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19편 7
137-160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삼상 17:45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고 주의 판단은 옳으니이다. 주께서 나를 변호하시고 나를 구하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리소서
시 119:137, 154
오늘의 전쟁은 다윗의 이름이 온 지면에 알려지는 계기가 된다. 다윗이 상대할 골리앗은 키가 3m에 57kg의 놋갑옷을 입었고, 그의 칼의 무게만 7kg에 달한다. 그런 이가 ‘싸움을 돋우는 자’로 여호와의 이름의 조롱하고 섰다. 무능하고 겁에 질린 공동체는 무력할 따름이다.
주의 일을 맡은 자로 낙심하지 말고, 부끄러움을 버리고,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말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양심에 따라 서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고후 4:1-2).” 그럴 수 있는 것이 복음의 힘이다. 말씀 곧 하나님의 약속이 가려지면 망하는 자가 될 뿐이다.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3).” 현실과 상황을 놓고서는 스스로 장담할 수가 없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선한 증거’가 있다.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딤전 3:7).” 모두가 올무에 걸렸을 때 다윗은 이 증거를 들고 달려간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45).” 이는 저의 용기나 기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우리 안에 두려움이 사탄에게 빌미가 된다. “곧 그들이 너를 길에서 만나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신 25:18).”
당장의 현실은 어렵고 고약하다. 감정은 쉬 상하고 마음은 금세 낙심하기 일쑤다. 세상에 두렵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나? 걱정이 앞서고 염려가 나를 짓누르기 마련이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히 12:12-13).” 분명히 내 코가 석 자이고, 내 앞가림도 못하는 판국인데도, 우리는 현실 그 이상의 세계를 산다.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민 14:9).” 그걸 어찌 우리 의지나 결의로 마음을 다진다고 될 일이겠나?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7).” 우리에게는 세상이 알 수 없는 비밀 무기가 있다. 믿음으로 나아가는 담대함이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
오늘의 이 모든 세계는 영적전쟁이다. 평화롭고 기쁨이 가득한 것 같지만 그 속에 들끓는 온갖 상념으로 시름하는 영혼의 고달픔이 있다. 겉으로는 멀쩡한 줄 알았는데 그 영혼이 병들거나 잠들었거나 죽어 있는 성도들도 의외로 많다. ‘친절한 타인’으로야 누가 그 속을 알아줄까? 간밤에도 장문의 문자가 들어와 있었다. 누군가의 구설수에, 집 문제에, 직장에서의 고달픈 현실이 한가득 적혀있었고 그때마다 기도를 부탁하는 내용이었다. 우리가 주 안에서 ‘친절한 타인’의 가면을 벗을 때, 서로 토설하며 서슴지 않고 기도 부탁을 할 수 있는 것이 영적인 ‘친밀감’이다.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행 6:4).” 이는 어느 특정한 직업군의 일이 아니다. 목사니까 하는 게 아니다. 성도와 성도 간의 마땅한 일이다.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에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
(138:3).
이는 신앙의 고수가 아니라 기본이다. 하나님이 이를 좋아하시고 기다리시고 이를 영광으로 삼으신다는 사실은 놀랍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145:18).
하면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고 기도하는 일, 누구에게 거리낌 없이 기도 부탁을 하고, 저의 권면을 듣는 일은 소중한 일이다. 서로에게 그런 사람이 된다는 것은 성도의 사명이면서 직분 맡은 자의 의무이기도 하다.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딤후 1:3-4).”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한다는 것, 물론 내가 날 위해 기도하는 것이야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겠으나 누군가를 마음에 두고 저를 생각하며 주께 아뢰는 일.
모두가 떨며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할 때 다윗은 오직 하나, 주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어짐에 분노하였다. 저의 형제들도 심지어 적병도 저의 몰골을 조롱하고 깔보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때 저는 하나님만 보았다. “그 블레셋 사람이 또 이르되 내가 오늘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하였으니 사람을 보내어 나와 더불어 싸우게 하라 한지라(10).” 이는 하나님을 업신여김이다.
누구에게 기도를 부탁하다, 저들 사정도 뻔한데… 하는 식의 태도는 저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경멸이다.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보지 않으시는데 사람은 외모로 보고 판단한다. 스스로 복을 터는 일이다… 기도문이 막히고, 성도의 교제가 끊기는 덴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들이 이런 일을 당할 것은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백성에 대하여 교만하여졌음이라(습 2:10).” 스스로 보기에 저는 좀,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것이다. 어린 소년 다윗이 여호와의 이름을 들먹거리며 자신이 상대하겠다고 할 때 드는 심정처럼! 그러니 가만히 보면 저가 그럴 만도하다. 스스로 판단하여 가린다. 뭔가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교회도 좀 그럴듯한데 기웃거리며 그런 데 목사가 좀 더 영적으로 나은 것 같기도 하니까. 늘 열심인데 왜 저렇게 항상 힘든가 하고 자세히 봤더니 저의 선입견과 판단이 저로 가로막는 벽이었다. 막힌 담이 정작 자신의 기도를 막아 엉뚱한 데로 흐르게 하고 남을 위한 기도는 찾을 길이 없다. 성도의 기도를 마다하기 때문이다.
왜들 그렇게 큰 교회를 선호하는지 잘 안다. 내심 자신들의 속내는 감추고 ‘친절한 타인’으로 적당한 선에서의 교제는 선거철만 되면 울려대는 확성기의 온갖 약속들 같다. 분명한 사실 하나, 하나님은 저들 속에 계시지 않는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14:4-5).
나름 열심은 다하나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함은 신앙도 무슨 도리인 줄 알기 때문이다. 자신이 할 도리를 다하는 것으로 주를 자신이 믿는 줄로 여기는 것이다. 골리앗이 앞에서 하나님을 모욕하고 주의 성민을 괄시하는데도 주눅 들어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는 것이 오늘 저들의 형편이었다. 다윗이 열 받는 것은 따로 있었다. “다윗이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거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26).” 그리고 나선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그로 말미암아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 하니(32).” 하지만 저들의 눈에 가소롭기 그지없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울 수 없으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33).”
저들이 왜 두려워하는지, 무엇을 두고 주저하는지 얼른 짐작이 간다. 실제 우리 생활이 그렇다. 누구의 이런저런 사연이 아니라, 나의 일상도 다르지 않다. 얼른 달려와 나를 쥐고 흔드는 게 그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니…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출 23:25, 마 6:33).” 우리 스스로 먼저와 나중을 바로 분별하지 못하면 낭패다. 다윗의 담대함은 오직 하나,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주께서는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그들을 멸하소서
(54:4-5)
하여 저는 달려 나간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45).” 오늘 말씀 앞에 질투도 생기고 조바심도 인다. 내게도 이와 같은 확신으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었으면 좋겠다. 다만 이를 위해 준비하고 예비함으로 다시 하루를 시작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2:21).” 주어진 상황과 그 여건 속에서 “너는 재판을 굽게 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신 16:19).” 자칫 우리의 의식과 판단이 세상의 것과 다를 게 없이 흘러갈 수도 있다.
이것 때문에도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29).” 나로 약한 가운데 두심은 주의 강하심과 주의 성실하심을 누구보다 절실하고 간절하게 바라고 구하게 하려 하심이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10).” 나는 이 놀라운 역동성을 사랑한다. 이는 믿는 자만의 것이다.
세상 아무리 뒤져봐야 그때뿐이다. “내가 본즉 한 사람도 없으며 내가 물어도 그들 가운데에 한 말도 대답할 조언자가 없도다 보라 그들은 다 헛되며 그들의 행사는 허무하며 그들이 부어 만든 우상들은 바람이요 공허한 것뿐이니라(사 41:29-30).” 그런 걸 그저 남들처럼 사는 게 행복의 전부인 줄 알고, 누가 알까 하여 자신의 부끄러움은 감춘 채, 그래서야 어디 성도의 교제가 온전하겠으며 서로를 위한 기도가 나오기나 하겠나? 제 앞가림이나 잘 하고 살라는 충고는 사탄이 고안한 아주 탁월한 명언, ‘네 자신을 알라.’ 하는 소리다.
우린 주의 이름을 가지고 나간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크심과 주의 권능을 주의 종에게 나타내시기를 시작하셨사오니, 천지간에 어떤 신이 능히 주께서 행하신 일 곧 주의 큰 능력으로 행하신 일 같이 행할 수 있으리이까?” 하고 우린 되레 하나님께 반문하며 달려간다(신 3:24). 이와 같은 담대함이 우리에겐 가능하다. 다윗은 대체 뭘 믿고 저리 당당할 수 있었을까? 이는 ‘하나님의 이름’ 때문이었다. 우리도 다르지 않다.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롬 14:18).”
저의 승리로 덩달아 우쭐하며 어깨가 으쓱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다윗의 승리로 나도 기뻐한다. 가령 손흥민의 득점 골이 우리 국민들을 열광하게 하는 것처럼, 같은 민족이고 우리는 같이 주의 자녀이니까! 나 같은 게 뭐라고 미주알고주알 저는 저의 속내를 이야기를 말하며 기도를 부탁하겠나? 부끄러움이 왜 안 들겠나? 한데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닌 것은 그게 나에게 하는 소리면 민망하고 부끄러울 일이지만 우리는 같이 주 앞에 서는 신부들이다. 백성들이고 주의 자녀들이다. 같이 기뻐하고 같이 슬퍼하면서 같이 씨름하는 가족인 것이다. 나는 당연히 저의 하나님을 사랑한다. 함께 기도하기를 나의 아버지 하나님이 저의 하나님이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주가 그 모든 일을 통해 하나님의 강하심은 물론 선하시고 인자하심을 보여주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약 2:22).”
오늘 시편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고
주의 판단은 옳으니이다
(119:137).
더 무얼 말할 수 있겠나? 그런 이가,
주께서 나를 변호하시고
나를 구하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리소서
(154).
그리 아뢰고 고할 수 있는 힘, 세상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심지어 나의 몰골이 말이 아니라 해도,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빌 1:14).” 곧 나의 연약함이 도리어 누구에게 용기가 되고 주를 찾는데 길라잡이가 될 수 있다면….
주께서 명령하신 증거들은 의롭고
지극히 성실하니이다
내 대적들이 주의 말씀을 잊어버렸으므로
내 열정이 나를 삼켰나이다
(138-139).
솔직히 나는 어느 정도 진심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나의 약함에서 감사를 붙든다. 주를 신뢰하고 의지하는 힘을 얻는다. 나를 오늘의 나로 세우지 않으셨다면 내가 이처럼 죽기 살기로 말씀만을 붙들고 섰을까? 농담처럼 누구에게도 말하길, 내가 아는 나라도 뭐라도 하겠다고 여기저기 들쑤시며 내가 하려 할 거였는데, 하나님은 나를 꼼짝 못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증인이 되게 하신다. 오히려 그러하여,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69:9).
여호와여 내가 주를 미워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아니하오며
주를 치러 일어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아니하나이까
내가 그들을 심히 미워하니
그들은 나의 원수들이니이다
(139:21-22).
하여 더는 누구를 멀리하고 누구를 더욱 사랑하게 되는 것인데, 그 기준은 오직 하나다.
주의 말씀이 심히 순수하므로
주의 종이 이를 사랑하나이다
(119:140).
누가 말씀을 사모하며 말씀으로 가까이 하면 이제는 그게 그렇게 반갑고 참 좋다. 예전처럼 같이 놀자고 가까이 오면 주춤, 저를 경계하게 된다. 가장 ‘절친’이었던 누가 이른 퇴직을 하고 어디 새로운 자리를 구하느라 마음이 어려운가보다. 언제 포구쪽으로 와서 소주 한 잔 하자는 것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 사이는 저에게 많다. 누구는 어렵게 가정사를 말하고, 이를 기도하는 데 있어 ‘어떤 감사함’이 왜 자신에게는 없는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신앙’을 두고 답답해한다. 너무 극단적인 예이기는 하나 나는 저 둘을 두고 어느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 함께 아파하는지 확실하였다.
내가 미천하여 멸시를 당하나
주의 법도를 잊지 아니하였나이다
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율법은 진리로소이다
(141-142).
이를 알 때, 알면 알수록 그야말로 무엇이 더 중한지를 알겠다. “내가 내 공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 내 마음이 나의 생애를 비웃지 아니하리라(욥 27:6).” 남들은 가소롭게 여기고 하찮게 본다 해도,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롬 4:19-21).” 아브라함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우리 앞에 불가능은 없다. 아니 있어도 그만이다.
환난과 우환이 내게 미쳤으나
주의 계명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
주의 증거들은 영원히 의로우시니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사 살게 하소서
(143-144).
하면 우린 이제 무엇으로 사는지, “그러므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이 말을 하였은즉 볼지어다 내가 네 입에 있는 나의 말을 불이 되게 하고 이 백성을 나무가 되게 하여 불사르리라(렘 5:14).” 그렇다면 더더욱…
여호와여 내가 전심으로 부르짖었사오니
내게 응답하소서 내가 주의 교훈들을 지키리이다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의 증거들을 지키리이다
(146-147).
말씀이 어디를 응시하는지 뚜렷하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63:1, 73:25).
하나같이 주를 가리키는 말씀을 두고 엉뚱한 곳을 만지작거리며 놓지를 못하고 있으니,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
(119:147-148).
내가 이 새벽을 사랑하는 이유는 하나다.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내 소리를 들으소서
여호와여 주의 규례들을 따라 나를 살리소서
(149).
내가 살 길이 여기에 있다. 나로 살아가게 하시고, 살 곳에서의 삶을 예비하게 하며, 함께 살고자 하는 이들을 두고 생각하게 하심은,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려 하심이었다. 분명히 그리 말씀하셨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하면 더 무엇을 따로 붙들 것인지!
주께서 나를 변호하시고 나를 구하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리소서
(154).
주께서 하시고 주가 살리신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 말도 안 될 것 같은 현실에서 말씀이 그렇다는 말씀으로 나는 다만 든든하였다. 반드시…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51:1).
세상에서 용서 받지 못할 죄를 저질렀다 해도 하나님 앞에 당당히 고하고 구하고 바라는 것이 나의 특권이다. 왜?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렸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사 54:8).”
주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는
거짓된 자들을 내가 보고 슬퍼하였나이다
내가 주의 법도들을 사랑함을 보옵소서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살리소서
(158-159).
다만 주를 사랑함은 주의 말씀 가운데 거함으로, 묵묵히 맡기신 날들을 다하는 것이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렘 15:16).” 그것이면 됐다. 다른 데 한눈 팔 것 없다.
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이오니
주의 의로운 모든 규례들은 영원하리이다
(16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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