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라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사십 년이었더라
삼상 4:18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112:1
이스라엘 신정체제의 최후의 사사였던 엘리가 죽었다. 블레셋과 전쟁을 치른다. 전투에서 패하자 여호와를 언약궤를 가져가 전쟁에서 승리를 꾀한다(1-4). 그러나 오히려 블레셋 군대의 사기만 올려주는 셈이 된다(5-9). 결국 엘리의 두 아들이 죽고 언약궤는 빼앗긴다(10-11). 이와 같은 소식에 엘리는 죽고(12-18), 그의 며느리가 조산한다(12-22). 엘리 가문의 몰락이다. 이는 한 가문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경고다.
우리 영혼을 삼키는 것은 화인 맞은 양심과 우상숭배적인 모순된 신앙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제 너희가 그 모든 일을 행하였으며 내가 너희에게 말하되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였고 너희를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실로에 행함 같이 너희가 신뢰하는 바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 곧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준 이 곳에 행하겠고 내가 너희 모든 형제 곧 에브라임 온 자손을 쫓아낸 것 같이 내 앞에서 너희를 쫓아내리라 하셨다 할지니라(렘 7:13-15).”
결국은 회개할 줄 모르는 양심의 문제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5).” 이는 영혼이 사망의 잠을 자는 것으로,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시 13:3).
우리 영혼이 주를 바라고 소원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 그리하여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8).” 주 앞에 아뢰고 고할 때 더는 죄가 나를 사로잡지 못할 일인데,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잠 1:23).” 듣고 돌이킬 수 있는 게 복이고, 그럴 수 있는 자로 세우심을 받은 것이 소명이다.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우리’라는 표현이 거듭 나오는데, ‘우리’라는 표현을 쓰기에는 너무 자기중심적인 결정이었고, 하나님 중심적인 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 “백성이 진영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3).” 그저 지금의 처지를 모면하려 언약궤를 함부로 가져다 편의주의적으로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고 이용한다.
마치 이에 반격을 가하듯 바울의 설교가 날카롭게 들려온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5).” 이것이 오늘 우리가 누리는 은혜와 구원의 삶인데, 여전하여 교회를 다니는 일에서부터 기도와 모든 신앙 행위가 우리 또한 얼마나 미신적일 때가 많은지… 이는 모두 ‘자기(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려드는 모습과 다를 게 없다. 만일 우리의 믿음이 확실하다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그러한 삶으로의 날들인지.
우리의 실패는 언제나 내적의 문제로 인한다. “너희는 너희가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겔 18:31).” 스스로 자신의 몸을 쳐 복종하게 하였다는 바울의 심경처럼 우리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해야 하는 일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왜들 그때 저들은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져올 생각까지 했으며 아무도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의 도우심을 구할 생각은 못한 것일까?
우리의 미신적인 신앙은 하나님 없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과 상관없는 교회를 섬긴다. 결국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 곧 우리는,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1:1-2).
말씀을 가까이함은 주의 곁에서 주의 뜻을 구하는 일이다. 하여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 그러므로 우리의 행복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신 33:22).”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과 이용하는 일은 엄연히 다르다. 우리의 교만은 무서운 것이어서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딤전 6:5).”
언제부턴가 우리는 모양만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믿음의 형태도 그 마음도 ‘왕의 통치’가 없던 사사시대와 같이 ‘자기들 좋을 대로’ 교회를 선택하고 말씀을 골라 듣고, 그것도 필요에 따라 철저하게 이용하는 미신적인 행위로만 그치는 것은 아닐까?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 조각한 것이나 주상을 세우지 말며 너희 땅에 조각한 석상을 세우고 그에게 경배하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레 26:1).” 마치 물건을 또는 사람을 앞세워 신주(神主)처럼 여기는 일과 조금도 다를 게 없다. 더하여 기도하는 일도 말씀을 가까이 하는 일도, 그것으로 ‘우리가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모색하는 일은 모두가 우상이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가 않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1-2).”
오늘의 말씀을 되새기며 저 일련의 사태를 통해 나의 하루는 어떠한가를 생각한다. 이는 마치 심음과 거둠의 원리 같아서,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이는 참 애매한 것 같지만 기도의 중심이, 그 요구가 무엇을 향하는지를 보면 된다. 말씀을 바라고 갈망하는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피면 알 수 있다. 곧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8).” 아, 이 얼마나 두려우면서 허무한 일일 수 있겠나?
“그들이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이라 심은 것이 줄기가 없으며 이삭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요 혹시 맺을지라도 이방 사람이 삼키리라(호 8:7).” 이와 같은 결국이 더디다 하여, 당장의 모면으로 모든 게 옳은 줄 알 때에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롬 2:6-7).” 나는 과연 어떠한지를 돌아보게 된다. 저들이 실제 언약궤를 진영에까지 가져온 것은 요행으로였다. 요행이란 뜻밖의 행운을 바람이다. 하나님을 마치 자기들 편의에 따라 부르고, 찾고, 두드릴 때 사탄은 얼씨구나 하고 자신이 나선다. 주는 탄식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마 17:17).”
이런저런 시국이나 상황을 보면 ‘그럴 수 있다.’ 그럴 수 있는 처지가 어디 한둘이 아니다. 저마다 사연이 있고 그에 따른 나름의 요행을 바라는 신앙도 있다. 누구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 이를 우선하기보다 오늘의 안정을 바랐다. 더는 뭐라 이를 수 없어 나는 입을 다물었다. 누구는 당장에 터진 일로 마치 주 앞에 경건한 자로 산다. 혹시나 하고 말이다. 성경은 그런 우리를 두고 위하여 구하신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8-19).”
우리가 주를 바라는 것은 이 환경을 개선하고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는 데 있지 않다. 이러한 환경을 조성하시는 이가 위대하심이다. 마치 이 온 상황과 여건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를 조성하시고 구성하시는 하나님이 위대하심이었다. 시인은 노래하기를,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46:10).
하나님이 이루신다. 자연과 모든 우주가 아무리 위대하다 한들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이 더욱 위대하심과 같다. “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리니(사 46:10).” 그런데 저들은 하나님 없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전쟁터 진영으로 가져와 부르짖었다. 오늘에도 이와 같은 행태는 여전하여 내 속에도 주를 바라는 마음이 퇴색되지 않을까, 오늘 말씀은 찌른다. 하나님에 비해 더 앞세우는 모든 것은 우상이고 미신이다. 실제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충분하셨다. 우주도 지구도 사람도 그 어떤 무엇도 필요로 할 게 없었다. 본래는 하나님으로 충만한 세계였다. 그 좋고 좋은 것을 하나님과 같이 우리에게도 누리게 하시려고, 우주도 지구도 사람도 지으셨다. 이는 모두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19:1-4).
이는 모두 스스로의 영광을 위하심인데, 그보다 더 충만한 기쁨도 행복도 없기 때문이다. 곧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사 43:7).” 다시 말해 하나님의 영광보다 귀한 우주만물의 영광은 없다. 하나님의 영광보다 최고의 기쁨도 행복도 없다. 하나님의 영광보다 최고의 선물도 없다. 그 영광을 함께 누리게 하시려고, 누리게 하심으로 영광을 받으시려고… 며칠 전 아이엄마가 왔었다. 18개월 된 아기는 엄마 품에 안겨 갸웃거리더니 내가 내민 손에 악수를 하였다. 그리고는 수줍은 듯 얼른 다시 엄마 품에 얼굴을 묻었다. 저 아이의 전부는 엄마다. 엄마는 아이를 품으며 만족한다.
하나님도 우리로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도록 우주의 목적은 사람이고 사람의 목적은 하나님이다. 죄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의 영광을 돌리려는 것이다. 죄란 곧 하나님의 영광을 거절하는 일이다.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 3:26).” 그럼에도 우리를 사하시고, 자신을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시는 그 영광… 이에 이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사 52:7).” 오늘의 나로 여기에 앉히신 이유,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 2:10).”
이를 오늘 시편의 첫 어절은 ‘할렐루야’로 받는다.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112:1).
눈이 떠지고 이처럼 아침마다 주 앞에 앉히시는 것이 내게는 복이라.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6).” 마치 새들도 시간을 아는지, 어스름 다섯 시가 되면서 어둠이 걷히는 요즘은 창문 밖으로 새소리가 청아하다. 또 하루가 시작되었다. “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신 5:29).”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것이다. 그 복은,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엡 1:3).” 나는 다음 구절을 되뇔 때마다 벅차다. 왜 나 같은 자를 이처럼 택하시고 예정하셨는지, 나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4-6).”
그러므로 하나님께 향한 진정한 신앙은,
그의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한 자들의 후손에게 복이 있으리로다
(2).
나는 줄곤 기도하기는 이 믿음의 계보가 자자손손 이어지기를. 더하여 주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 더 주 앞에 온전하여지기를. 이에,
부와 재물이 그의 집에 있음이여
그의 공의가 영구히 서 있으리로다
정직한 자들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며
의로운 이로다
(3-4).
이 땅을 살면서 우리가 바라는 모든 행복이 실은 하나님이었다. 그러므로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 6:6-7).” 더 다른 어떤 교육으로 이를 알게 할 수 있을까? 언제, 어떻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세상에서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 다른 더 좋은 수가 있으려나?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벧전 2:19).” 하여,
은혜를 베풀며
꾸어 주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정의로 행하리로다
그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함이여
의인은 영원히 기억되리로다
(5-6).
곧 주를 경외함으로 우리는 명예도 부도 얻는다. “의인을 기념할 때에는 칭찬하거니와 악인의 이름은 썩게 되느니라(잠 10:7).” 저마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으로 만족함을 얻고 사는 일이겠으나 “내가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는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사 66:22).” 고로,
그는 흉한 소문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의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그의 마음이 견고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의 대적들이 받는 보응을
마침내 보리로다
(7-8).
이처럼 한 구절 한 구절 속에 오늘 하루의 날들이 찍힌 듯하다. 이를 앎으로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신 31:6).” 이보다 더 든든하고 확실한 삶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6).” 그러므로 나는 누구 일에 간절히 주께 구하나 더는 애쓰지 않는다. 내가 어찌하려 하지도 않는다. 이는 가족들에게도 마찬가지여서, 나 또한 나 자신을 어찌할 수 없다는 데서 두 손 들었다. 다만 주를 의뢰함인데,
그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구히 있고
그의 뿔이 영광 중에 들리리로다
악인은 이를 보고 한탄하여
이를 갈면서 소멸되리니
악인들의 욕망은 사라지리로다
(9-10).
우리는 더 이상 악인일 수 없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1:4-5).
곧 오늘도 나에게 더하시는 은혜를 나는 이성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이처럼 말씀 앞에 앉아 자족하고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되기를 소원한다. 곧 나의 진노는 소진되었고 하나님의 공의는 실현되었음을 믿기 때문이다. “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롬 8:9-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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