <어린왕자>에 나오는 한 대목처럼 ‘술 취하는 자가 술을 찾는 것은 술이 깰까 하여, 이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마주할 수가 없어서 도로 술을 찾는 것’과 같다. 엄연히 우리는 이제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21).” 하나님의 영광을 우선으로 하지 않을 때 자신을 우상으로 높이게 돼 있다. 고로 이를 알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할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6, 17).”

 

이에 말씀을 접하고 일상에서의 이런저런 일을 다루는 데 있어 그 의미와 목적은 날마다 새롭고 또한 주를 바라게 한다. 가령 어제는 오랜만에 아이를 만나 같이 점심을 먹었다. 얼마 전 확진이 되었다가 회복되고 난 뒤였다. 차를 한 잔 하는데 아이가 조증을 보이는 것처럼 말이 많고 기분이 들뜬 것이 이상하다 했다. 아니나 다를까 요즘 무슨 개인방송을 보는데 강원도 어느 시골 여자 아이의 생활을 개인방송하는 프로였다. 같이 보고 설명을 듣다 ‘영적인 교류’가 어떻고 ‘서로 영적 교감’이 어떻고 하며 늘어지는 설명에서 나는 문제의 심각성을 파악하느라 애를 먹었다. 우선 용어선택에 주의를 줘도 녀석은 못 보는 사이에 스스로를 자꾸 우쭐하여 ‘이제는 자신도 어른’이란 것을 여러번 강조하였다. 하긴 벌써 스물여섯이다. 한참 그런 데 관심이 가고 가상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는 서로의 교류(?)를 어찌해야 할까, 나 혼자 생각이 많아졌다.

 

스스로도 경계하는지 엄마나 누구에게도 말해서는 안 된다고 할 때부터 알아보긴 했으나… 나는 돌아와 그 유듀브를 찾아 구독자로 가입하고 몇 편의 영상을 살펴보았다. 생각보다 문제가 있어보이지는 않았으나 소탈하게 구는 시골일상의 이야기에 무슨 구독자가 12만이나 되는지 놀랐다. 정규방송(?)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녀석은 마치 고백하듯 그 영상을 보며 성경을 쓴다고, 그럼 영적으로 교류하는 것 같다느니, 이건 설명할 수 없는데, 하면서 늘어지는 아이의 말을 솔직이 90%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이를 어찌 다루어야 하나,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둘만의 영적 교감이 어떻고 할 때마다 제지를 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집을 부렸다. 심지어 그럼 나한테조차 말할 수 없다는 식으로 엄포를 놓았다.

 

하긴 요즘 모 기획사 대표이면서 음악프로 심사도 맡고 하는 어느 미친 사람을 안다. 아이와의 대화에서 저가 갑자기 생각났다. 영적인 무언가가 어떻고, 쏘올이 어떻고 하며 늘어놓는 저의 언변은 무슨 개소린가 싶은데, 저의 유듀브는 엄청난 구독자를 가지고 있고, 저의 심사는 국내에서 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얻는 모양이었다. 묵주인지 염주인지 하는 것도 목에 걸고 나타나거나 옷도 그렇고 말투도 그렇고, 말세의 때에 가난한 심령들을 홀리기에는 여느 교주를 능가한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도 저를 선호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늘어간다고도 하니 당최 어찌 되려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요이 1:7)." 어쩌면 이 시대에 당연한 현상인 듯도 하다. 

 

연예인이나 목사 교사 또는 대중 앞에 서는 자들이 진리로 바로 서지 않으면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계 20:10)." 사람들은 이에 현혹되어 앞뒤 분간이 어렵다. 저들이 또 잘 된다.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그리로 쏠린다. 나는 아이와의 만남에서 새삼 어떤 심각성을 깨달았고 교회가, 내가 담당해야 할 게 엄청난 일이구나, 하는 데 솔직히 두려움이 앞서기도 하였다. 그러니 이게 어디 아이만의 문제이겠나? 뭔가 문제는 문제인데 이 문제를 어찌 마주하고 대해야 하는 것인지…. 코로나로 인한 여파가 교회 공백과 함께 성도의 만남의 공백에서 여실히 드러나면 자기만의 시간과 세계에 고립된 영혼들을 사탄은 무작위로 끌어가는 듯도 하다. 새삼 아이와의 만남을 늘리고 이런저런 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결국 이 사달을 냈다. 장성하여 아이 역시 더는 아이라 할 수 없어 나는 주의한다. 

 

우리 안에는 이와 같이 언제든 세상 문화나 어떤 자기 오해로 자기만족을 채우려는 본성이 있다. 이에 나는 말씀으로 접근하고 이해할 수밖에 없는데,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이를 어찌 적용하고 실제 삶으로 일상을 사느냐 하는 문제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24-25).” 우선은 아이와 자주 만나고 어떤 설명을 하긴 해야겠는데 벌써 녀석은 그것에 마음을 빼앗긴 상태다. 아이엄마와는 의논하기 어려운 문제이고, 저들은 우선적으로 아이를 무조건 ‘장애’로만 취급하니까 별 수가 없다.

 

나는 말씀 앞에 앉아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지혜를 구한다. 소위 ‘정상’이라는 자들이 더하지 않은가? 이건 아이의 상태로만 국한지어 말할 수 없다. 구독자가 12만이 넘었고 얼마 전에는 그런 데서 하는 무슨 상의 1등도 한 모양인데…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 1:18).” 이와 같은 말씀이 과연 저들에게 무슨 의미로 다가오겠나? 우리는 주의 영광을 보지 못할 때 세상의 영광을 보게 된다. 저를 부러워하고 따라하게 되어 있다. 우리 안에 아주 작은 ‘섞인 무리’로도 짐작이 간다. 모든 불순종과 죄악 됨이 처음부터 힘을 발휘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하긴 누구에겐 게임이 뭐? 술 한 잔이 어때서? 그런 음악(뉴에이지)이 왜? 하는 정도의 사소하게 여겨지는 것이 결국은 우리 영혼을 좀 먹고 멍들게 하고 영원한 나락으로 떨어지게도 한다는 것을… 본래 아이는 배고프면 울어대고 자신의 만족이 충족될 때까지 거침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1-2).” 상대적으로 주의 맛을 잃으면 우리도 언제든지 바리새인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3).” 이를 알게 하고 함께 해야 하는데, 어제는 녀석이 어찌나 흥분이 돼서 자랑하고 싶어하는지… 나는 뭐라 말할 수 없어 우선은 시간을 두고, 다만 용어 선택에 주의를 주는 것으로 선을 그었던 것이다.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요 5:37-38).” 행여 우리가 이 정도로 나락에 떨어질까 하여 두려운 마음도 들면서. 그러니 오늘 시편의 찬송이 얼마나 감사하고 소중한지, 이것으로 주를 바라고 섬길 수 있다면 참 복되고 귀할 것인데,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시 84:1-2).

 

이것이 끊어지거나 멈추면 영락없다. 그 사이에 비집고 들어오는 ‘그럴 수 있지’ 하는 수많은 허용이 우리 영혼을 쥐고 흔들게 된다. 아…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3).

 

우리 영혼은 언제쯤 평안을 얻을 수 있을까? 허튼 데 마음을 두다 ‘솔직히 그 영상을 보며 성경을 쓰면 영적교감이 이루어져요!’ 하건 아이의 말이 내내 두려운 마음으로까지 번져갔다. 이는 저 아이가 무슨 장애가 있고 어떤 정신과적인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다. 우리가 흔히 문화라고 하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도 다르지 않다. 누구는 술에, 게임에, 이리저리 어울리는 사람들에 의해 혼선을 빚는다. 휘둘리고 망가지기까지 자신들은 모른다. 결국 중독이라는 말을 쓰기까지도 저는 알지 못한다. ‘사람 중독’, ‘문화 중독’에 시달리는 시대라. 아이들은 그의 품에서 스마트폰을 잠시라도 떼어놓게 하면 기겁을 한다. 어린아이든 어른이든 중독은 다른 게 아니라 더는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을 정도일 때 문제의 심각성은 드러나게 되어 있다. 어제는 졸지에 엄청난 숙제를 떠안게 된 심정이었다. 천천히 걷다 어디에 좀 앉았는데, 흐드러지게 피었다 홀연히 떨구어 뒹구르는 수많은 벚꽃 잎들이 바람에 흐트러졌다 모였다 하는 것을 바라보며 마음만 어려웠다. 아,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

(4).

 

오늘 시편은 한 구절 한 구절이 찬송이라.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5-7).

 

각 마디로 또는 음률을 살려 되새기며 기도하는 심정으로 주께 아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셀라)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보옵소서

(8-9).

 

부디 우리의 가는 길이 그릇된 길로 들어서지 않기를. 너무 먼 길을 돌아가게 하지 말기를. 오직 주가 함께 동행하시기를.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10-11).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