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전봉석 2022. 5. 26. 05:10

시편 119편 -6

121-136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삼상 16:7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

시 119:130

 

 

사무엘이 사울로 인해 슬퍼한다. 하나님은 이를 나무라신다. 그리고 새로운 왕을 택하셨음을 알리신다. 베들레헴 이새의 아들들 가운데 다윗이 준비되었다. 앞서 다른 이를 염두에 둘 때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7).” 저를 주의 선택된 자로 부르실 때에 사울은 여전히 건재하고 있었다.

 

우리의 실패가 하나님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의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사 14:27).” 주가 하시는 일에는 능하지 않으신 것이 없다.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시 33:11).

 

그럴 때 현실과 닥친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복이었다.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렘 17:7).” 하나님은 결코 거짓말하지 않으신다.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 6:18).” 우리의 혜안이란 하나님만을 신뢰함으로 소망을 가지는 것이다.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19-20).”

 

할 때 오늘 시편에서처럼 어려운 일 앞에서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게 참 지혜이겠다. “이 모든 일이 네게 임하여 환난을 당하다가 끝날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그의 말씀을 청종하리니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신 4:30).” 이와 같은 말씀을 강하게 붙들고 살 때 무엇에도 흔들림이 없을 것인데, “오직 내가 이것을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내가 명령한 모든 길로 걸어가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렘 7:23).”

 

사울 왕을 보면 저가 어찌 그리 되었는가, 하는 데서 우리는 알게 된다. 곧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신다는 것과 저를 떠난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일이다. 그래서 지혜자도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 그리 권하고 당부하였던 것이구나.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하게 하시도다(사 26:7).” 오늘 시편 첫 구절이 크게 다가오는 이유다.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

(119:130).

 

말씀을 열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우리의 열매고, 의인의 필연적인 행위 가운데 하나였다.

 

내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였사오니

나를 박해하는 자들에게

나를 넘기지 마옵소서

(121).

 

우리의 정의와 공의는 무엇일까? 신실한 순종과 실천적인 삶으로 이는 날마다의 다툼이 내 안에 인다는 소리다. 왜냐하면 그처럼 호락호락 순종할 수 없게 하는 것이 우리의 속성이었다. 알면서도 아는 것과 실천하는 일은 엄연히 거리가 있었다. 이를 바울은 선한 싸움이라고 표현하였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자신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이를 알린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빌 3:17).” 자신을 본받으라 하면 그만큼 자신이 자신 있다는 소리이기보다 그와 같이 우리는 스스로 자신과의 싸움이 필연적인 것을 알게 한다.

 

또한 나는 그의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나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

그의 목전에서 내 손이 깨끗한 만큼

내게 갚으셨도다

(18:23-24).

 

곧 그만큼 자신 있는 것은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알고 신뢰하는 것이다. 나는 비록 또 실수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해도 이를 주 앞에 인정하고 주의 긍휼하심을 바라는 것. 그러니까 주의 가지로 붙어있기만 해도 나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의의 기준을 저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 15:2).” 그 열매는 주를 더욱 신뢰함이었다. 주가 나의 모든 허물과 죄를 이미 다 치르셨다는 것.

 

주의 종을 보증하사

복을 얻게 하시고

교만한 자들이

나를 박해하지 못하게 하소서

(119:122).

 

오늘 시편이 이를 구하는 의미도 다르지 않다. 내가 어떤 수고와 남다른 노고로 의롭다는 소리가 아니라, 어떠하였든지 나를 이미 값 주고 사신 이의 것으로서 나는 저의 소유임으로 저가 의로우심으로 나는 의롭다. 저는 나의 영원한 대언자이시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그러니 내 맘대로 살아도 된다는 게 아니라, 이를 앎으로 더욱 주 앞에 겸손하여진다. 즉 저가 나의 보증이시다.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4).” 내가 의롭지 않다 하면 나를 속량하신 이의 실패가 된다. 하지만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히 7:22).”

 

내 눈이 주의 구원과

주의 의로운 말씀을

사모하기에 피곤하니이다

(123).

 

그럴 줄 아는 게 복이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8-9).” 내가 가진 모든 것, 그토록 바라고 의지하던 것들을 해로 여김은 예수를 아는 지식이 더 고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권면과 축복은 귀하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벧후 3:18).” 부디 그러하기를,

 

주의 인자하심대로 주의 종에게 행하사

내게 주의 율례들을 가르치소서

나는 주의 종이오니 나를 깨닫게 하사

주의 증거들을 알게 하소서

(124-125).

 

주가 행하시기를. 고로 나로 하여금 주의 말씀을 더욱 사모하며 이를 가르쳐 알게 하시기를. 나는 이를 깨달아서 삶의 증거로 삼고 살게 하시기를. 하면, 주의 뜻대로 행하는 자이면 된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마 12:50).” 주의 뜻을 알기 위해서 말씀 앞에 앉는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 14:23).” 이를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상대적으로,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고로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24).” 이처럼 말씀 앞에 나로 앉히시고 주의하여 듣고 읽고 쓰게 하심이 복이었다.

 

그들이 주의 법을 폐하였사오니

지금은 여호와께서 일하실 때니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들을

금 곧 순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범사에

모든 주의 법도들을 바르게 여기고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126-128).

 

나의 고백이 주를 찬미하는 것이었다. 행실도 성과도 나타나는 모양도 내세울 것이 하나 없지만 그럼에도 주의 사랑이 나를 붙드시고 계심을 안다는 것, “그러므로 너희는 여러 교회 앞에서 너희의 사랑과 너희에 대한 우리 자랑의 증거를 그들에게 보이라(고후 8:24).” 늙으신 장모에게 들러 기도하고 축복하고 집으로 온다. 집안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행할 뿐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약 2:18).” 누가 뭐라 하든지, 내가 어떠하든지, 주어진 삶 가운데서 주를 바라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행하는 것. 이는 말씀을 이성으로가 아닌 믿음으로, 그 믿음이 삶 가운데서 드러나게 하는 것이었다.

 

주의 증거들은 놀라우므로

내 영혼이 이를 지키나이다

(129).

 

곧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13).” 그때마다 주가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무슨 일로 마음이 상하거나 조급하여질 때 나는 이제 입을 다무는 데 주력한다. 어떤 말은 서로의 감정만 상하게 할 뿐이어서 더한들 보탬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는 가족 간에도 마찬가지어서 사랑하는 사이일수록 할 말을 주께 고하는 게 현명하였다. 내가 아버지라 해서 뭐라 한들 좋을 리 없고, 남편으로 뭐라 해도 감정만 상할 수 있는 일이어서,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골 1:9).” 주가 행하실 것임을. 하여,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

(130).

 

이 말씀 안에 숨겨진 놀라운 비밀을 알겠다. 말씀이 마음을 여셔야 하고 마음이 열릴 때 그 말씀은 또 역사하시는 것이어서, “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회중의 스승들의 말씀들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가 주신 바이니라(전 12:11).” 말씀으로 찔리고 맞고 하는 게 복이다. 누구는 설교를 들으며 자기 들으라고 하는 소린가, 하고 감정을 상하고. 누구는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듣고 찔려서 회개하게 된다. 나는 이 두 차이를 알지 못한다. 어째서 누구에겐 그렇고 누구에겐 그렇지 못한 것인지. 다만,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19:8).

 

이를 경험하고 감사하게 받을 수 있는 것이 복이었다. 하여,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베푸시던 대로

내게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의 발걸음을 주의 말씀에 굳게 세우시고

어떤 죄악도 나를 주관하지 못하게 하소서

(131-133).

 

곧 말씀과 같이 살고자 하면 나는 죽고 나는 산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고로 나의 한 날이 주의 것으로 쓰임 받을 때 주께로 영광을 올릴 수 있는 것.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19:13).

 

죄를 나는 상대할 수 없으나 주께 고할 수는 있다. 사탄으로 번번이 당하내질 못하나 그를 주께 아룀으로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할 수 있다. 이는,

 

사람의 박해에서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법도들을 지키리이다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

(134-135).

 

말씀으로 나를 가르치실 때 나는 주의 구원을 증거하는 삶이 된다. 이는 내가 아니라,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주가 하실 것이다. 이에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13).” 그러할 때에 비로소 나는 나를 위해 울기보다 주를 알지 못하는, 주의 사랑을 등지고 사는 이를 위해 눈물을 흘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

(13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