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19편 -5
97-120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하니
삼상 15:29
주의 말씀대로 나를 붙들어 살게 하시고 내 소망이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
시 119:116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그 안에 주를 진정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이 있다면 그럴 수 없을 텐데. 오늘 사울은 일거에 하나님을 잃는다. 저가 왕으로 세움을 받아 아말렉을 상대한다.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는 명령을 듣는다. 보병 이십만 명과 유다 사람 만 명이 따랐다. 저가 아말렉을 왕 아각을 사로잡고,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긴다.
말씀을 어긴 것이다. 여호와께서 사울 세우신 것을 후회하신다.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이를 듣고 사무엘이 근심한다. 아침에 일찍 갈멜에서 사울을 찾는데, 저는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간 뒤였다.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 말하니 사울은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시치미 뗀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저가 좋은 양과 소를 살린 것을 지적하니 이는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하는 궁색한 변명을 일삼는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 한데 사울은 계속 나름의 변명을 일삼는다.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였”나이다.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 한다. 그럴듯하다.
이때 사무엘의 유명한 말씀,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더는 돌이킬 수 없는 판결이다. 그럼에도 사울은 전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회개하기보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하고 덧붙이기를,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하고 속에 있던 두려움의 근원을 밝힌다. 곧 하나님보다 자신을 따르는 백성들, 저들 앞에서의 공명심을 더 중히 여긴 것이다. 사무엘이 돌아서자 저가 잡고 그러는 와중에 사무엘의 겉옷자락이 찢어진다. 이에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 하고 선언한다.
덧붙여 진리 한 마디,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아, 이 놀라운 진리 앞에 두렵고 떨 줄 아는 것이 신앙이겠다. 그럼에서 사울의 속내는 자신의 범죄를 인정하며 사무엘을 붙드는 속내는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곧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체면과 위신을 좀 살려달라는 소리다. 끝까지 하나님께 대한 회개는 없다. 사무엘이 사울을 대신하여 아말렉 왕 아각을 죽인다. 그때 아각은 이를 모르고 지껄이는 말, “아각이 즐거이 오며 이르되 ‘진실로 사망의 괴로움이 지났도다.” 참으로 가관이다. 사울이나 저나 도무지 상황 파악을 못한다. 그 일 후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보지 아니하였다.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다.
오늘 말씀을 다시 읽으며 구술한 까닭은 첫째, 시작과 끝이 같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을 본다. 바울은 일러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저도 사울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을 테고, 이와 같은 속성이 우리들도 다를 게 없음을 아는 진술이다. 곧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히 3:14).” 그러므로 시작과 끝이 같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인 것이다. 둘째, 그럼에도 하나님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기회를 주시는 것을 본다. 그런데 사울은 본디 자신을 위하는 사람이라, 끝까지 사람들의 시선과 그의 위신을 생각하였다. 성경은 항상 우리가 주 앞에 엎드려 전심으로 자복할 때 주는 미쁘사 모든 것을 용서하신다는 것을 알린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시 32:5-6).
우리에게는 아무리 극한 죄악 중에도 주를 만날 기회가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은 기도다. 자신의 하물을 고하는 자복이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 오늘도 기다리신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사 30:18).”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 그 기회마저 자기변명과 궁색한 논리로 자신을 스스로 변호하기에 바쁘다.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호 5:15).” 하여 고난도 마다하지 않으시는 것인데, 이를 바로 알지를 못한다.
결국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너를 땅에 던져 왕들 앞에 두어 그들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였도다(겔 28:10).” 이 모두는 자처한 일이다. 셋째, 그 행위를 갚으심은 하나님의 공의와 진실된 사랑을 알게 하려 하심이다. 그런데 그게 참 어려운 일인가보다.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렘 17:10-11).” 회개할 수 있는데, 그럴 기회를 옹색하게도 자기변명과 논리로 주장하여 허비하다 기회를 잃는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말씀 앞에 앉아 나의 사울 같은 모습들을 떠올린다. 아닌 척, 아니라고는 하나 그 본심에는 어떤 억울함이 또는 핑계가 늘 한 마음 가득이다. 하나님이 설마 이를 모를까? 넷째, 사울은 결국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머리로만 이해하였다. 우리의 신앙은 이해가 아니라 믿음으로다. 지혜자는 일러,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 그러니 당장에 알 수 없는 것으로 씨름하느니, 눈에 확실한 것-백성들로부터의 존귀와 기대를 더 신경 쓰는 것이다. 진실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그렇게도 불가능에 가깝다.
이해가 아닌 믿음으로 주의 강력한 역사를 본다.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9).” 알게 하셔야 이도 알 수 있는 일이지, 우리가 들어 이해한다고 해서 아는 것은 아니다. 이번에 아내가 없는 한 주간의 생황에서 나는 새삼 서로를 이해한다는 게 머리로가 아니라 몸으로, 실천으로 하는 것임을 깨닫는 중이다. 웃기는 말이지만 어제는 녹초가 되어 가정예배 후 초저녁에 쓰러져 잤다. 아침 일찍 묵상을 하고 장모님 수술 전에 병원으로 달려가 로비에서 손을 잡고 저의 연로함을 두고 주께 기도드렸다. 돌아와 설교 원고를 작성하고 오전이 다 지났다. 점심께 손위처남이 와 식사를 대접하고, 일찍 집으로 가 어제 다 하지 못한 빨래를 돌렸다. 침대 위에 던져둔 마른 옷이 태산을 이뤘다. 공부하는 아들 끼니를 챙기는 일도 보통이 아니다. 결국 딸애의 도시락은 포기했다. 매끼 점심값하라고 비상금 5만원을 주었다. 청소기를 돌리고 설거지를 하고… 집안일이란 말 그대로 표도 안 나면서 끝도 없는 개미지옥 같았다.
이것을 평소 아내가 혼자 다 했으니. 아침 일찍 서울에 가 어머니를 봉양하고, 점심 전에 내려와 식사를 차려 아들을 먹이고, 뒤이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짬짬이 빨래를 하고… 다시 저녁을 차리고, 청소를 하고 잠자리에 들기까지. 이 모든 가사 일이란 게 지옥이었구나. 저 혼자 다 하고 있던 일이었구나 생각하니, 그간 혹독한 일이었다. 그런 걸 저녁에 늘어지면 게으르다고 핀잔을 하기 일쑤였느니!
나는 새삼 회개한다. 깨닫기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도 주를 온전히 섬기는 일도 머리로가 아니고, 말로도 아니라 실제의 실천으로 같이 행하는 일상으로였다. ‘믿음은 행함에 있다’는 야고보의 일갈은 진리였다. 우리가 주를 섬김이란 할 수 있는 삶으로써 해야 하는 일로써 그 믿음을 측량하는 것은 고백이나 모양으로가 아니라 삶으로였다. 고상한 말과 인자한 표정으로가 아니었다. 남이 인정하는 것은 겉으로 보이는 나다. 그 너머 본질적인 내가 아니다.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롬 14:18).” 이는 주가 나를 건지시고 그리 인정해주시는 것이지, 내가 어찌 노력하여 이루는 결과로가 아니었다. 속옷부터 해서 빨래 하나하나를 개고 제자리에 놓고 정돈하는 일도 말 그대로 장난이 아니었다. 밥 한 끼를 차리고 치우고 하는 것도 보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집안 일이란 게 표나지 않게 골병드는 것이었구나, 생각하는 게 많아졌다.
오늘 말씀에서 사울을 보며 평소 나의 품행을 돌아보게 되는 것도 그래서이다. 나는 늘 내가 하는 일이 제일 많은 줄 알고 살았다. 내 몸 하나 건사하는 일에서부터 맡기신 사역을 감당하는 일에까지, 이를 아내가 하는 일과 견주면 상대도 안 된다고 여겨 늘 저를 무시하였다. 또한 곁에 있는 가까운 사람부터, 누가 알아주지 않으면 그게 그렇게 서운하여 저가 몰라서 그러는 것이라 여겨 속으로 변명하며 비난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처럼 엄히 경고하신 거였구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마 23:7-8).” 그러니 나 또한 남에게 보이려고 나와 실제의 다른 내가 위신을 앞세우고, 저들 눈치를 보고, 인정받는데 우선하던 게 사울과 다르지 않다. 결국 죄란 합리화되면 더는 회개할 기회도 잃게 된다. 사울은 끝까지 자신은 옳았다고 여겼다. 상대적으로 다윗은,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32:5).
이를 우선적으로 아는 게 참 신앙의 성도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소리는 백날 해봐야 회개만 미루게 할 뿐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9-10).” 자복하고 회개하는 것만이 주의 은총이 더해지는 통로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
마치 오늘 본문은 나의 실상에 딱 맞춘 것처럼, 들려주시려고 기다리고 있던 것 같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119:97).
그럴 수 있는 게 힘이다. 능력이었고 주가 주시는 권능으로다. 오늘 시편은 주의 말씀을 사랑할수록 더욱 지혜와 명철로 주를 찬송할 수 있음을 알게 한다(97-100). 즉 주신 상황 속에서 때론 미련하고 아둔한 것 같으나 무던함으로 주만 바라게 하는 것, 이는 결국 주의 말씀을 아는 사람만이 그리 행할 수 있는 능력이다(101-104). 그럴 때 그 어떤 역경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말씀만을 사랑함을 토로할 수 있다(105-112). 그럴 때 최후의 날에 주의 심판의 기준을 알게 된다(113-120). 곧 말씀에 대한 경외와 사랑만이 주가 나를 붙들고 계신 것을 말이다.
말씀이 곧 생수다. 인생은 저마다 타는 목마름으로 생을 연장하려 한다. 아흔을 낼모레 두고도 아직 더 살아야 할 이유는 천 개도 넘는다. 가진 게 아무리 많아도 많은 줄 모르는 것은 만족함이 없어서다. 이에 “너희는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신 4:6).” 무엇을 말인가?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잠 2:6-7).” 무엇으로 말인가? 말씀으로다. 앞서 101, 102절을 보면 그 답이 명확해진다.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들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주의 말씀으로다. 말씀으로 주가 나를 가르치신다. 말씀에서 나를 떠나지 않게 하신다. 말씀을 따라 산다는 것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 죄에 대해 민감하고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일이었다. “내 아들아 그들과 함께 길에 다니지 말라 네 발을 금하여 그 길을 밟지 말라(잠 1:15).” 한데 이를 가벼이 여기거나 다른 더 빠르고 좋은 것을 취할 때,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그들의 발을 멈추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받지 아니하고 이제 그들의 죄를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 말라(렘 14:10).” 이는 엄하신 경고이면서 실제의 강퍅한 현실이 된다.
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들이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들을 늘 읊조리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나으며
주의 법도들을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나으니이다
(98-100).
이와 같은 찬송이 내 것이었으면 좋겠다. 하여,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103).
하는 이와 같은 고백이 어찌 아무나의 입에서 나올 소리이겠나?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13).” 이와 같은 분별력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절을 살고 있다. 선악이 혼재되고 악을 악인 줄 모르고 사는 형국이라, 사울과 같이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주의 일(?)도 어디 한둘이던가?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14:2).” 그러니,
주의 법도들로 말미암아
내가 명철하게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104).
미워할 것을 미워할 줄을 알고, 이는 오롯이 말씀이 비추심으로 그 길 따라서 아는 길이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명심할 것은,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105).
어둠을 어두운 줄 알아야 빛을 바란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요 12:35).” 이에,
주의 의로운 규례들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
나의 고난이 매우 심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106-107).
뭘 알아야 바로 바라고, 바로 구할 것인데… 오히려 어찌 된 일인지 이단들은 성경공부에 열중하고, 바른 신앙으로 산다는 자들은 말씀보다 적용만을 원하다보니, 신기하게도 오래 믿고 안다는 사람이 더 바로 알기를 원하지 않는다. 자신은 다 안다는 식으로 들었던 것과 어깨 너머 본 것으로 됐다고 생각한다. 누구에게 성경공부를 같이 하자고 할 때 이는 참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 같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의 도, 성경을 바로 알기는 아는 것일까?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진실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시로다(삼하 22:31).” 안 믿는 자들이 설왕설래하며 하나님이 어찌 이러실 수 있어? 한다면 이해가 가는데, 믿음으로 살았다는 사람이 그런 소릴 할 때면 순간 난감해진다. 오늘 시편은 이에 간구한다.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 입이 드리는 자원제물을 받으시고
주의 공의를 내게 가르치소서
(108).
얼마나 스스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를 섬기며 사는 것일까? 마치 의무방어처럼, 세금 떼이듯 아까운 마음으로 교회를 섬기고 헌물을 드리며 사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면,
나의 생명이 항상 위기에 있사오나
나는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하나이다
(109).
과연 이런 감사와 고백이 그런 상황에서도 나올 수 있을까? 그러니 평생을 믿었다고 큰소리치면서도 누구보다 죽는 것을 두려워하고 실패와 좌절을 견디지 못하며 사는 것은 아닌지. 어떠하든지,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8).” 과연 그럴 수 있나?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7).” 그러므로 우리의 유산은 다른 게 아니다.
악인들이 나를 해하려고 올무를 놓았사오나
나는 주의 법도들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주의 증거들로 내가 영원히
나의 기업을 삼았사오니 이는
내 마음의 즐거움이 됨이니이다
(110-111).
나는 내 아이들을 두고 기도할 때면 이와 같은 우리의 믿음이 자자손손 주님 오실 그날까지 끊어지지 않기를 구하고 또 구한다. 감사하게도 아들은 나와 단 둘이 앉아 가정예배를 드리고 다시 공부하러 간다. 나의 즐거움 중에 그것이 크다. 무뚝뚝하고 예민하여 자식 눈치를 보다가도 ‘예배 드려!’ 하고 아들이 먼저 식탁에 앉으면 그게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다.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신 6:2).” 그러므로
내가 주의 율례들을 영원히 행하려고
내 마음을 기울였나이다
내가 두 마음 품는 자들을 미워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
(112-113).
이는 우리가 가장 지혜롭게 사는 비법이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 4:8).” 나 같이 미천하나, 누군 무슨 일이 생기면 득달 같이 전화하여 기도를 부탁한다. 어쩌다 저의 딸애도 팔이 부러진 모양이다. 아주 당당하게 기도를 요구한다. 우리는 사랑에 빚진 자다. 이와 같은 추심은 얼마든지 받아야 한다. 그러니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여호와는 나의 사랑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방패이시니,
내가 그에게 피하였고 그가
내 백성을 내게 복종하게 하셨나이다
(144:2).
믿음의 확신은 기도로의 당당한 요구와 말씀으로의 거침없는 선포다.
주는 나의 은신처요 방패시라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너희 행악자들이여 나를 떠날지어다
나는 내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리로다
(114-115).
그러니 세상 무서울 게 없다. 여호수아와 같이 당당히 외칠 수 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 또한 천하의 바울도 이를 위하여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14).” 그러할 때,
주의 말씀대로 나를 붙들어 살게 하시고
내 소망이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
나를 붙드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고
주의 율례들에 항상 주의하리이다
주의 율례들에서 떠나는 자는
주께서 다 멸시하셨으니
그들의 속임수는 허무함이니이다
(116-118).
알 만한 사람은 안다. 우리가 왜 주를 온전히 더욱 바라고 사는지. 단지 이 땅의 것이 전부라면 굳이… 그러나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91:14).
이 놀라운 언약이 내 것이다. 하면, 사랑할 줄 알고 두려워할 줄도 안다.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주께서 세상의 모든 악인들을
찌꺼기 같이 버리시니 그러므로
내가 주의 증거들을 사랑하나이다
내 육체가 주를 두려워함으로 떨며
내가 또 주의 심판을 두려워하나이다
(119-12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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