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19편 -4
73-96절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삼상 14:6
주를 경외하는 자들이 나를 보고 기뻐하는 것은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는 까닭이니이다.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
시 119:74, 92
요나단은 독단적으로 그 신앙에 용기를 낸다. 저로 인해 이스라엘이 승리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한다. 믿음이 환경을 초월할 때 진취적이게 된다. “…우리가 건너편 블레셋 사람들의 부대로 건너가자 하고 그의 아버지에게는 아뢰지 아니하였더라(1).” 여러 내용이 복선으로 깔려 있다. 요나단이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믿음과 상대적으로 그 아버지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최선은 하나님의 뜻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더러 급진적이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 19:29).” 그리고 더하시는 한 말씀,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30).” 곧 우리 의지나 우리 생각으로 무엇을 판단하고 이루는 게 아니었다. 훗날에 제자들이 고백한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5:29).” 곧 우리가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 것이 주의 뜻 안에 있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약 4:15).”
상대적으로 사울의 행보나 신앙은 종교적 의미가 강하고 그에 따른 구색 맞추기에 집착하는 것을 본다. 저들은 요나단의 출격을 알지 못했다(3). 한데 사건의 말미에 이르러 “사울이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으니 이는 그가 여호와를 위하여 처음 쌓은 제단이었더라(35).” 곧 두서없는 저의 행보를 짐작할 수 있다. 성경은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 1:13).” 하나님은 온전히 주를 경외하는 것을 바라신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신앙에 따른 여러 장애가 우리 생활 도처에 있다. 어떤 일로 분주하기가 주의 뜻을 우선하지 못하게 한다. 바울의 우선은 언제나 주의 뜻이었고 그에 따른 어떤 피해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27).” 어떤 어려움 또는 생각지도 못한 낭패가 우리로 주춤거리게 한다. 어떤 일을 두고 주 앞에서 좋았다가 뜻하지 않은 일로 주 앞에서 낙심할 때도 있다. 그럴 때,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 23:4).
무엇이 나를 해롭게 한다해도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심을 아는 것. 이는 믿음으로 걷는 길이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이 모든 일의 주체가 하나님이시고, 그의 섭리는 언제나 선하심 가운데서 진행됨을 아는 것, “아무도 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위하여 세움 받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살전 3:3).”
늙으신 장모의 부상과 수술로 아내의 간병이 길어졌다. 어제는 세탁기를 돌리고 빨래를 개고 여러 것을 치웠다. 곳곳에서 그간 짐작하지 못한 아내의 수고를 알 수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살던 일상의 여러 수고가 실은 누군가의 노고로 이루어져 평안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하다못해 밥 한 끼를 차리고 치우는 일이 그처럼 손이 많이 가는 것일 줄 몰랐다. 그저 설거지나 가끔씩 돕고 라면이나 끓여봤지, 이런저런 모양 속에서 누군가의 수고가 있어서 나의 생활이 평탄하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은 행함으로 안다. 믿음도 그러해서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 늘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내가 하는 것이 전부인 줄로 알았다. 야고보는 이를 더 강하게 질타한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6).” 고작 며칠 손수 그런저런 일까지 행하다보니 나의 말과 나의 실천이 얼마나 거리가 멀었는지 알 것 같았다.
무엇보다 믿음이나 그 믿음도 삶의 실전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히 11:29-31).” 믿노라, 하고 아무 것도 행하는 바가 없었다면 저들의 길은 사망으로 끝이 났을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구원은 상황과 조건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우선하여 바라면 거기에는 몸도 행하게 돼 있다.
오늘 본문에서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행보가 서로 비교되면서 종교적인 사울과 믿음의 실천적인 요나단의 실천이 서로 다른 것을 보게 된다. 사람으로 주를 이길 수는 없다! “아사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힘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 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하건대 사람이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였더니(대하 14:11).” 주의 도우심을 바라고, 이를 믿고 행할 때 주께서 이루시는 것을 알게 한다. 상대적으로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사 31:1).” 우리가 나름 자신의 삶에서 이김을 위해 말과 병기를 준비하지만 이김은 결국 주의 것이라는 지혜자의 교훈,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21:31).”
이를 알 때 오늘의 환경이나 여건이 우리를 주저앉힐 수 없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이 또한 주의 일로 여기며 묵묵하였다. 여든일곱 노모는 결국 부러진 팔에 철심을 박는 수술을 해야 하는데, 오늘은 이른 아침에 병원에 들러 잠시 기도를 해드리기로 하였다. 주가 행하시는 일을 우리는 다 알 수 없지만 어떠하든지 오늘에 처한 이 모든 상황이 주의 손길 가운데 있음을 명심한다. 하여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 27:35).” 이럴 때 우리를 붙드는 것이 말씀인 것을,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 11:8).” 말씀을 믿음으로 순종하여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우리의 여정이 아니겠나?
오늘 시편으로 다시금 말씀만을 의지하는 데 따른 놀라운 진가를 확인할 수 있다. 유난히 긴 구절의 119편을 이처럼 쪼개어 세부적으로 살피면서 좋은 것은 새삼 그 어느 구절도 적절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176절로 이루어진 장문의 시는 8절씩 22연으로 나누어 읽어도 되지만, 이를 8문단으로 나누어 오늘은 네 번째 문단으로, 말씀을 사모하는 열정과 구원을 간구하는 두 가지 핵심을 알아볼 수 있다. 오늘 본문 첫 구절부터 확실한 지침을 제공한다.
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사오니
내가 깨달아
주의 계명들을 배우게 하소서
(73).
기본 전제는 주가 우리를 만들어 오늘에 세우셨다는 것이다. 이를 깨달을 때 주의 말씀을 갈급 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갑자기 생각나는 어떤 일이 있다. 돌이켜 다시(!) 주의 길로 끌려왔을 때 내 의지와 상관없이 강권하셨던 것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새벽예배에 나가는 것이었고 하나는 가정예배를 드리는 일이었다. 그때는 신대원을 한 번 떨어져 ‘역시 이 길이 아닌가?’ 하고 나름 발뺌하려 할 때였다. 여전히 술자리에도 가고 담배도 끊지 못하고 있을 때이다. 그러면서도 어떤 의지에선지 나는 당시 섬기는 교회로 새벽예배를 갔다. 안 하던 사람이 그러니 담임 목사는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겼나 하고 걱정을 하였다. 그때는 아들을 필리핀에 보내기 전이었으니까 고3, 중3 아이의 귀가는 늦었고 그럼에도 우린 그 시간을 기다렸다가 모여앉아 가정예배를 드리고 하루를 정리하였다.
무엇보다 그 습관은 오늘까지 이어져서 며칠 전부터는 아들과 둘이 앉아 저녁을 먹고 가정예배를 드린다. 아내는 어머니 간병으로 어쩔 수 없고, 딸애는 퇴근이 늦다보니 그럼에도 우린 남은 사람끼리 ‘그 일’을 계속 이어간다.
신앙은 무던함을 전제로 하는 게 아닐까? 노아도 아브라함도 모든 믿음의 사람들도 이해로 믿은 게 아니라, 행함으로 믿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저런 상황에서 보면 지금 저 혼자 그것도 120년이나 걸려 방주를 짓는다는 게 말이 되나? 또는 일흔다섯 해 동안 한데 어울려 살던 곳을 말씀 한 마디에 무작정 떠나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길을 나선다는 게 상식적으로 맞는 일인가? 하나님은 우리의 이해나 상식을 구하지 않으신다. 우리의 이해나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주의 뜻을 행할 수 없다. 믿음은 이해로 하는 게 아니다.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43:3).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지? 하는 순간을 돌이켜 보면 내가 한 게 아닌 것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나는 설명할 수 없다. 다만 “지혜로운 자는 위로 향한 생명 길로 말미암음으로 그 아래에 있는 스올을 떠나게 되느니라(잠 15:24).” 바꿔 말하면 주의 강권하심은 우리를 꼼짝 못하게 한다. 한데 이를 서로 기뻐하고 응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주를 경외하는 자들이 나를 보고 기뻐하는 것은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는 까닭이니이다
(74).
가령 아침마다 쓰는 나의 묵상글을 보고 같이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몇 명 있다. 이는 그 기쁨을 아는 경우이다.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
(92)
이는 수천 년 전 어느 시인의 고백이면서, 내 부모 형제가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으로 오늘에 이르러 가장 늦게 또한 미련하고 아둔한 나에게도 아멘으로 동참하게 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진정한 것은,
내가 주의 법도들을 영원히 잊지 아니하오니
주께서 이것들 때문에 나를 살게 하심이니이다
(93).
오늘의 나로 살게 하심도 은총인데 영원을 사모하며 주의 나라를 위해 남은 생의 전부를 바치려는 것으로도 모자라 늘 주의 은총을 사모함이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심판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 때문이니이다
(75).
어떻게 이런 고백이 가능할까? 가식적인 게 아니라면 그 진정성은 어디에서 나올까?
구하오니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위안이 되게 하시며
주의 긍휼히 여기심이 내게 임하사
내가 살게 하소서
주의 법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
(76-77).
그 증거는 주의 안위하심이었고, 주의 긍휼하심이 나로 즐겁게 살게 하신다는 것이다. 곧 우리의 만족은 우리가 원하는 게 이루어질 때가 아니었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17:15).
그들이 주의 집에 있는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라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36:8-9).
구구절절 아멘으로 화답하게 된다. 하루하루를 살며 주의 복락으로 감사할 수 있는 것, 비록 그 처지는 어떠하다 해도 주께서 나의 생명의 원천이 되시고 내가 그의 빛을 보며 그 안에서 산다는 것이 귀하였다. 고로
내 마음으로 주의 율례들에 완전하게 하사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게 하소서
(80).
말씀으로 더욱 가까이, 말씀 앞에서 온전하여지기를. “내 백성에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별을 가르치며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분별하게 할 것이며(겔 44:23).” 주가 가르치심이 복되다. 한데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 4:6).” 이보다 더 끔찍한 저주는 없다. 나로 늘 주께 고하게 하는 기도는 자자손손 우리가 주의 자녀로 사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전적으로 주께 모두 맡김으로 가능하였다. 이에 산 증거가 우리 부모의 믿음이었고, 저들의 무모한 맡김이 결과적으로 우리 사남매가 모두 주의 길을 가게 하신 것이다. 어릴 때 그게 그렇게 서럽고 싫고 반항심으로 어그러지듯 곁길로 가기도 하였지만, 소위 목회자 자녀들이 더 문제아가 많다는 것은 저들이 사울과 같은 신념으로 어찌 행하여 건사하려 하기 때문이었다. 상대적으로 우리 부모는 무책임할 정도로 하나님 앞에 던져놓고 죽이든지, 살리든지, 주가 알아서 하시라! 하고 자신들의 사역에 전념한 것이었으니…. 물론 그 심정이 어떠했을까, 하는 부분에서는 눈물겹지 않은 게 없다.
공부 중인 아들을 깨워 밥을 먹이고 다시 하루를 시작하게 하는 일에서 며칠 저의 끼니를 준비하면서 새삼 더욱 나의 부모가 혼자 안고 씨름하였을 그 심정을 헤아려볼 수 있었다.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81).
오직 말씀으로,
나의 말이 주께서 언제나 나를 안위하실까 하면서
내 눈이 주의 말씀을 바라기에 피곤하니이다
내가 연기 속의 가죽 부대 같이 되었으나
주의 율례들을 잊지 아니하나이다
(82-83).
그와 같이 주의 말씀으로만, 주를 의뢰하는 삶이란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 6:68).” 달리 길이 없다. 나는 그게 가장 다행이다. 내가 돈이 여유가 있었다면, 건강하여 원하는 바를 할 수 있다면 과연 이처럼 말씀으로만 주 앞에 서려 하였을까? 주변에 분주하여 말씀 앞에 앉을 기회가 없는 이들을 보면 나의 비루하고 나약함이 복 중의 복인 것만 같다. 그런 가운데 할 수 있는 일을 맡기신 이의 뜻에 따라 하면서,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그저 앞만 보고, 말씀만 의지하고 나아갈 뿐이다.
주의 모든 계명들은 신실하니이다
…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입의 교훈들을
내가 지키리이다
(86, 88).
누가, 어떤 상황이, 무엇이 나를 꿇어 엎드러지게 하려 할 때도,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히 3:14).” 이는 주의 것이다. 주가 그리 강권하심을 나는 이제 확신한다. 나는 할 수 없어도 주가 하신다. 하면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잠 24:16).” 실패는 있을 수 있겠으나 좌절은 없다. 그 모든 것에서 건지시는 이가 계심이고, 주의 손이 나를 붙드심이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34:19).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37:24).
하여,
여호와여 주의 말씀은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
주의 성실하심은 대대에 이르나이다
주께서 땅을 세우셨으므로
땅이 항상 있사오니
천지가 주의 규례들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만물이 주의 종이 된 까닭이니이다
(89-91).
이와 같은 말씀으로 오늘도 하루를 다할 뿐이다.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
내가 주의 법도들을 영원히 잊지 아니하오니
주께서 이것들 때문에 나를 살게 하심이니이다
(92-93).
주가 나로 살게 하심이었는데, 주어진 상황에서 그 일에서 묵묵히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만을 바라며 나아가는 것, 비록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사 40:8).” 하여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 24:35).” 하면 무엇을 붙들고 살 것인가?
나는 주의 것이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의 법도들만을 찾았나이다
내가 보니 모든 완전한 것이 다 끝이 있어도
주의 계명들은 심히 넓으니이다
(94, 96).
그러므로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 1:9).” 하여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말씀이 말씀으로 나를 붙드시는 것이었으니,
내가 보니 모든 완전한 것이 다 끝이 있어도
주의 계명들은 심히 넓으니이다
(9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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