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시편 89편 / 부활, 약속의 성취(1)

전봉석 2022. 4. 15. 08:23

220417 주일

 

시편 89편

부활, 약속의 성취(1)

 

 

시 89:1 [에스라인 에단의 마스길]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시 89:2 내가 말하기를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 하였나이다

시 89:3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내가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시 89:4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왕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셨나이다 (셀라)

 

 

들어가는 말

 

우리는 죄로 인해 하나님께 영원한 정죄를 받았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사망은 영육간의 죽음이다. 분명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 하신 창조주 하나님과의 약속을 사람은 파기했다. 여전히 우리는 말씀을 파기하며 산다. 죄 된 사람의 속성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자와 성실하심으로 하나님은 사람을 ‘반드시 죽으리라.’ 하는 약속에서 건지셨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

 

곧 오늘 본문에서의 다윗과의 약속이 최종적으로 성취된 것이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우리는 이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이 매시대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찾아가셨고,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을 두어 주의 선민으로 삼으셨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부활의 의미와 성취>를 보여준다. 이 성취는 다윗과의 약속에서 최종적인 성취이다. 성경은 초자연적인 역사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그러므로 다윗과의 약속은 곧 우리 안에서 성취된다. 이를 오늘 본문에서 다섯 가지 근거를 가지고 제시하고자 한다.

 

89편의 시는 모두 5연으로 구성되었다. 52절로 쓰여진 다소 긴 내용이다. 이를 요약하여 요점만 간추렸다가 몇 번을 다시 묵상하는 동안 내 안에서는 가급적이면 52절의 말씀을 하나하나 다루어야 한다는 강한 마음이 들었다. 주가 주시는 마음으로 알고 이번 주일에 이어 다음 주일까지 두 번으로 나누어 연결 지으려 한다.

 

오늘 시편은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보호자’, ‘구원자’, ‘통치자’가 누구인가를 알게 한다(삼하 7:8-16). 나는 자주 ‘시편으로 살자’는 말을 되뇐다. 시편은 우리 일상의 면면을 해부하고 있다. 누구는 이를 성경 말씀의 해부도라고 설명하였다. 일상은 현실이다. 시의 형식으로 담겨서 다소 애매하고 낭만적인 것 같지만 실제 우리 현실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과 사건 사건들로 구성되어진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하는 인간이 버젓이 잘 살고, 또는 억울하게 죽거나 고통당한다. 시편은 우리의 죄와 그 허물을 가감 없이 폭로한다. 감정과 변덕도, 절망과 원망도 숨기지 않는다. 어떻게 이런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포함될 수 있지? 싶은 표현들도 많다. 그렇듯 우리는 그 자체로 모순덩어리이다. 겉과 속이 다르고, 한 입에 저주와 찬송을 동시에 머금고 산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는, 스스로 자신은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는 사실 앞에서 절규하고 괴로워할 줄 안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개나 돼지는 회개하지 않는다. ‘사람이 존귀하나 이를 깨닫지 못하면 짐승과 같다.’는 말씀도 그것이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12).”

 

본문 이해

 

오늘 본문은 에단의 시다. 에단은 지난 주일에 나누었던 시편 88편의 저자인 헤만의 형제다. 헤만은 솔로몬과 견줄 만큼의 지혜자였다. 그의 형제 에단과 함께 아삽을 포함하여 세 사람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3대 악사’로 활동하였다. 이들을 여두둔이라 한다. 여두둔은 ‘찬양하는, 칭찬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시적배경은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남유다 르호보암 제 5년(B. C. 926년)에 애굽 왕 사삭이 이스라엘을 침공하였을 때(왕상 14:25-28)로 본다. 그럼 저자 에단의 나이는 90세가 넘는 시점이다. 또 하나는 바벨론의 침공 때로 다윗 왕조가 몰락하던 시기로 본다. 그럼 에단이 지은 시를 그때에 찬송을 불렀을 것이다. 어쨌든 둘 다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 기쁨을 노래하기는 현실적으로 맞지 않다. 역설적이게도 고난은 주를 찬송하게 한다. 첫 번째 주장처럼 에단의 나이 90세에 불린 것이든, 다윗 왕조가 몰락하는 바벨론의 침공 때 불린 것이든, 38절 이하의 내용으로 비춰 ‘다윗 왕조의 몰락’ 때에 주를 찬송하고 바란 것이다.

 

이는 단적으로 ‘십자가의 기쁨’을 역설한다. 우리가 흔히 ‘십자가의 은혜’라고 표현하는데, 실상은 젊은 예수의 몰락이다. 저는 세상을 구하지 못하였고 자신조차 구원받지 못하였다. 이루고자 하였던 천국은 실현되지 않았고, 최소한 역사적으로 다윗과 같이 예수의 시대는 맥 빠지게 끝이 났다. 이를 우리는 초자연적으로 읽고, 듣고, 느끼고, 믿음으로 본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셨다.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죽으셨다. 부활이 없다면 그것으로 끝이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 이사야는 이를 그렇게 예언하였다.

 

본문의 구조는 5연이다. 1연(1-4절)과 2연(5-18절)을 이번 주일에 나누고 3연과 4연을 다음 주일에 전하고자 한다. 5연은 송영이다. 간단하지만 영원한 우리의 함성이 될 것이다. 1연에서는 인자하시고 성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2연에서는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그의 은혜를 입은 성도들의 누림과 찬송을 나타낸다. 다음 주일에 이어갈, 3연은 19-37절로 하나님이 다윗과 세우신 축복의 약속이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로 성취되었고, 오늘 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성취되고 있음을 알게 한다. 4연은 46-51절로 우리가 처한 역경과 위기는 구원을 당당히 호소할 수 있는 특권임을 알려준다. 마지막 5연은 52절 한 구절로 시편 41장 13절과 105장 48절의 종결부와 같이 송영이다. 송영은 예배의 시작과 마지막에 드려지는 찬송으로 우리가 영원히 부를 영광의 노래다.

 

1.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하심은 어떤 상황에서도 유효하다(1-4).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1).”

 

이는 성도의 의무이며 권리다. 특권이고 자랑이다.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 하고 신명기 7장 9-10절에 설명한 바 있다. 다윗은 찬송하기를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시 103:17).” 하고 단언하였다.

 

예수님이 비유로, 이를 안다는 것은 어떤 상태와 같은 것인지 비유로 말씀하셨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 13:44).” 무슨 소린가? 복음의 가치를 알면 자신의 무엇도 이보다 더 소중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는 소리다. 바울은 이에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8-9).”

 

오늘 나의 가장 소중한 무엇보다 더 소중한 것, 다윗은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음이라(138:2).” 그 모든 것보다 높으신 주의 이름은 주가 높이신 것이다! 왜?

 

1) 우주의 질서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의 증거다.

“내가 말하기를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 하였나이다(2).”

 

이 구절의 말씀은 37절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또 궁창의 확실한 증인인 달 같이 영원히 견고하게 되리라 하셨도다 (셀라)(시 89:37).” 무엇이? 주의 이름이! 어째서? 그 모든 걸 질서 있게 창조하시고 오늘도 한 치의 어긋남 없이 감독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우주의 정교함과 그 무한한 질서에 놀라워한다. 선지자 느헤미야도 밤하늘의 별을 보다 주의 이름을 높였다.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느 9:6).” 여호와의 뜻은 만유의 주, 창조주, 전능하신 자, 스스로 계신 자라는 의미다. 이사야 역시 삼라만상의 이름과 수효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성실하심 앞에 감탄하였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사 40:26).” 고로 우주의 질서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나타낸다.

 

2)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언약을 기반으로 한다.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내가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왕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셨나이다 (셀라)(3-4).”

 

여기서 다윗이 남다른 것은 없다. 노아가 그랬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그러했듯이 저는 주께 은혜를 입은 자였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8).” 독생자,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눅 1:28).” 곧 우리가 남다르고 저들이 특별나서가 아니다. 이는 창세전에 예정하시고, 택정함을 입은 주의 자녀로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1장 4-5절,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어떤 조건도 없다. 은혜는 곧 값없이 받는 선물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그러니 어떻게, 왜, 하필 나 같은 자가?? 하는 의문은 우문일 뿐이다. 우리로서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으나,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13-14).” 그 목적은 뚜렷하게 나타난다. 우리로 주의 이름을 찬송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영광이 되게 하시려고… 곧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것뿐이다.

 

 

2.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확장한다(5-18).

“여호와여 주의 기이한 일을 하늘이 찬양할 것이요 주의 성실도 거룩한 자들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하리이다(5).”

 

곧 우리의 찬송은 의무도 권리도 아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다. 이를 시인은 주의 의롭고 성실하심으로 돌린다. 시편 119편, “주께서 명령하신 증거들은 의롭고 지극히 성실하니이다(138).” 마치 우리가 생명이 살아 있다면 숨을 쉬고, 사랑을 하고, 자고, 먹고, 쉬는 모든 일상의 과정처럼,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애 3:23).” 예레미야의 고백은 담백하기까지 하다. 이와 같은 주께 영광을 올려본 사람은 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내 백성을 해가 뜨는 땅과 해가 지는 땅에서부터 구원하여 내고 인도하여다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주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진리와 공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슥 8:8-9).”

 

곧 어떤 일이 되고 안 되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마무리 되고 하는 모든 과정을 기이하도록 놀랍다. 바울은 이를 두고 하나님의 미쁘심을 말하였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3).” 미쁘다는 것은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주의 미쁘심으로 나는 나를 믿을 수 없지만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믿는다. 그리하여 우리에 대한 사랑을 하나님은 감당하지 못하실 정도이다. 스바냐의 노래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 3:17).” 감격스러워 눈물이 날 지경이다. 나 같은 게 뭐라고!

 

1) 우리의 기본자세는 그러므로 경건함과 두려움이어야 한다.

“무릇 구름 위에서 능히 여호와와 비교할 자 누구며 신들 중에서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이까? 하나님은 거룩한 자의 모임 가운데에서 매우 무서워할 이시오며, 둘러 있는 모든 자 위에 더욱 두려워할 이시니이다.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여 주와 같이 능력 있는 이가 누구리이까? 여호와여 주의 성실하심이 주를 둘렀나이다(6-8).”

 

존경은 경외함으로 나온다. 경외는 두려워할 줄 아는 존경이다. 받들어 공경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 10:12-13).” 우리의 사명이고 역할이다. 내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했든, 어떤 일을 하며 살아있든, 주를 먼저 경외하는 것이 지혜이다.

 

예수님은 일러,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하고 말씀하셨다. 고작 임기 5년짜리 대통령직에 오르면서, 4년짜리 국회의원직도 권세라고 여기며 위세를 떠는 꼴이라니! 상위 몇 프로를 운운하며 삶을 만족스러워 하는, 강건하면 70이요, 80짜리 인생을 사는 주제에! 언제든 오라하시면 가야 하는 게 인생이다.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시 62:9).” 이 시 한 구절로 구구한 인생이 정리되지 않는가? 죽어라 하고 사는데도 도토리 키 재기일 뿐인 인생에서, 우리는 무엇에 전 생애를 걸어야 현명할까?

 

2) 하나님은 인생을 평정하신다.

“주께서 바다의 파도를 다스리시며 그 파도가 일어날 때에 잔잔하게 하시나이다. 주께서 라합을 죽임 당한 자 같이 깨뜨리시고 주의 원수를 주의 능력의 팔로 흩으셨나이다(9-10).”

 

그 큰 여리고 성에서 라합만 못한 사람이 몇이나 되었을까? 추측컨대 저는 여인숙 여인이거나 술집 여인이었다. 한데 그 잘난 모두는 깨뜨림을 당하듯 모두가 한 날 한 시에 죽었지만 라합과 그와 함께 있던 자들만 구원을 받았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바다의 설렘과 물결의 흔들림과 만민의 소요까지 진정하시나이다(시 65:7).” 하는 실현이 우리 일상에서 일어난다. 잘난 줄 알고 스스로 뭐든 할 수 있을 것처럼 굴면서 대선을 앞두고 내남없이 점쟁이나 법사를 찾아다닌다. 개업을 앞두면 고사를 지낸다. 산을 타거나 바다로 나가는 사람들도 출항과 산행에 앞서 산신제나 해(海)신제를 지낸다. 그런 자들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주일에 모여 예배하는 우리들은 나약한 사람들로 치부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한낱 미물에 불과한 돌과 나무를 성물로 여겨 그 잘난 소원을 빈다.

 

성경은 일러, “오직 내가 이것을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내가 명령한 모든 길로 걸어가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자신들의 악한 마음의 꾀와 완악한 대로 행하여 그 등을 내게로 돌리고 그 얼굴을 향하지 아니하였으며 너희 조상들이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되 끊임없이 보내었으나 너희가 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여 너희 조상들보다 악을 더 행하였느니라(렘 7:23-26).” 우리의 어리석음을 알리신다. 우리는 이와 같은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 충분히 복되다.

 

3) 죄와 사망의 어둠에서 구원의 빛을 비추신다.

“하늘이 주의 것이요, 땅도 주의 것이라. 세계와 그 중에 충만한 것을 주께서 건설하셨나이다. 남북을 주께서 창조하셨으니 다볼과 헤르몬이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나이다/ 주의 팔에 능력이 있사오며, 주의 손은 강하고 주의 오른손은 높이 들리우셨나이다(11-13).”

 

성경은 우리로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이었음을 상기시킨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이는 복음의 핵심이다. 진리는 창조주이시고, 전능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우리를 죄로 정죄하지 않기 위해 본인이 직접 그 죄를 담당하셨다고 밝힌다. 그러므로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라(사 60:20).”는 것이다. 도대체 이 놀라운 사랑과 은총을 입었으면서도 우리는 무엇 때문에 우물쭈물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은혜를 입었다는 것은,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하는 계시록 22장 5절의 말씀으로도 증명된다.

 

4) 공의와 인자는 하나님의 통치 원리시다.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 앞에 있나이다(14).”

 

하나님은 엄연히 의로우시다. 다른 무엇도 하나님의 의와 견줄 수 없다. 의의 기준도 하나님이시고, 공의의 기준도 하나님이시다. 다른 무엇으로도 이에 비할 수 없다. 하면 처음 사람 아담의 죄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신 말씀에 끝장이 났어야 맞다. 그런데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의 본성이신 사랑과 동일하다. 곧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사람을 그리 정죄하실 수 없는 사랑이 발동하였다. 정죄하셔야 하는 하나님의 공의와 대치된다. 이를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은 죄 없는 이로 그 죗값을 대신지게 하셔야 한다. 그런데 그럴 수 있는 존재는 전 우주적으로 아무 것도 없다. 결국 주의 의가 주의 공의를 충족시키는 데 있어, 죄가 전혀 없으신 하나님만이 유일한 대안이셨다. 결국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고,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지고 대신 죽으심으로 그 값을 물으셨다.

 

이에 우리는 그를 영접함으로 의인이라 칭함을 받는다. 시인은 이를 찬송하기를, “그가 이스라엘의 집에 베푸신 인자와 성실을 기억하셨으므로 땅 끝까지 이르는 모든 것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시 98:3).” 이것이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아는 사랑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롬 11:22).” 곧 하나님이 이 땅을 다스리시는 통치 원리는 하나님 자신의 공의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다.

 

5) 우리의 기쁨의 근원은 온전히 하나님이시다.

“즐겁게 소리칠 줄 아는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여 그들이 주의 얼굴 빛 안에서 다니리로다(15).”

 

이처럼 우리가 주일을 지키고, 주 앞에 공적인 예배를 드리는 것은 여느 날과 다른 특별한 행사로써가 아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 찬송하고 기도하며, 말씀 듣는 것은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으로 은혜이고 복이기 때문이다. 이 복은,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사 35:10).” 하는, 죄 사함의 기쁨을 아는 자들만의 즐거움으로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쁨은 기뻐할 수 없는 중에도 기뻐할 수 있는 기쁨이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2).” 예수님의 말씀은 앞서 간 믿음의 사람들도 이 기쁨에 참여하는 영광을 함께 누렸다는 것을 알게 하신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바울이 연거푸 강조하는 복음이다.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

 

이에 시인은 그 기쁨의 출처를 하나님께 가까이 함에 있다고 하였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시 73:28).” 하였고, 이를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하고 우리가 하나 됨을 강조하셨다. 곧 오늘 우리의 기쁨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영원한 것이다.

 

6) 하나님을 높일 때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신다.

“그들은 종일 주의 이름 때문에 기뻐하며 주의 공의로 말미암아 높아지오니 주는 그들의 힘의 영광이심이라. 우리의 뿔이 주의 은총으로 높아지오리니, 우리의 방패는 여호와께 속하였고, 우리의 왕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에게 속하였기 때문이니이다(16-18).”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높일 때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시고, 또한 그와 같이 높이신다.’는 것이다. ‘종일 주의 이름 때문에 기뻐한다는 것.’은 ‘주의 공의로 말미암아 우리가 높아지오니’ 하는 신앙 고백과 연결된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우선할 때, ‘주는 우리의 힘의 영광이심이라.’는 고백으로 증명된다. 예수님은 이를 집을 짓는 것으로 비유하시며,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마 7:24, 26).” 하고, 서로 상대적인 것을 대비시켜 이 두 사람의 전혀 다른 결과를 알게 하신다.

 

주의 말씀을 듣고 행한다는 것과 듣지 않고 행하지도 않는다는 차이는 어쩌면 당장의 문제가 아니다. 현재로써는 알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곧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칠 때에 판가름이 난다. 권불십년 화무십일홍과 같이 모든 권세도 십년 안팎이면 끝이고, 아무리 아름다운 꽃잎도 십일이 지나면 지기 마련이다(25). 곧 우리 모두는 인생의 죽음 앞에 놓일 것이고, 죽음 너머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다.

 

 

나오는 말

이에 오늘을 사는 우리의 충만한 구원의 기쁨은 사도요한의 증거처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곧 우리의 기쁨은 부활의 즐거움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그 약속의 성취이다. 가깝게는 다윗과의 약속의 성취이고 더 멀게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의 약속의 성취이며 나아가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계획과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과 그 구상과의 약속의 성취가 된다.

 

우리의 부활 신앙은 단순한 절기나 구원의 성취를 초월한다. 정리하자면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하심의 성취이고 이를 우리가 믿고 속량하심을 받은 자들의 찬양으로 하나님의 궁극적인 영광이 된다.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6).”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누리는 이 초월적인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공의가 충족되는 부활의 성취로 완성되었다. 이에 우리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신 상태에서 ‘반드시 주의 영광에 참여하는 자’로 주의 영광된 나라에서의 주체로 당당히 하나님과 함께 영광을 누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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