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주여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주도 살아 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복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삼상 25:26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 126:5-6
마온에 사는 갈멜 족속의 나발에 관한 내용이 사무엘의 죽음 뒤에 이어져 나온다. 마지막 사사로 사무엘이 죽어 라마에서 백성들이 애도하고 장사하였다. 이어 나발의 소개와 함께 그의 아내 아비가일에 대한 묘사가 이어진다. 나발은 완고하고 악하였다. 하지만 그의 아내 아비가일은 현명한 여자였다. 다윗은 사람을 보내 정중히 나발에게 식량을 구한다(4-8). 나발은 술에 취해 다윗을 멸시하고 거절한다(12-13). 아비가일이 그 내용을 듣고 급히 서둘려 다윗을 찾아간다(14-22). 곧 다윗이 나발을 쳐 보복할 거였다. 아비가일이 다윗을 만나 지혜로운 말로 저를 진정시키고(23-31), 다윗은 이에 직접 보복하려던 계획을 접는다(32-35). 결국 하나님이 나발을 죽이시고(36-38), 나발이 죽자 그의 아내 아비가일을 아내로 맞이한다(39-40).
이야기 속에서 우리의 영적 무감각함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를 새삼 느낀다. 36절에서 아비가일이 나발에게 돌아와 저의 상태를 보고 기다리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나발은 ‘왕의 잔치와 같은 잔치’를 배설하고 크게 취하여 마음에 기뻐하고 있었다. 그러니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삶에서 그 한 날의 방심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일러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 21:34).” 언제 어떤 위기가 임할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예수님은 앞서 심판 받는 자들의 특징을 먹고 마시는 데 있음을 알리셨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12:19).” 당장 그 앞일을 알지 못하면서, 이는 마치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17:26).” 그때도 그러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27).” 시집가고 장가드는 게 문제가 아니다. 그 일에 방심하는 것이 문제다.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28).” 먹고 마시고 집 짓고 사는 게 문제가 아니다. 그러느라 방심하는 것이다.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29).”
오늘 날도 같아서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30).” 곧 우리도 나발과 같이 하루만 사는 것처럼 거드름을 떤다. 누가 자기 몸을 돌보는 일을 두고도 인생 다 한 번 죽지 뭐, 하는 말로 호기로운 소릴 하여 뭐라 하였다. 닥치기 전에는 함부로 저마다 그런다. 그러다 오늘 나발의 꼴이 된다. “아침에 나발이 포도주에서 깬 후에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 일을 말하매 그가 낙담하여 몸이 돌과 같이 되었더니, 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삼상 25:37-38).” 그처럼 천년만년 살 것처럼 굴더니, 함부로 그러는 거 아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4).” 어쩌면 우린 늘 긴장 상태로 사는 게 마땅하다. 인생은 전쟁이고 현실은 지옥 같은 전쟁터다. 가끔 누구를 생각하면 마음이 안 좋은 게, 녀석은 뭐라 하면 콧노래를 부르듯 그렇게 살다 죽죠, 뭐! 하고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일 있으면 하고 없으면 말고, 늘어지게 자다 해가 저물 때나 일어난다. 나이 서른이 되기 전에 그럼 대학은 고사하고 자격증이라도 좀 따라, 요즘은 제도가 다양해서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많다며 몇 군데 알려줘도 허사다. 그렇게 또 얼마나 지나서야 잠시라도 주를 찾을까? 우리에게 환난과 불황이 비극적인 것만은 결코 아니다.
우리로 돌아보아 숨겨진 죄를 노출시킨다.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자신을 정결케 할 수 있는 기회이다. 욥의 경우 저가 당대 의인이라 하나, 저가 살던 우스 땅으로 묵상하면 죄의 온상이었다. 물론 그런 데서 주를 경외하며 살았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가능하나 그런 곳에서 부유한 거부로 살았다는 데서는 깊이 살펴볼 문제이기도 하다. 우스는 아라비아 서쪽 사막에 있는 에돔의 한 성이었다. 훗날 저의 고백 중에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하는 신앙고백과 함께 뒤이어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 하는 회개의 고백이 이어진다.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즉 거부로 부유하게 살면서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에 대해 저는 나름 심각하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엡 4:17).” 스스로 괜찮다, 옳다 하고 여기며 사는 게 의외로 많다. 아무렇지 않게 묻어가고 묻혀 언제 그랬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것들이다. 이를 들추고 뒤엎는 것이 고난이다. 평소 아무렇지 않았던 것들에 대한 감사가 저절로 나온다. 건강할 때야 누가 알겠나? 한데 어느 작은 고통으로도 평소 무시하였던 감사가 저절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저들, 안 믿는 자들과의 다른 점은 엄연하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 1:1).” 하는 소개에 뒤이어, 환난이 닥쳤을 때,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저는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21-22).” 그러나 이어지는 저와 친구들의 논쟁에서 저 스스로의 변호는 두루뭉수리하게 인정하던 때와는 사뭇 달랐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 119:67, 71).
감히 고난의 유익을 거론하기에는 두려움이 앞서지만 어렵고 힘들어야 비로소 평소의 그릇된 습관과 잘못된 과소비, 과시, 과욕, 무모하였던 과감함의 허울을 벗게 된다. 누구와도 몇 번 통화하다 더는 뭐라 이를 수 없는 게 당장은 와 닿지 않는 현실 때문이었다. 그런 걸 볼 때면 우리의 적당하다는 것이 얼마나 우리 영혼을 좀 먹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이런 소리가 다소 무리하다는 것을 알지만, 내가 힘들어야 힘든 이들을 위한 마음도 생긴다. 특히 목사가 되고, 나는 한동안 내가 안고 있는 고통을 없애주시길 놓고 기도하였는데 하나님은 그것으로 한 영혼을 이해하고 위로하고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삼으셨다. 즉 내가 적당할 때 별로 누구를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이의 하소연이 크게 들리지 않는다. 그런가보다 하고 만다. 하나님은 그럴 때면 내가 먼저 환난을 알게 하신다. 기도하게 하려고, 나아가 누구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하시려고, 주님의 마음과 권능을 담아주시는 게 고난이라는 바구니였다.
언제 통계로 보았는데, 성탄절을 전후하여 구세군 모금함의 금액이 강남보다 강북이, 강남에서는 뭉칫돈이 평균 모금액수를 끌어갔지만 강북에서는 고만고만한 금액들이 평균금액을 유지한다는 것을 보았다. 그러니까 실제 어려운 사람들이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다는 소리다. 우리 영혼의 문제도 같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8-9).” 다들 생각하기는, 왠지 있을 때 더 많이 헌금할 것 같고, 여유가 좀 더 날 때 더 많이 헌신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롬 8:2).”
그러니 참 환난이란 희한한 것이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4).” 환난이 우리로 부족함이 없게 한다? 차라리 저의 적당함마저 아쉬울 때가 더 낫다 여겨지는 것은 그래서이다. 타협은 은연중에 영혼을 무디게 한다. 그럴 수 있지, 하고 받아들인다. 더 큰 것을 요구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결국 그대로 안주한다. 우리의 생사화복이 주의 손에 달렸다는 것을 잊게 한다. 하나님께 더 이상 영광을 돌리지 않을 때, 가차 없이 사탄은 그 틈을 놓치지 않는다.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행 12:23).”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섬김을 요구하시고 영광을 받으신다.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17:25).” 그러니 오늘이라 일컫는 날에 방심하여, 마치 자신이 알아서 할 수 있을 것처럼 굴 때가 우리에게 있어 '나발의 때'이다. 아무리 그래도 아비가일은 아비가일이었다. 저를 보며, 현실에 물들지 않는 경건이 새삼 소중하게 여겨진다. 아무리 세상이 어떻다 해도,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삼상 2:6-7).”
이를 인정하는 것이 여유로움에서가 아니라,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다. 환난은 우리로 깨어나게 한다. 잠들어 있는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 고난이다. “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히 13:3).” 전엔 알지 못했다. 그때도 글방 아이들 가운데는 그 영혼이 굶주려서 신음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때는 그저 아이의 정신 상태가 글러먹어서 그렇다고 치부하며 저의 부모에게 알려 그만두게 하였다. 내가 저를 돌아볼 마음이 없었다. 유난히 자기 것을 잘 주고, 잘 사오던 아이가 있었는데 나는 그 애가 왕따였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찌 다가갈 마음이 없었다. 어떤 애는 유난히 자기 아빠를 자랑하고 뭔가 새로운 게 있으면 아빠가 주었다고 뽐내곤 하였는데, 실은 그 아빠의 폭력적인 언사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였다. 심지어 어느 엄마는 아이의 폭식에 이어 거식증이 왔을 때,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리며 도움을 구했으나 나는 심드렁하다, 아이가 말을 듣지 않는다며 외면하였다.
내 안에는 내가 겪었던 응어리들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내가 낙천적으로 또는 긍정적인 생활 태도로 잘 견디고 이겨냈다고 자부하였던 것 같다. 하나님은 우울증으로 나를 치시는가, 하더니 한동안 자살충동에 시달리게 하시다 급기야는 모든 것을 털어 가시면서 두 손 들고 돌아오게 하셨다. 오늘의 나로 때론 궁벽하고 어려운 살림으로, 때로는 병약한 힘든 육신으로 신음하다 그 은혜의 열쇠를 알게 되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기어이 다 털리는 것도 복이다! 우리 영혼을 깨워 잠든 영혼들을 일깨우게 한다.
또한 이 끔찍한 환난으로 기쁨의 참 뿌리를 옮기시기도 한다. 그 전에는 돈에 뿌리를 내리고, 남들의 이목과 자랑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던 기쁨인데 그것이 헛된 것을 고통 중에서나 알게 된다. 즉 주께로 집중할 수 있는 터전으로 우리 영혼의 뿌리를 옮기신다. 성경은 일러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7-8).” 그들이 누구인가? 전의 나였다.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6).” 나는 헛된 말을 즐겼고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며 속이는 일에 능하였다. 이상하지? 불순종의 아들들은 서로의 죄에 관대하다.
결국 하나님은 치심으로 살리신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7).” 곧 오늘 본문에서도 아비가일을 알아보게 된 것은 나발의 어리석음과 오만방자함으로였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시 126:1).
오늘 시편의 첫 구절을 아비가일로 연상하게 되고, 우리 안의 아비가일을 일깨우는 소리로 들린다. 우리는 얼마나 오랜 시간을 죄의 타성에 젖어 포로 된 채 살았던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적당히 타협하고, 그러려니 하며 방심하며 살기를 얼마 동안이나 했던 것일까? 하나님은 어려움을 우리를 돌이켜 주의 영광을 바라보게 하시는데, 사탄은 그 뒤를 따라가며 적당함으로 자꾸 괜찮다고 속삭인다. 기껏 정신 차리고 주의 사명자로 살려 했던 것인데, 도로아미타불을 만들곤 하는 것이… 아이 때문에… 그래도 살아야지… 이만하면 됐지 뭐… 하는 자기합리화를 뿌려댄다. 가라지나 이삭이나 푸르게 잘 자라는 것 같으니까 됐다 싶다.
아, 내가 거기 포로로 잡혀 있었구나! 하고 알려주는 것은 고통이다. 어려움이 아니면 우리는 진지하게 자신을 돌아볼 수 없다. 그러니 인생을 살면서 등 비빌 데가 있다는 게 무조건 좋은 게 아니다. 그것으로 영혼은 다 거덜 난다.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하는데,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24-25).” 소망이란 게 굳이 바랄 게 없는데 뭘 그리 간절할 게 있겠나? 매였다 해방되면 안다. 나발의 아내로 살던 아비가일의 시절은 어떠했을까? 저가 비로소 다윗의 아내로, 주를 경외하는 자의 자유인이 되면서 얼마나 그 혀에 찬송이 넘쳐났을까?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2-3).
내가 죄에서 놓여났을 때, 더는 사람들의 관계에서 그들의 시선에서 놓여났을 때, 더는 어떤 책임이나 의무감에서 놓여났을 때, 여호와의 큰 일, 곧 우리로 고통 중에도 주를 바라게 하심이 그와 같은 포로에서 건져내시는 것으로 알게 되었다. 부모로서 내가 자식을 책임지는 게 아니었고, 내 삶의 주체로 내가 어떻게든 잘 살아봐야 하는 책임과 의무에 짓눌려 살아야 하는 종이 아니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인정 받는 사람이 되려는 데서의 해방됨이란,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81:10-11).
더는 세상에 속한 백성이 아니다. 더는 그런 사람으로 살고 싶지 않다. 여전히 세상을 바라고 주를 뒤로 하고 살기를 바라는 마음과의 싸움에서 나는 실실 웃기도 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이미 다 이긴 싸움이다. 내가 승리해야 하는 인생이 아니다. 우리로 정신 차리게 하는 것은 나발이 죽어야 한다. 나발이 죽으려면 환난이 적합하다. 바울은 환난도 기뻐한다고 하더니, “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3-4).” 그래서 나의 진정한 아비가일은 비로소 해방되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 이미 받은 구원을 두고 죽어라 하고 구원 받으려 애쓰며 사는 꼴이었다니! 종종 되새기면 또한 누구에게 들려주는 말이 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나의 나발스러움이 더는 돌이킬 수 없는 때가 곧 올 것이라는 경고를 알려야 한다. 다윗이 사백명의 군사를 이끌고 올라온다. 곧 예수 재림이 임박하시다. 언제 나의 환난이 죽음의 목전에다 세울지 모른다. 그때에는 슬피 울고 이를 갈며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이 땅에서의 환난과 고난이 복인 것은, 돌이켜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기회가 아직은 있어서이다. 곧 우리에게 두시는 환난으로 우리는 우리 곁의 안 믿는 영혼에게 이와 같은 사실을 알릴 기회를 제공한다. 하나님이 지금 두신 그 자리에서,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
(4).
저들을 놓고 기도한다. 기회가 닿을 때면 전한다. 내가 어려울 때 어려워하는 영혼의 신음소리가 크게 들린다. 내가 아프고 힘들 때 아프고 힘들었을 저이들의 고통이 눈물겹다. 이를 두고 주께 아뢰며 저로 나의 곁에 머물게 하시는 이유를 알게 된다. 이는 주님이 날 위해 기도하신 것과 같다.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23).” 이를 잃으면 다시 찾기까지 어렵다. 참으로 너무 먼 길을 돌아야 한다. 종종 나의 경험으로도, 나는 10년씩 훅훅 그 세월이 지나갔다. 여전한 ‘나발’로 살기를 원했다. 그렇게 87학번에서 97학번으로, 97학번에서 다시 09학번으로! 지금 와 생각하면, 주의 긍휼하심이 너무 크고 극진하시다. 어찌 그런 나를 참고 또 참으셨을까? 이제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5).” 이와 같은 말씀이 너무 두렵다.
하여 이제는 마다하지 않는다. 더는 뒤로 물러나 다른 길로 돌아가지 않기를, 하여 나의 한 가지 소원… 나의 남은 생애가 부디 주만 바라며 주의 길로만 가게 하시기를.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호 10:12).” 이 모든 걸 주가 이루시는 것을 이제는 안다. 알면 알수록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기를 위해 기도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이를 오늘 시편에서 간결하고 간절하게 알리며 찬송하고 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5).
이를 찬양한다. 우리의 인내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을. 믿음의 열매로 보답하실 것을.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롬 2:7-8).” 그러므로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약 5:11).” 그러므로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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