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오늘 택하라

전봉석 2022. 4. 15. 05:17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수 24:15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

시 83:18

 

 

죽음을 앞둔 여호수아의 결연한 의지가 눈물겹다. 저는 하나님이 아브라함 때부터 우리에게 어찌 행하셨는가를 상기시킨다. 그리고 이르길, “내가 또 너희가 수고하지 아니한 땅과 너희가 건설하지 아니한 성읍들을 너희에게 주었더니 너희가 그 가운데에 거주하며 너희는 또 너희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원의 열매를 먹는다 하셨느니라(수 24:13).” 하는 데서 감사와 영광의 이유를 찾는다. 다들 자기들 나름으로 열심을 다해 살았다고 하지만 여전히 운(運)을 바라며 천운(天運)과 기수(氣數)를 따진다. 우습지만 믿는 자들도 재수(財數)가 있고 없고, 하루 운세나 별자리, 성격, 혈액형 따위로 되는 일을 점(占)치듯 살기도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모양이다. 여호수아는 결연하게 스스로 증인이 된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15).” 우리의 변덕스러움과 주변에 휘둘리는 것에 환멸을 느낄만도 하다. 주께서 우리를 어찌 인도하시고 함께 하시는가를 안다면 함부로 그런 데 기웃거릴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14).” 마지막으로 당부하는 저는 110세를 일기로 이 땅에서의 생을 마감한다.

 

죄가 얼마나 끔찍한지, 하나님께로 정죄당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하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알린다. 이에 오늘 시편은 주께 호소하기를,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

(시 83:18).

 

하는 외마디 비명처럼 아뢴다. 죄는 심각한 파괴력을 가진다. “그들의 안색이 불리하게 증거하며 그들의 죄를 말해 주고 숨기지 못함이 소돔과 같으니 그들의 영혼에 화가 있을진저 그들이 재앙을 자취하였도다(사 3:9).” 스스로가 재앙을 취한다는데,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2-23).” 하고 바울은 당부한다. 이는 저의 절규 같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이에 우리는 영원히 정죄 받을 거였다. 이를 위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곧 부활 주일을 앞두고 우리의 몸가짐, 마음가짐에 대하여 스스로 점검할 필요가 있다. 단지 일 년에 한 번 치르는 절기 같은 게 아니라 이를 통하여 우리가 얼마나 끔찍한 죄의 온상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돌아봐야 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두고 사는 것들의 실상이 거듭되는 죄의 결과인 것을 알 때 끔찍하다. 시편 89편을 묵상하면서 저들이 죄의 결과로 감당하였던 실제를 보며 치를 떤다.

 

① 유다 왕이 폐위된다(38-39).

 

그러나 주께서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노하사

물리치셔서 버리셨으며

주의 종의 언약을 미워하사

그의 관을 땅에 던져

욕되게 하셨으며

 

② 약탈과 수치를 당하게 하신다(40-41).

 

그의 모든 울타리를 파괴하시며

그 요새를 무너뜨리셨으므로

길로 지나가는 자들에게

다 탈취를 당하며

그의 이웃에게 욕을 당하나이다

 

③ 전쟁에서 폐하게 하신다(42-43).

 

주께서 그의 대적들의 오른손을 높이시고

그들의 모든 원수들은 기쁘게 하셨으나

그의 칼날은 둔하게 하사 그가 전장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게 하셨으며

 

④ 다윗의 영광이 끝나게 두신다(44-45).

 

그의 영광을 그치게 하시고

그의 왕위를 땅에 엎으셨으며

그의 젊은 날들을 짧게 하시고

그를 수치로 덮으셨나이다 (셀라)

 

그러니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면 이보다 더 심각한 영혼의 마비가 또 있을까? 이사야 선지자는 5장에서 <여섯 가지의 심각한 죄의 실상>을 지적하며 그에 따른 화가 있을 것임을 경고하고 있다.

 

첫째, 집과 재산에 대한 끊임없는 욕심에 대하여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 5:8).”

 

이를 마치 대단한 능력으로 여겨 5억에 산 것이 10억이 되는 것에 환장하고 10억짜리가 졸지에 20억을 호가하는 데 환호하고 이를 축복이라 하는데 대하여, “만군의 여호와께서 내 귀에 말씀하시되 정녕히 허다한 가옥이 황폐하리니 크고 아름다울지라도 거주할 자가 없을 것이며 열흘 갈이 포도원에 겨우 포도주 한 바트가 나겠고 한 호멜의 종자를 뿌려도 간신히 한 에바가 나리라 하시도다(5:9-10).” 그 수고하고 애쓴 것이 ‘빛 좋은 개살구’ 같을 뿐이다. 친구 누구는 나름 서초동에 살면서 살면 살수록 무리해서 장만한 집 한 채가 남부럽지 않은가? 하고 물었더니 오십 중반을 넘기면서 돌아보니 평생을 빚에 허덕이며 살았노라고 허탈해하였다. 분명히 수치상으로는 이득이 남았는데, 평생 원금과 이자를 갚고 사느라 필요한 돈을 또 다시 빌려다 쓰고 사는 꼴리라,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게 빚잔치라고 하였다.

 

둘째, 자아도취에 빠져 사는 삶에 대하여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마시며 밤이 깊도록 포도주에 취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11).

 

저는 늘 술을 찾는다.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술에 취하고 술이 깨면 자신을 비하하고 원망하느라 우울해진다. 또 누구는 저는 의사라. 나름 직업도 공부도 어지간하여 아내와 두 자식과 행복하게 오순도순 잘 살겠다 싶은데, 하루라도 술이 없으면 잠을 이루지를 못한다. 스스로도 중독인 것을 인정하면서도 괜찮다고 한다. 이에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피리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보지 아니하는도다 그러므로 내 백성이 무지함으로 말미암아 사로잡힐 것이요 그들의 귀한 자는 굶주릴 것이요 무리는 목마를 것이라(12-13).” 그러니 형제 가운데 저만 주를 영접하지 못하고 산다. 그 여파가 형제와 자식에게도 미친다.

 

셋째, 거짓을 일삼는 자에 대하여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18).”

 

단지 어쩌다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 거짓말을 거짓말로 드러나지 않게 하려 거듭 거짓을 꾸며야 하고 나중에는 그것이 거짓인지도 모르는 순간에 이른다. “그들이 이르기를 그는 자기의 일을 속속히 이루어 우리에게 보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는 자기의 계획을 속히 이루어 우리가 알게 할 것이라 하는도다(19).” 마치 주 앞에서도 거짓으로 자신을 꾸미고 살면서 주가 자신을 도우시고 인도하실 것이라는 거짓 믿음으로 산다. 이보다 더 끔찍한 삶이 있을까? 차라리 주를 모른다 하고 세상에서 살면 세상에 그 추한 것으로 환멸을 느끼기라도 할 텐데, 저의 마음은 늘 적당하여 자신은 주를 사랑한다고 착각한다. 그리고 아무 일도 주를 위해 하려고 하지 않는다. 부르심에 대한 소명을 받았는지 어땠는지 심각하지도 않다. 그저 여기까지 이르러 그런가보다 하고 산다. 그러니 나름 목사라, 사역자라 하여 주일에 차라리 다른 교회라도 나가 주를 섬기고 예배하는 일을 마다한다. 스스로 잠깐 앉아 성경 몇 장 필사하는 것으로 ‘거룩하신 이가 자기 뜻을 속히 이루실 것이라.’ 하는 헛된 망상 같은 신앙도 아닌 믿음도 아닌 자가당착에 빠져 산다.

 

넷째, 악에 대해 무뎌지는 생활에 대하여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0).”

 

그럴 수 있지, 하고 허용하는 삶이 넓어졌다. 다들 그러고 사는데 뭐, 하고 적당하다면 괜찮다고 하는 것이 말이다. 적당한 죄는 없다. 일이든 백이든 천이든 죄는 그 비중이나 횟수의 문제가 아니다. 죄를 죄로 여기지 못할 때, “그들은 뇌물로 말미암아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공의를 빼앗는도다(23).” 한 마디로 불로소득을 노린다. 나름 수고했다고 하나 그 주머니에는 성경구절보다는 로또가 들어있고, 성경보다는 주식이나 부동산 관련 책자들이 가득하다. 누구는 참 열심인데 말씀을 보는 시간이 일이면 아홉은 현실적인 대안을 찾아 여기저기 부동산 시세를 파악하고, 노후에 어떤 것으로 이문을 남길까 하여 투자할 곳을 찾아 떠돈다. 하긴 이를 보고 누구는 또 그럴 수 있는 여유를 부러워하니 서로가 서로를 닮아가는 형국이라.

 

다섯째, 성경의 경고를 무시하는 이에 대하여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1).”

 

애나 어른이나 싫은 소릴 좋아할 리 없다. 당장의 것으로 족하다. 뭐라 권면하면 더는 보지 말자는 소리로 듣는 것 같다. 그러니 목사가 되고 이에 따른 시행착오를 여러 번 겪는다. 듣다 듣다 더는 안 되겠다 싶어 뭐라 성경에 비추어 말하면, 자신은 그 말씀을 그렇게 이해하지 않는다며 졸지에 껄끄러운 관계가 된다. 그러니 종종 이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주께 묻고 또 묻다 이내 입을 다무는 경우도 왕왕 있다. 예전에는 길을 가다가도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이놈! 하고 뭐라 꾸짖으시면 냉큼 고개를 숙여 사과부터 했던 시절도 있는데, 이제는 애들이 더 무섭다. 이에 “이로 말미암아 불꽃이 그루터기를 삼킴 같이, 마른 풀이 불 속에 떨어짐 같이 그들의 뿌리가 썩겠고 꽃이 티끌처럼 날리리니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멸시하였음이라(24).” 두려운 말씀이다.

 

여섯째, 술 권하는 사회에 대하여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잘 빚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2).”

 

소위 술을 만다 하여 혼합한 술을 찾는 일은 다반사가 되었다. 방송에서도 모 여자 연예인이 이를 마치 자랑하듯 자기 집에 술집을 열고 이를 자랑하며 자기만의 비법을 마술인 것처럼 내보이고 서로들 이를 감탄하느라 여념이 없다. 용감하다는 표현, 참 쓸 데 없는 일에 필사적인 사람들이 있는데 요즘은 그게 또 장기이고 돈이 되기도 하는 세상이다. 현진건이 <술 권하는 사회>에서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이 문제인지, 그렇게 만드는 사람이 문제인지, 죽을 때까지는 풀 수 없는 숙제인 것 같다. 이에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노를 발하시고 그들 위에 손을 들어 그들을 치신지라 산들은 진동하며 그들의 시체는 거리 가운데에 분토 같이 되었도다 그럴지라도 그의 노가 돌아서지 아니하였고 그의 손이 여전히 펼쳐져 있느니라(25).” 이 땅에서의 벌은 경고다. 한데 어지간한 경고는 탁월한 의술이나 적당한 위로들로 넘쳐나서 모두가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것을 ‘행운’으로 여긴다.

 

시편 89편에서 우리에게 최종적인 사실과 경고의 메시지를 던진다. 곧 우리가 오늘도 하루를 사는 것은 살아서 주를 영접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자 함이고, 살아서 주를 믿고 영접할 때 영원한 구원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죽은 자만 불쌍하다는 말은 저의 죽음의 단절 때문이다. 더는 돌이킬 수 없는, 구원의 기회는 영원히 없다.

 

여호와여 언제까지니이까

스스로 영원히 숨기시리이까

주의 노가 언제까지

불붙듯 하시겠나이까

나의 때가 얼마나 짧은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사람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

누가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자기의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지리이까 (셀라)

주여 주의 성실하심으로

다윗에게 맹세하신

그 전의 인자하심이 어디 있나이까

(시 89:46-49)

 

우리가 오늘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이를 그리 여겨 하루를 살 수 있는 것도 아직은 살았을 때의 일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더는 저에게 심판뿐이라,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고전 15:11).” 우리의 생이 값진 것은 이제는 남은 생을 믿는 자로 사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호소하듯 외친다.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그런데 그저 ‘다들 그러고 살아’ 하는 게 늘 그 마음을 주장하는 것이라면 더는 뭐라 일러도 가망이 없지 않을까?

 

누구는 말하길 믿는 자라고 가난하게 살고, 불행해야 하고, 세상의 즐거움을 알지 못하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하고 저는 무슨 근거로 그처럼 확신하는지… 나는 저의 말에 반대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우린 존 파이퍼 목사의 표현처럼 <희락주의자>로 남들은 알 수 없는 기쁨으로 산다. 될 수 있으면 부자가 되어 남을 돕고 이로운 삶이 되어야 한다. 이는 그러려면 자신이 부유하길 바라서는 어렵지 않을까? 두 식구, 겨우 네 식구가 50평 넘는 아파트에 또는 서너 채의 집을 가지고? 세상의 즐거움이라니! 세상과 하나님을 겸할 수 있는 것이던가?  며칠 전의 말에 나는 아직 답을 보내지 않았다. 뭐라 한들 들을 리가 없고, 그래서 뭐라 해봐야 서로가 시비가 될 뿐이라 나는 시간을 둔다. 저이는 늘 그런 식이었다. 무슨 성경공부니 어떤 일에 전념하는 게 왜 나빠? 하고 들으려하지도 않는 권면을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 말씀 앞에서 부끄러워할 줄 알 게 되었다.

 

하여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하신 주의 말씀을 음미하고 묵상하는 것이 복이다. 이는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6:47).” 하신 의미에까지 이른다. 날마다 주의 떡과 물을 먹고 사는 삶이라니! 바로 이것이 생을 온전히 사는 비결이었다.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고후 4:11-13).” 푸시킨의 말처럼 ‘생이 아무리 우리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니 노여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다. 고로 우리는 기도한다. 원수를 맞서는 최선은 기도다. 이 모든 저주의 칼날을 피하는 길은 기도다. 무거운 ‘화 있을진저’ 앞아서 숙연하게 고개를 숙여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참 복되다.

 

주는 주의 종들이 받은

비방을 기억하소서

많은 민족의 비방이 내 품에 있사오니

여호와여 이 비방은 주의 원수들이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행동을

비방한 것이로소이다

(시 89:50-51).

 

아니면 우리가 누구에게 의지할까? 덩달아 운세를 따지고 운이나 재수를 따져가며 안도하기도 하고 툴툴 털어버리기도 하는 모든 게 죄였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의 자기 방어와 만족은 모두 죄이다. 그것이 아무리 선을 도모하고 자기를 불사르게 내어주는 일이라 할지언정,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시 3:7).

 

주께 아뢰고 기도하지 않는 모든 열심은 헛되고 죄되다.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압박하오니

그들이 자기가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

(10:2).

 

오늘의 시는 이를 아뢰고 고하며 억울함을 주께 호소하는 내용이다.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

(83:1).

 

우리의 가장 두려운 것은 주의 침묵이다. 잠잠히 내버려두심이다. 내 곁의 누구, 누구 저들 목회자들을 보며 나는 마음이 아프다. 그리고 같은 내용의 기도를 한다. ‘침묵하지 마소서, 잠잠하지 마소서, 조용하지 마소서.’ 그러니 저들은 자신들이 우유부단함과 영적인 게으름과 ‘나중에’ 하고 미루는 일에 대한 심각성을 알지 못한다. 그러다 불쑥, ‘그게 왜 나빠?’ 하고 되묻기도 하면서!

 

그들이 한마음으로 의논하고

주를 대적하여 서로 동맹하니…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목장을

우리의 소유로 취하자 하였나이다

(5, 12).

 

남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나는 나를 경계하다 주께 기도한다. 내가 나를 앎으로 나는 주가 아니시면 감당이 안 됨을 잘 안다. 아…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

(1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