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전봉석 2022. 5. 13. 05:11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

삼상 3:19-20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

시 111:10

 

 

가장 불쌍한 사역자는 더 이상 말씀이 임하지 않는 것이다. 감동도 없고 울림도 없어 말씀을 열어 보이시는 세계도 없다. 오늘 본문에서 엘리가 그러하였다. 버젓이 제사장을 직무를 수행하는데,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 3:1).” 이는 고스란히 엘리의 상태를 묘사함으로 그 원인을 알리는데,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였고, 저가 주의 성소가 아닌 “자기 처소에 누웠고”, 그때는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던 때이다(2-3). 저를 대신하여 어린 사무엘에 하나님의 궤 곁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다. 비로소 그 ‘희귀하였던 주의 말씀’이 들린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4).”

 

말씀에 기갈이 들면 더는 주의 일을 수행할 수 없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이는 힘써야 할 일이지, 안이하게 자신을 놓아두면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우리의 신앙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말씀으로 이뤄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엘리와 같이 영안이 닫히면 영적으로 앞을 볼 수 없다. 그 영혼이 자기 처소에 누워 잔다. 하여 다윗은 이를 잘 알고 주께 자주 아뢰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13:3-4).

 

우리의 두려운 것은,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은 영혼으로 사는 일이다. 영안이 어두워질 때이다. 살아 있으나 죽은 것과 다름없는 날들이다. 이르면 우리를 노리던 원수가 개가를 부른다. ‘하나님의 등불이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기도의 등불을 꺼뜨리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시간이며 명령의 시간이기도 하다.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항상 그의 얼굴을 찾을지어다(대상 16:11).” 하여 우리로서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는 말씀을 준행하는 일이 그 영혼을 깨우고 주의 말씀과 기도로 살아 있는 삶이 된다. 사무엘은 어려서 이를 보고 훗날 다짐을 한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삼상 12:23).” 한 마디로 기도하는 삶을 살라는 일이다. 그러할 때 낙망하지 않는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 6:18).”

 

이에 그 영혼이 잠들면 기도는 어려워지고 말씀은 가려진다. 어린 사무엘에게 이르신 하나님의 말씀은 엘리 제사장에 대한 예언이었다. “내가 그의 집을 영원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말한 것은 그가 아는 죄악 때문이니 이는 그가 자기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삼상 3:13).” 아직 어렸던 사무엘이 이와 같은 말씀을 접했을 때 그 심정은 어떠했을까?

 

저가 주의 말씀을 들은 것은 주의 전, 곧 말씀을 가까이 했기 때문이고 스스로도 말하였던 것처럼 일찍이 기도를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신 17:19).” 이는 성경의 대원칙이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 그러므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이는 목사나 교회 사역자여서가 아니다. 성경은 충성하는 자에게 주의 일을 맡기신다 하는데,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눅 9:17).” 하는 주의 말씀보다 더 신나는 일이 있을까?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창 12:4).” 또한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 11:8).” 이를 주의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약 4:15).” 이것이 기본 수칙이고 삶의 원리다.

 

어떤 선을 행하고 무슨 일에 열심을 다한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고전 13:1).” 그저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고,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말씀에 귀 기울일 사이가 없다. 사느라 그저 사는 일에 열심인 삶은 죽은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엘리의 경우를 보며 한 마디로 정의하라면 그렇다. 하나님을 실상으로 체험하지 못하고 사는 삶은 불쌍하다. 꿀은 설명이 필요한 게 아니라 찍어 먹어야 한다. 색깔이 어떻게, 무슨 꿀이며, 어디서 났고 하는 따위의 지식으로 그 맛을 보는 게 아니다. 그런 것처럼 말씀이 아무리 고귀하나 그 삶에서 맛볼 수 없는 것이면, 기도가 아무리 은밀하고 충일한 것이나 우리 입에서 드려지는 게 아니면, 장식장에 넣어둔 값비싼 꿀이라 한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9:24).”

 

오늘 시편으로 넘어가면 할렐루야 하는 감탄이 어떤 의미에서 우리 영혼을 바로 세우시는지를 알게 한다. 곧 앞서 생각했던 말씀과 기도의 응축이 할렐루야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를 준행함으로 찬송하고 감사하며 기쁨의 신앙이다.

 

할렐루야,

내가 정직한 자들의 모임과

회중 가운데에서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시 111:1).

 

정직이란 주 앞에서 사는 일이다. 그것도 전심으로 감사하며 사는 것이다.

 

진실로 의인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

(140:13).

 

주 앞에서 사는 일이란,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27:4).

 

오늘 어린 사무엘의 모습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데는 그 마음이 갈려서는 안 된다. 마음이 나뉜다는 것은 이 일도 해야 하고 저 일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인데, 종종 나는 누구더러 ‘너무 바빠!’ 하는 소리를 한다. 그것이 성격이나 기질의 문제로 놓아둘 게 아닌 것은 그러느라 주를 뵐 시간이 없다. 기도는 이동하면서, 말씀은 듣는 것으로, 것도 그저 원하고 바라는 것만 요구하는 것이지 정작은 들으려고 할 마음의 여유가 없다.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들이

크시오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다 기리는도다

(111:2).

 

기린다는 것은 저의 뛰어남을 연구하고 즐거워하는 일이다. 찬양이란 곧 입이 마르도록 자랑하는 일인데,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 6:3).” 저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 우리의 영생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그러므로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9-10).” 이것이 우리를 창세전에 예정하시고 택정하신 비밀한 뜻이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4-6).”

 

곧 오늘의 사는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다. 시편은 일러,

 

그의 행하시는 일이 존귀하고 엄위하며

그의 의가 영원히 서 있도다

(111:3).

 

그에 따른 증거가 오늘이다. 그러므로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이것이 우리 일이고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이 된다. 그리하여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그저 우리로 행복하게 잘 살다 오는 것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갈 1:4).” 그러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곧 하나님의 기이한 행사를 내 삶에서 나타내는 것,

 

그의 기적을

사람이 기억하게 하셨으니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도다

(4).

 

그의 기적, 우리 삶에서의 기이한 일, 곧 여호와의 행사는 그럼 무얼까?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양식을 주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리로다

그가 그들에게

뭇 나라의 기업을 주사

그가 행하시는 일의 능력을

그들에게 알리셨도다

(5-6).

 

우리로 그가 하시는 일, 하시고자 하는 일을 알게 하시는 일. 그것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드러나게 하심이다. 도저히 말도 안 되고 불가능한 상황에서,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출 15:1).” 이는 결국 주가 내 마음을 주장하게 하는 일이다. 나의 주권과 의지와 생각을 내려놓는 것,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 3:15).”

 

발람이 말하길 하나님께 물어보고, 하듯이 실은 누구도 계속 묻기만 한다. 들으려고 해야지 묻기만 하고 생각만 많은 것은 행함을 미루게 하는 결정적인 이유다. 만일 아브라함이 그러했다면, 앞서 노아가 그랬다면 주의 뜻을 다시 묻고 깊이 생각해보고 자신의 기질이나 성격을 파악하여 결정하겠다고 했더라면 과연 어떠했을까? 우린 생각보다 현명하지 못하다.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것도 실은 죄악뿐이다. 말 그대로 내 생각을 내버려두면 악이 된다. 이를 버리면 주가 채우신다. 그렇지 않을 때 우려는 현실이 된다.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사 55:2).”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하면 할 말이 없다. 우리가 주의 뜻을 묻고 생각하는데 시간을 지체하는 게 아니라, 들으라는 것! 그리하면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그것으로 주가 행하심을 목격하는 증인이 된다.

 

나는 요즘 묵상글에서 내 이야기를 자꾸 뺀다. 일상의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읽기도 쓰기에도 재미는 있다. 하지만 그래서도 가급적이면 지운다. 썼다가 나중에 다시 읽으면서 거반 다 지운다. 마치 말씀은 까먹고 예화로 들은 이야기만 기억에 남는 격이라, 누구 이야기에서도, 어떤 사연을 두고도 가급적이면 지운다. 그래서 참 재미없는 글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오롯이 말씀만이 도드라지기를 바란다. 마치 꿀을 입에 물고 더는 다른 말이 필요 없는 것처럼. 오늘은 엘리와 어린 사무엘의 이야기로도 우리가 묵상하고 붙들 이야기로는 충분하다. 저들을 보며,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37:23).

 

‘여호와께서’, ‘여호와께서’ 정하시고 기뻐하시고 행하시는 일이 곧 우리의 일상이 되기를. 그렇게 우리 이야기가 한데 버무려지면 이 한 구절의 말씀처럼 신앙고백만이 남는다. 이를 위해서도 나는 요즘 내 이야기의 이런저런 문제들에 주목하지 않는다. 어찌지? 하고 근심이 일어나도 멀리한다. 왜?  “또 그들이 그 나무뿌리의 그루터기를 남겨 두라 하였은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단 4:26).” 우리 삶이 견고할 수 있는 것은 이를 구하고 이룰 때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주목하는 데서 확실해진다.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

(90:17).

 

우리 손이 행한 일이 견고하려면 하나님의 은총으로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 그러므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 모든 나라에 행하신 일을 너희가 다 보았거니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는 너희를 위하여 싸우신 이시니라(수 23:3).” 그러므로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삼상 12:24).” 그러할 때 우린 눈을 든다. 땅을 살핀다. 하나님의 구원이 어찌 이루어지시는지를, 본다.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피라 하늘이 연기 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 같이 해어지며 거기에 사는 자들이 하루살이 같이 죽으려니와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공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사 51:6).”

 

그의 손이 하는 일은

진실과 정의이며

그의 법도는 다 확실하니

영원무궁토록 정하신 바요

진실과 정의로 행하신 바로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속량하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세우셨으니

그의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

(7-9).

 

오늘의 이 놀라운 찬송이 내 입으로 드려지고 귀로 들려지는 삶으로 복되다.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 24:35).” 이는 곧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 6:17-18).” 나의 하루 가운데, 나로 이 모든 것의 증인이 되어 살게 하신다. 그것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하나님은 맹세까지 하셨다. 이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

(10).

 

오늘 이 시편의 마지막 확언은 우리로 믿음 안에서 어찌 말씀을 듣고 기도가 쉬지 않는 삶으로 살게 하시는가를 증명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신 4:6).” 나의 보물, 나의 가장 귀한 게 무엇일까? “네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네 보배니라(사 33:6).” 곧 주를 경외함이란, 무슨 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든지 모든 게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의 권세 아래 있음을 아는 것이다. “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신 5:29).”

 

주가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사 50:10).” 하나님을 의지하는 일.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말 3:16).” 우리가 주를 경외함은 이처럼 엄청나고 확실한 증거로, 주의 기념책에 기록되는 이야기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