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전봉석 2022. 6. 2. 05:23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에게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하니라

삼상 23:16-17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시 124:8

 

 

앞장에서 도엑이 아히멜렉을 고발하고 사울의 명령으로 놉 땅의 제사장들을 85명 학살하는 사건이 있었다(삼상 22:6-23). 이에 오늘 본문은 그일라 거민을 구원하는 사건과 사울에게 쫓길 때에 요나단의 위로와 격려를 들을 수 있다. 그일라는 블레셋과의 접경지역이다. 저들의 내분을 틈 타 블레셋이 그일라를 습격하였다. 다윗은 매번 주께 묻고 행한다.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곧 저의 행함에는 항상 그 지침이 주께 묻고 주의 답을 듣는 것으로 행하는 것을 볼 수 있다(23:2, 4).

 

다윗을 찾고자 하여,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내분이 일자 블레셋은 그일라를 친다. 서로의 다툼이 빌미가 되고 공격의 대상이 되게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우린 힘써 지켜야 한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2-3).” 그 틈을 노리는 사탄은 언제든 엿본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27).” 서로가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는다는 것,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빌 4:2).” 이에 오늘 요나단과 같은 친구가 곁에 있으면 이보다 복된 일은 없다.

 

때는 부친 사울이 죽이려는 다윗이다. 저는 목숨을 다해 쫓기고 있었고 이에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곧 저의 곤경에 빠진 그 상황에까지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른다. “그에게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요나단의 우정이 참으로 귀하고 아름답다.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며, 왕권을 두고 시기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다(삼상 23:16-17). 저의 이런 구력은 주를 경외함으로 우러나는 것이었다.

 

곤경에 처한 형제를 외면하지 않는 다윗이나 이를 사랑함으로 격려하고 위로하여 새 힘을 더하는 요나단이나… 두 사람의 우정이 참으로 귀하고 아름답다. 이는 성경의 이치로써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 이를 실천하는 삶이었고, 그 기준은 언제나 하나님으로였다. “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 바 되어(1:24).” 누구를 주의 제자로 삼을지를 묻는다. 이에,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시 25:5).

 

곧 하나님을 의뢰하는 데는 사람의 계산이 무의미하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 19:26).” 이에 우리는 무슨 말에나 행함에 있어 주께 묻고 아뢰는 습관과 이를 기준할 진리가 필요하다. 나는 묵상글을 쓰거나 설교문을 작성할 때 성경을 기준으로 여러 곳을 인용하여 근거로 삼는다. 아니, 그 말씀을 기준으로 말씀에서 말씀으로 이끌어가려 애쓴다. 누구와의 대화나 상담에서도 순간적인 판단과 이해가 필요할 때, 그때마다 말씀을 염두에 두려한다. 말씀이 기준이 되지 않으면 그때마다 흔들리기 십상이다.

 

말이 그렇지 현실은 다르다. 어떻게 말씀대로 사나? 하는 게 그 첫 번째 드는 의문이고, 그럴 때 현실적으로 우리의 계산은 답이 안 나오는 게 두 번째 문제이다. 모세도 암담하기는 마찬가지였던가 보다. “모세가 이르되 나와 함께 있는 이 백성의 보행자가 육십만 명이온데 주의 말씀이 한 달 동안 고기를 주어 먹게 하겠다 하시오니 그들을 위하여 양 떼와 소 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민 11:21-22).” 성경을 곧이곧대로 받고 이를 삶으로 적용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엄청난 제약이 따른다.

 

그럼에도 성경은 일러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오늘 다윗은 그때마다 주께 묻는다. 하나님의 명령은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 것 같을 때가 너무 많다. 그럼에도 주의 말씀을 따르면, 이는 현실을 고려하지 않음이 아니요 현실을 능가하고 계셨음을 알게 된다. 곧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21).”

 

하여 성경은 우리의 기준이고 지침이다. 주께 묻고 아뢰어 말씀으로 응답을 찾는 일은 성도의 기본이다. 특히 묵상글을 쓸 때나 더욱이 설교문을 작성할 때면, 쓰기보다 다시 읽기가 수차례다. 그때마다 오타나 오문은 또 어찌 그리 눈에 띄는지. 새벽에 쓰고 다시 본다. 교회로 나가 먼저 하는 일이 다시 묵상글을 읽는다. 어느 부분은 상당 부분 지워진다. 특히 나의 멋진 표현이나 그럴듯한 문장들이 버려질 때면 아쉽기도 하다. 진리에 대해, 복음을 말할 때 성경을 근거로 확신이 없을 때는 지운다. 글을 쓰는 사람들의 가장 큰 유혹은 ‘자기만의 문장’이다. 또는 ‘개인적인 경험’도 한몫을 한다. 특히 요즘처럼 공개적인 말과 글의 세상에서는 이를 관리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를 알면서 나는 모든 SNS 계정을 없앴다. 그때마다 즉흥적으로 답이 오고 답을 해야 하는 공간에서 신중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이처럼 개인 블러그 하나에 원고 저장을 위해서도 글을 올릴 때, 누가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달면 나는 긴장한다. 다시 또 읽으며 행여 그릇된 말이나 주장이 없는가 하고 살핀다.

 

유익한 점은 언제 어디서나 다시 읽고 되풀이 하여 묵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병원에서나 누구를 한 시간 이상 기다리는 것에 큰 어려움이 없다. 페이스북이니 트윗, 이메일은 모두 끊거나 사용하지 않는다. 나는 나로 ‘주목 받는 생’이기를 원하지 않게 되었다. 이 말은 글을 쓰는 사람이면 단박에 이해가 간다. 누가 내 글을 읽는다는 것, 저의 인정을 받고 공감을 얻는데 작가들은 얼마나 예민해지는지… 나 또한 그렇게 주목 받는 생이고 싶었고, 작가로서 모든 이의 공감을 얻는 삶이되기를 꿈꾸며 살았다. 실력을 떠나 이는 특히 글을 쓰는 사람이면 누구나 겪는 진통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내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진리,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이것은 세례 요한의 놀라운 입장처럼,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마 3:3).” 하는 것을 오늘 나의 기준으로 삼으려고 한다. 나는 없고 주의 말씀만이 기억되기를. 그러기에는 ‘외치는 자의 소리’로 족하였던 것이다. 저들로 나를 따르라, 나를 기억하고 기념하라 해서는 곤란한 일이다. 이를 오늘 우리의 사명이라 여긴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사 40:3).”

 

한다고 한 일을 두고, 누가 알아주지 않으면… 교회 안에서도 이는 실족이 되고 마음을 상하게 한다. 어쩌면 인지상정이다. 내가 어떻게 했는데, 저를 위해 얼마나 애썼는데… 하는 자기 공로를 입에 물고 있으면 주의 말씀을 삼킬 수가 없다. 나는 점점 그게 두려웠고, 누가 물으면 절대 나는 내가 기억되는 일은 없었으면 하고 바란다. 다만 ‘광야의 소리’로 주의 뜻이, 저의 복음이 전달되고 증거되는 것으로 족하다. 소리는 흩어지고 말한 이만 남는다면 이는 실패다. 설교 말씀은 기억에 없고 목사의 말투나 인격, 저의 남다른 경험이니 이력 따위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면 실패다. 설교가 끝나고 예화만 남는 설교는 허망하다. 그래서도 나는 언제부턴가 ‘고작’ 개인적인 묵상글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해도, 다시 읽을 때면 지우고 또 버리기를 여러 번이다. 아침에 쓴 글을 그 하루, 열 번 이상은 읽으면서 고치는 것 같다.

 

이처럼 없어도 되는 말을 길게 한 것은, 성경으로 생각을 뒷받침할 구절이 없으면 그 생각은 아무리 옳다 해도 잠시 보류해야 한다. 경험으로나 남들 지지로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성경으로 그 일을 추구하는 데 있어 미심쩍으면 그 일도 고려하거나 폐지해야 한다. 말씀으로 꺼려지는 것에는 계산도 말아야 한다. 그에 따른 손익계산은 벌써 그릇 행하게 한다. 나는 오늘 요나단의 위로와 격려에서 저의 사랑과 우정의 근간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았다. 이처럼 성경은 매우 예리한 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이와 같은 말씀이 좋고 좋기만 하겠나?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다.’ 그저 내가 읽고 감상하고 개인적인 독서법에 따라 적용하면 되는 게 아니다.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다.’ 곧 말씀이 나를 베고 자르고 다듬고 쓸모 없는 것을 쳐서 새로 소성케 하신다. 무엇을? 나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나는 이 말씀이 두렵고 때론 아프다. 말씀대로 살 수가 없다. 욱, 하고 치밀 땐 감정대로 하고 싶다. 광야에 흩어지는 소리? 나는 내 뜻이 그러기를 원하지 않는다. 한동안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뭐라 할 때면, 내 말이 우습냐? 어디에 흘리고 올 거면 그만둬! 하며 다그칠 때도 있었다. 나는 내가 나로 기억되기를 바랐다. 한데 말씀은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신다.’ 꼭꼭 숨기고 아무도 모르게 살았는데, 말씀은 자꾸 후벼 파고 드러내어 직면하게 한다. 나는 귀하다는데 말씀은 쓸모없다고 하고, 나는 쓸모없다는데 말씀은 귀하다고 하시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게 만든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날 것이다.’ 곧 말씀으로 나의 영혼은 난도질당하듯 해부되고 사라지고 새로워진다.

 

말씀이라 해도 이를 언제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고전 14:29-30).” 다시 오늘 본문에서 예를 들면, 요나단이 지금 제 정신인가? 부친과 수많은 군사가 다윗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수풀 가운데 모였다. 그 와중에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에게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하였>다(삼상 23:16).” 그리고 이른다.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하니라(17).”

 

흔히 보는 인간사 그 사욕으로 비추면 다윗은 요나단의 정적이다. 자신의 다음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다. 한데 저에게는 그 기준이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이었다. 하나님의 뜻, 그 말씀이 무엇을 향하시는지 저는 바로 알았다. 이처럼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0-22).” 헤아려야 한다. 임의로 생각하고 해석하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느낌으로 읽고 듣는 게 아니다. 그때의 형평과 사정을 고려해서 봐야 하는 것도 아니다. 현실적으로 맞네, 안 맞네, 하는 판단보다 불경한 독해도 없다. 헤아려야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를 돕기 위해 주석을 찾고 성경 프로그램을 깔고 언뜻 떠오르는 다른 구절의 말씀을 찾는다. 틈나는 대로 누구의 설교를 동영상으로 본다. 설교문을 읽거나 어떤 이의 성경강해 책도 본다. 그럴 때도 특히 누구와 상담하고 대화할 때 무슨 말을 어찌 해야 할지, 나는 저가 모르게 계속 주의 이름을 부른다. 저의 말을 들으면서 주께 묻기를 쉬지 않는다. 그러다가도 감정에 또는 개인적인 견해로 헛다리짚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도 나는 또 무슨 자격증을 따고 본격적으로(?) 이 일을 할 생각을 꺾는다. 누가 내 블러그의 글을 많이 보면 그것도 부담스럽다. 나는 내가 주목 받는 생이 될까봐 주의한다. 오직 주만 나타나기를.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고전 14:37).” 바울의 심정도 그와 같은 게 아니었겠나? 말씀의 권위는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있어야 한다. 어느 목사로, 또는 무슨 교단의 교리로 정립되는 게 아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1).”

 

오늘 날 가장 어려운 유혹이 대중의 관심이다. 조횟수가 돈이 되는 세상이다. 아이가 모 TV를 한다고 할 때 나는 말렸지만 말린다고 될 것도 아니어서… 그 뒤로 아이는 온통 몇 명이 조회를 했고, ‘좋아요’를 눌렀는지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구독자 몇 명이면 얼마가 돈이 되는데, 그래서 오늘 날 우리 사회를 뒤흔드는 막말과 막무가내식 개인방송이 문제다. 누군 재미로 또는 대리만족으로 조회를 하고, 무슨 별 풍선인가를 쏘아주면 한 번에 얼마씩 돈이 되는 모양이다. 그것이 수천 명, 수만 명이면 어지간한 중소기업 하나를 운영하는 일처럼 돈이 큰 모양인데. 하긴 요즘은 애나 어른이나 유튜브가 교사다. 무슨 신전 같다. 숭배 그 이상이다. 누구 주장이 좀 편협하다 싶으면 영락없이 유튜브에서 어느 박사가, 무슨 목사가, 어떤 교수가 한 말이란다. 점점 귀는 얇고 혀는 가벼워져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게 날렵하다.

 

실은 이런 게 나는 두렵다. 말은 사람을 찌르고, 글은 사람을 매장시킨다. 산 채로 저를 죽일 수도 있는 게 말이다. 어릴 때 들었던 말 한 마디가 여전히 내 마음을 찌르는 것도 있다. 평생을 노이로제로 시달리게도 한다. 정작 말한 사람은 그 말을 자신이 한 줄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글이란 더 무서운 일이어서 일일이 지우지 않으면, 내가 죽어서도 글은 남는다! 그러니 함부로 지껄이는 것도 무섭지만 함부로 써 갈긴 글은 더 무섭다. 이 모든 게 생을 너무 가벼워하고, 스스로 주목 받는 생이고 싶어 안달이 난 세상 때문이다. 저마다 거기서 도움을 얻고 위로를 삼으려 한다. 하지만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124:8).

 

오늘 시편은 일갈한다. 나는 새 힘을 얻는다. 숱한 위기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건지시고 지키신다(1-5). ‘~아니하셨더라면’ 하는 표현이 그 사이 두 번 나오는데, 그야말로 ‘아니하셨더라면’ 오늘의 나도 없다는 고백이 내 안에 있다. 또한 ‘~하였을 것이다.’ 하는 표현이 3회 나온다. 그때마다 하나님의 극적인 구원이 이루어진 것이다(6-8). 이 또한 나의 삶에 입증되었고 증거된 바 있다. 하나님은 나를 언제고 지지하신다.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하였으랴

사람들이 우리를 치러 일어날 때에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그 때에 그들의 노여움이

우리에게 맹렬하여 우리를 산채로 삼켰을 것이며

그 때에 물이 우리를 휩쓸며

시내가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며

그 때에 넘치는 물이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라 할 것이로다

(1-5).

 

나는 나의 삶 속에서 이와 같은 실제 상황을 수천 개는 예로 들 수 있다. 아, 그때 하나님이 나를 붙들어주지 아니하셨더라면… 하고 생각할 때 아찔한 순간들이 말이다.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수 1:5).” 말씀이 그대로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어찌 살면서, 이 좋은 세상에서 돈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나? 한데 안 믿는 자들도 알지만 돈을 좇는다고 돈이 되는 것은 아니다. 바람을 잡는 일 같아서, 언제든 날아가는 게 돈이다. 족할 줄 알고 사는 것, 하나님을 믿기 전과 믿고 난 다음의 차이는 확연하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이를 실감할 때가 말씀 앞에서 주춤할 때이다. 나는 이제 내가 아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래서도 나는 언제부턴가 죽어라 하고 말씀을 찾고 내 생각과 주장과 행동에 앞서 지침으로 삼으려고 한다. 그럼에도 번번이 쏟아내고 난 뒤 후회하기 일쑤지만… 그럼에도,

 

우리를 내주어 그들의 이에

씹히지 아니하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우리의 영혼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6-7).

 

나는 이제 확신하는 것은 주의 사랑과 긍휼하심이 아니었다면, 내 곁을 지켜주었던 수많은 ‘요나단’의 격려와 위로와 기도가 없었더라면, 나는 오늘의 내가 아니다. 하나님은, 말씀은,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146:7).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2-23).” 아, 이 놀라운 진리 앞에 나는 안도한다. 구원의 경험이 내게 있다. 그때마다 도우시고 함께 하신 주의 긍휼하심이 내 인생에 수두룩하다. 나는 이제 그와 같은 경험을 기억하고 자랑하고 성경으로 이해하며 산다. 항상 그러하기를 구하고 또 바란다. 오늘 시편은 이를 알게 하심으로,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8).

 

고로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량하셨음을 기억하라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오늘 이같이 네게 명령하노라(신 15:15).” 나는 기억한다. 자 이제,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