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424 주일
시편 89편
부활, 약속의 성취(2)
시 89:49 주여 주의 성실하심으로 다윗에게 맹세하신 그 전의 인자하심이 어디 있나이까
시 89:50 주는 주의 종들이 받은 비방을 기억하소서 많은 민족의 비방이 내 품에 있사오니
시 89:51 여호와여 이 비방은 주의 원수들이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행동을 비방한 것이로소이다
시 89:52 여호와를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아멘 아멘
들어가는 말
우리는 부활의 기쁨과 그 성취에 대해 시편 89편에서 살피고 있다. 먼저는 ‘다윗과의 약속의 성취’이고, 나아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의 목적의 성취를 알게 한다. 사람은 죄로 이미 영원한 정죄함의 대상이 되었으나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십자가의 보혈과 ‘부활의 성취’로 완성되었다. 시편 89편은 이제 부활 곧 구속의 성취를 드러낸다.
지난 주일에 나눈 내용을 정리하면,
1.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하심은 어떤 상황에서도 유효하다(1-4).
1) 이는 우주의 질서가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증거 한다.
2) 우리의 구원이 전적인 하나님의 약속을 기반으로 한다.
2.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확장한다(5-18).
1) 우리의 기본자세는 경건한 두려움에서 나온다.
2) 하나님은 우리의 뒤틀리고 꼬인 인생을 평정하신다.
3) 죄와 사망의 어둠에 구원의 빛을 비추셨다.
4) 공의와 인자는 하나님의 통치이다.
5) 우리의 기쁨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6) 우리가 하나님을 높일 때 하나님은 우리를 높이신다.
오늘은 바로 이어 세 가지의 ‘구속의 성취’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3. 하나님의 도우심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것이다(19-37).
“그 때에 주께서 환상 중에 주의 성도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능력 있는 용사에게는 돕는 힘을 더하며 백성 중에서 택함 받은 자를 높였으되(19).”
하는 표현에서 ‘능력 있는 용사’란 용맹스러운 군사로, 주의 자녀이고, 성도이며, 주의 일꾼이고, 주의 나라에서 영원히 함께 누릴 자들로 총칭한다. 개인적으로 목사 안수를 받을 때 본문 말씀이 잠언 25장 13절이었는데,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 하실 때에 우리는 ‘충성된 사자’다. 이 또한 같은 의미로 우리는 모두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마치 ‘추수하는 날의 얼음냉수’ 같은 존재들이다. 답답하고 어지러운 현실에서 우리의 살아가는 이야기는 명징하게 주의 살아계심을 나타내야 한다. 이를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사람’으로, 우리의 능력이다.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 주께 영광이 된다는 것. 이를 골로새서 3장에서 증거하는 세 가지로 정리하면, 첫째, 하나님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는 주어진 상황이 어떠하든지 그 모든 환경과 여건을 조성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 고로 우리는 땅의 것이 아닌 하늘의 것을 사모하며 산다는 것. 그에 앞에 우리의 지상명령은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2).”는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는 이를 위해 모든 것을 완수하셨다.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1b).” 곧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 후 하나님은 하늘 우편 보좌에 앉으시고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 셋째,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1a).”
우리는 다 죽은 자들이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곧 우리는 죄의 정죄로 영원한 죽음에서 해방되었다. 즉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10).”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표현은, 첫째, 골로새서 3장 1절에 ‘찾으라’는 것이고, 3장 10절과 에베소서 4장 24절에 나오는 ‘입으라’는 것이다. 찾으라는 것은 자신의 신분이고, 입으라는 것은 용사로서 명령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전신갑주이다. 찾고 입는다는 것은 취한다는 것으로,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 6:13).” 곧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14-17).” 이를 오늘 시편은 여덟 가지로 정의하고 있다.
첫째, 우리는 준비된 일꾼이다.
“내가 내 종 다윗을 찾아내어 나의 거룩한 기름을 그에게 부었도다 내 손이 그와 함께 하여 견고하게 하고 내 팔이 그를 힘이 있게 하리로다(20-21).” 이는 곧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2:21).” 각자의 어떤 노력, 열심, 수고… 이 모든 열정의 궁극적인 목표는 주의 쓰임에 합당하기 위해서이다.
둘째, 사탄은 그런 우리를 위협하나 강탈하지는 못한다.
“원수가 그에게서 강탈하지 못하며 악한 자가 그를 곤고하게 못하리로다 내가 그의 앞에서 그 대적들을 박멸하며 그를 미워하는 자들을 치려니와(22-23).” 성령으로 일하면 사탄도 같이 움직인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앞두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나가셨다. 이에 사탄이 따라와 예수를 시험하였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를 바라고 우리 안에 주의 영을 모시고 살면, 사탄은 끊임없이 넙죽거린다. 그래서 주님은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막 6:31).” 하고 우리의 분주함을 달래시고, 예수님도 시간을 내어 “따로 기도하실…(눅 9:18).” 시간을 가지셨다. 우리의 쉼은 기도의 연장으로, 주의 도우심의 통로이다.
셋째, 하나님께 신실한 자는 세상에서도 형통하다.
“나의 성실함과 인자함이 그와 함께 하리니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그의 뿔이 높아지리로다 내가 또 그의 손을 바다 위에 놓으며 오른손을 강들 위에 놓으리니(24-25).” 세상에서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있다면 주의 이름으로 하라. 주로 하여금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 뿔을 높이시게 하라. 주의 성실하심과 인자하심이 나와 함께 하시면 우리가 사는 날 동안에 형통함을 누린다. 그에 걸맞게 믿음으로 신앙 안에서 주의 이름으로 주를 기쁘시게 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니, 네 나라에 낙태하는 자가 없고 임신하지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 내가 너의 날 수를 채우리라(출 23:25-26).” 이는 주의 이름이 걸린 문제다. 무조건 주가 책임지신다. 그러시는가, 아니 그러하시는가, 스스로 삼가 자신의 확신을 든든히 하라. <주의 이름으로> “네 발이 행할 길을 평탄하게 하며 네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잠 4:26).”
넷째, 곧 자원하는 심령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그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시 89:26).”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고 신앙이어야 한다. 명심할 것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이것이 복음이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1).” 이것이 주의 용사로서 수행할 사명이다.
다섯째, 성경의 언약은 성취되었다.
“내가 또 그를 장자로 삼고 세상 왕들에게 지존자가 되게 하며 그를 위하여 나의 인자함을 영원히 지키고 그와 맺은 나의 언약을 굳게 세우며 또 그의 후손을 영구하게 하여 그의 왕위를 하늘의 날과 같게 하리로다(시 89:27-29).” 오늘 우리의 기독교는 주 앞에서 정의와 공의를 수행하고 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7).” 결정적인 말씀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 23:5-6).” 곧 예수는 야훼이시다.
여섯째, 우리의 고난은 회초리고 채찍이다.
“내가 회초리로 그들의 죄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그들의 죄악을 벌하리로다 그러나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는 아니하며 나의 성실함도 폐하지 아니하며 내 언약을 깨뜨리지 아니하고 내 입술에서 낸 것은 변하지 아니하리로다(32-34).” 주의 자녀이면 이는 마땅하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게 하지 않으시려고 일찍 데려가기도 하신다. 이는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히 12:6).” 그냥 두어 영원한 형벌에 들면 이 또한 구원의 완성을 어지럽히는 일이다.
일곱째,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 하신다.
“그의 후손이 장구하고 그의 왕위는 해 같이 내 앞에 항상 있으며 또 궁창의 확실한 증인인 달 같이 영원히 견고하게 되리라 하셨도다 (셀라)(36-37).” 기후 변화나 자연현상으로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게 하신다. 우리의 무분별한 죄된 삶으로 자연은 파괴되고 그 결과는 고스란히 사람의 몫으로 되받는다. 그럼에도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말 3:6).” 다만 고통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심이다.
여덟째, 하나님의 경고를 듣을 수 있는 것이 복이다.
“… 주의 종의 언약을 미워하사 그의 관을 땅에 던져 욕되게 하셨으며 … 탈취를 당하며 그의 이웃에게 욕을 당하나이다 … 그의 젊은 날들을 짧게 하시고 그를 수치로 덮으셨나이다(셀라)(38-45).” 말씀의 경고를 무시하는 것보다 무지한 것은 없다. 다들 당하기 전까지는 설마, 한다. 그러니 사는 데까지 살면서, 갈 데까지 가보는 수밖에! 그러나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는 나가다가 해를 받느니라(잠 22:3).” 지혜는 주를 경외하는 것으로, “믿음으로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히 11:7).”
결코 죄의 파괴력은 녹록하지 않다. 그 경고를 듣지 않음으로 ① 유다 왕위가 끊어졌다(38-39). ② 약탈과 수치를 당했다(40-41). ③ 전쟁에서 폐했다(42-43). ④ 다윗의 영광도 끝났다(44-45). 오늘 시편은 이를 적나라하게 감추지 않고 있다.
4. 회개와 구원은 제한이 있다(46-51).
주가 침묵하시면 암흑에 갇힌 역사다. 이스라엘이 그러했다. 로마 총독 빌라도가 놀랐서 물었다.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마 27:23).” 저도 이상할 따름이다. 한데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25).” 해서 저들의 역사는 온통 피로 얼룩졌다. 뿔뿔이 흩어지고, 1차 대전 때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대학살이 자행되었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으나, 구약의 선민 이스라엘과 오늘 날의 이스라엘은 전혀 다른 종족이다. 이를 오늘 본문에서 회개의 기회와 구원에 제한이 정해졌음을 알아야 한다. 이는 두 가지로만 정리하였다.
첫째, 구원의 기회는 제한이 있다.
“… 나의 때가 얼마나 짧은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사람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 누가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자기의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지리이까 (셀라) 주여 주의 성실하심으로 다윗에게 맹세하신 그 전의 인자하심이 어디 있나이까(46-49).” 저들의 절규가 참혹하다. 오늘이 소중한 것은 아직 기회가 있어서이다. 예수의 재림은 긍휼하심 가운데 기다리시는 것이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함부로 자신의 믿음을 속단하지 마시라. 사탄도 믿고 귀신들린 자들도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보고 두려워하였다. 이를 믿음으로 착각하고 구원 받았다고 안이하다면 반드시 어느 날,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더는 돌이킬 수 없는 때가 올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이를 믿고 안다면 그에 걸맞는 삶이 따라야 한다.
둘째, 주의 부르심이 복인 줄 알라.
“주는 주의 종들이 받은 비방을 기억하소서 많은 민족의 비방이 내 품에 있사오니 여호와여 이 비방은 주의 원수들이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행동을 비방한 것이로소이다(50-51).”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과 같다. 다윗은 항상 아뢰었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시 3:7).” 주의 은혜는 날마다 매순간 필요하다.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압박하오니 그들이 자기가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10:2).” 다윗이 다윗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주의 이름을 부른 것이다. 아,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 (83:1).” 이는 우리를 부리신 하나님의 은총이다. 아무나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지 않으신다. 오늘 시편은 “여호와여 이 비방은 주의 원수들이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행동을 비방한 것이로소이다(51).” 하고 자신이 부름을 받은 자인 것을 주께 알림으로 긍휼을 구한다. 마지막으로 5연이면서 마무리로….
5. 송영
“여호와를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아멘 아멘(52).”
송영은 찬송의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아멘 아멘(시 41:13).” 이는 우리의 최종적인 사명이다. 이 땅에서도 저 하늘나라에서도 우리가 부를 노래의 시작이면서 영원한 끝이다. “이는 그들이 그의 율례를 지키고 그의 율법을 따르게 하려 하심이로다 할렐루야(105:45).” 송영의 의미는,
첫째, 송축이다. 송축은 ‘경사를 기리고 축하하는 것’이다.
둘째, 이는 말씀을 지키고 따를 때 불린다. 다들 유행가나 트롯으로 시름을 달래는 세상에서, 우리의 존재의 이유는 여호와를 영원히 찬송하는 것이다.
나는 저의 소유로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 3:1).” 저가 우리를 기다리신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예수 재림을 기다린다. 우리는 곧 만날 것이다. 이에 “여호와를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아멘 아멘(5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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