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시편 88편 / 기도의 절벽에서

전봉석 2022. 4. 8. 12:27

220410 주일

 

시편 88편

기도의 절벽에서

 

 

시 88:1 [고라 자손의 찬송 시 곧 에스라인 헤만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마할랏르안놋에 맞춘 노래]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 앞에서 부르짖었사오니

시 88:2 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기울여 주소서

 

 

본문 이해

오늘 시편은 하나님의 징벌로 극심한 고통 중에 절규하는 시라 할 수 있다. 저자는 표제에 보면 ‘예스라인 헤만’으로 소개되었다. 헤만은 솔로몬의 지혜를 설명할 때 그 비교 대상으로 언급될 정도로 탁월한 지혜의 사람이다. “그는 모든 사람보다 지혜로워서 예스라 사람 에단과 마홀의 아들 헤만과 갈골과 다르다보다 나으므로 그의 이름이 사방 모든 나라에 들렸더라(왕상 4:31).”

 

오늘 시의 시적배경은 불분명하다. 다만 표제에 붙은 ‘마할랏르안놋’이란 단어의 뜻이 ‘질병 중에’ 또는 ‘고통 중에’라는 것으로 보아 극심한 고통 중에 쓰인 시라는 것으로 추측할 수는 있다. 시편에 실린 비탄 시는 모두 36편으로 분류되는데, 그 가운데 오늘의 시는 가장 절박하고 애처로운 시라 할 수 있다. 마치 욥의 상황을 연상케 한다. 다소 긴 내용이지만 단락을 다섯으로 나누어, 1연은 1-2절로 극심한 고통 중에서 주께 부르짖는 모습을 볼 수 있고, 2연은 3-5절로 다급하게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께 토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3연은 6-9절로 자신의 죽음으로 소외와 외로움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징벌의 고통이 엄중하심을 호소하고 있고, 4연은 10-12절로 죽음이 가져올 망각과 멸절에 대해 절망을 담고 있다. 5연은 마지막 13-18절로 자신의 부르짖음에 하나님의 응답을 간구하며 절규하는 모습을 보인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고통은 필수고 고통 가운데서 취할 수 있는 방법은 그리 많지 않다. 고통은 막무가내고 죽음은 가차 없다. 고통이 너무 심하면 기도의 문도 막힌다. 곧 우리가 그와 같은 기도의 절벽에서 어떻게 견디고 이겨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다섯 가지의 방법’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누구라도 무덤 앞에 서면 두렵다. 죽음은 출생과 달리 의식 중에서 맞는다. 그러하다면 우리는 주의 이름을 부르고, 주를 의지하며, 천국을 사모하고, 행복하게 죽음의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사는 게 죽기보다 힘들다는 오늘 날, 이를 알지 못하면 후회와 회환뿐이다. 정작 하나님을 찾지 못하고 떠나면 이보다 비참한 결말은 없다. 원망과 좌절로 일그러진 영혼이 더는 좌절하지 않기 위해 자살을 택하기도 하는데, 우리나라가 항상 1위를 차지한다고 하니… 다시 말하지만 오늘 우리는 가장 중요한 방법, 고통과 그 고통의 끝이랄 수 있는 죽음을 통과할 때에 어떤 방법으로 영광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을까?

 

첫째, 생의 끝자락에서 주를 바라고 의지하는 것은 엄연한 능력이다.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 앞에서 부르짖었사오니 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기울여 주소서(시 88:1-2).”

 

이는 경험에서 나온다.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시 22:24).” 하는 시편의 세계는 놀랍다. 신앙은 곧 ‘날로 새로워지는’ 일상을 사는 것이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굳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나의 생이 아니다. “내가 놀라서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31:22).” 하는 정도의 고백은 내 것이어야 한다. 이와 같은 시편의 세계가 곧 우리의 일상일 때, 말씀은 우리 안에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

 

오늘 시편 4, 5절에서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이 인정되고 힘없는 용사와 같으며/ 죽은 자 중에 던져진 바 되었으며 죽임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으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시니 그들은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니이다.” 하는 이와 같은 절망은 호시탐탐 우리를 노린다. 이때의 절실함이 우리로 주를 바라게 한다. 그 외에 다른 것은 소용이 없는 것이다.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아내와 자녀와 어린이와 더불어 여호와 앞에 섰더라(대하 20:12-13).” 할 때, 우리 주는 긍휼하심으로 함께 하신다. 도저히 가망이 없을 것 같은데도 말이다.

 

이를 바울은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8-9).” 여기에 답이 있다. 더는 어쩔 수 없는 고통, 막다른 길목 같은 기도의 절벽에서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게 된다! 다시,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기꺼이 고난당함도 허용하신다!

 

둘째, 평소 우리를 괴롭게 하는 고난은 목적이 있다.

“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두셨사오며 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가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 (셀라)(시 88:6-7).”

 

우리는 본래 어둠이라, 허물과 죄로 죽었던 존재이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이는 우리가 본질적으로 어둠을 더 선호하고 사랑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다들 세상 풍토를 따라 살기를 바란다. 세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기를 원한다. 혹시 몰라 보험을 들어놓듯이 세상과 교회에 양 다리를 걸친다. 하지만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곧 고통이 주는 유익은 우리로 날로 새로워지게 한다는 것인데, 이는 속사람이다. 곧 영혼의 일이다. 여기서 ‘그러므로’는 묵상을 확장하게 한다. 무엇에 의한 ‘그러므로’일까? 7절로 올라가면,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곧 우리 스스로 천하무적이었다면 우리 본성에 하나님으로 절실할 수 있었을까? 질그릇은 잘 깨지고, 금세 금이 가고, 흠이 나서 못 쓰게 될 수 있다. 이에 우리에게는 날마다의 긍휼하심이 필요하다.

 

그래서 16절의 ‘그러므로’는 17절에 ‘함이니’ 곧 ‘때문이니’로 연결된다. 17절,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즉 환난으로 인하여 우리가 슬퍼하기만 하지 않는 것은,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이 놀라운 진리를 아무나 듣고 믿고 가지고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를 우리는 일상에서 느끼는데,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그러므로’-->날로 새로워지는 속사람, 이는 환난 때문인데 환난은 소망을 갖게 한다! 마무리하면 ‘그러므로’는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 당장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원함으로다. 이에 죽음을 앞두고도,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4).”

 

셋째, 사탄이 주는 ‘고난의 과대공포증’을 물리치라.

“주께서 죽은 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이시겠나이까 유령들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 (셀라) 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 흑암 중에서 주의 기적과 잊음의 땅에서 주의 공의를 알 수 있으리이까(시 88: 10-12).”

 

시편은 우리가 지닌 내적고통을 잘 안다. 어릴 때 당한 슬픔도, 성장하면서 겪은 상처도, 우리의 원수 사탄의 교묘한 술수에 의해 이용당한다. 그것으로 스스로를 무장하여 평생을 끌려 다니게 사람들이 허다하다. 심리학이라는 학문이 그렇게 생겨났다. 정신과에서 말하는 ‘학습된 무기력’이니 ‘예기 불안’이니 하는 것도 그렇고, 누구는 오늘도 하나님을 진정한 마음에서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다. 그 이유는 육신의 아버지에 대한 강한 분노와 서러움이 고착되어, 아버지라는 호칭이 마음을 어렵게 하는 것이다.

 

오늘 시편도 이와 같은 심리를 그대로 드러내 보인다. ‘죽은 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이시겠나이까?’ 하고 하나님께 반문한다. ‘유령들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 하고 억지를 쓰듯 하나님을 우롱하기까지 한다. 시편의 내적갈등은 고통을 과대공포증으로 유발시키는 사탄을 연상하게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완전히 이상한 대상으로 만든다. 물론 ‘질병 중에서’ 또는 ‘실패와 좌절 가운데서’ 우리는 극한 상황에 놓이면 별의 별 감정에 사로잡히기 마련이다. 막말은 물론 저주와 폭력도 서슴지 않고 말이다.

 

아브라함도 일흔다섯에 우루를 떠나 이십여 년이 지나는 동안 하나님의 약속은 감감무소식이고, 자신과 아내는 늙어 더 이상 생산할 수 없는 처지에서, 집에 데려다 키운 이방 아이 엘리에셀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고(창 15:2), 나아가 아내 사라의 말을 듣고 그의 몸종 하갈에게서 얻은 ‘이스마엘’이나 잘 키우겠다고 항변하듯 하였다(17:18). 그때에 하나님은 엄히 말씀하시길,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 18:14).” 하시고 딱 부러지게 말씀하셨다.

 

오늘 시편도 고백한다. “내가 어릴 적부터 고난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께서 두렵게 하실 때에 당황하였나이다(시 88:15).” 그렇듯 누구나 어릴 때 겪은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 주의 긍휼하심과 은택을 바라고 사탄의 술수인 고통의 과대공포증을 물리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9).”

 

넷째, 우리의 애끓는 마음 뒤에 숨으신 하나님을 바라보자.

“주는 내게서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내가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시 88:18).”

 

오랜 병치레에 효자 없고, 계속되는 고통에 일그러지지 않을 얼굴이 없으며, 가난은 친구도 떠나가게 한다. 이에 우리에게는 성령이 계시다. 곧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하실 때, 우리의 능력으로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넉넉히 이길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이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구하라고 하신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우리의 애끓는 마음 뒤에 하나님이 숨어 계신다. 이는 우리로 더욱 강건하기를 바라시는 아버지의 마음이다. 마치 독수리는 깎아지른 언덕 사이에 둥지를 틀고, 새끼들이 자라면 가차 없이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밀어낸다. 새끼들은 바동거리다 이내 자신들에게 날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때부터 날갯짓과 함께 유유히 바람을 타는 법을 익힌다. 예수님은 성령이 우리에게 임함도 이와 같음을 알려주셨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8).” 처음엔 공포와 서툰 날갯짓으로 고달픈 것 같다가 어느 순간 우리는 날개를 쭉 펴고 바람에 몸을 맡기면 더 높이, 더 멀리 날 수 있다.

 

다섯째, 성도 곧 우리의 죽음은 죽음조차도 가치 있다.

“주의 진노가 내게 넘치고 주의 두려움이 나를 끊었나이다(시 88:16).”

 

죽음은 누구나 두렵다. 낯선 것이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하나 시편의 세계는 다른 시각으로 죽음을 정의한다.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시 116:15).” 무슨 소린가? 특히 우리나라는 많은 경건한 자들의 죽음을 토대로 복음이 들어왔다. 유교와 불교의 나라 조선에 선교사들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초개와 같이 죽어져 주의 나라가 이 작은 동방의 이방 국가에도 전해져 뿌리내리게 하였다. 바울도 죽음을 앞에 두고, 감옥에 앉아 외친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이를 지혜자는 “악인은 그의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잠 14:32).” 하고 규정하였다.

 

곧 우리 믿음의 선친들이 남긴 유산은 저들의 죽음으로 이 이방의 나라에 복음의 뿌리가 단단히 뿌리 내도록 하였다. 저들은 반드시 ‘부름의 상’에 합당한 면류관을 쓰고 앞서 저 하늘나라에서 우리를 응원하고 있을 것이다. 예수님도 일러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 이를 예수님의 기도로 다시 정리하면,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17:16).” 하여 우리의 고난은 필연이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말씀을 정리하면 오늘 시편은 우리에게 어떤 고통 가운데서도 ‘다섯 가지의 방법’이 있음을 역설적으로 알게 한다. 첫째, 생의 끝자락에서 주를 바라는 것은 엄청난 복이다. 둘째, 우리의 고통에는 목적이 있다. 셋째, 그러므로 고난이 주는 과대공포증을 성령의 능력으로 물리쳐야 한다. 넷째, 애끓는 우리 마음 뒤에는 반드시 하나님 숨어계신다. 다섯째, 우리의 죽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귀중하다. 이에 우리도 욥과 같은 고백이 가능하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