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속담에 말하기를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 하였으니 내 손이 왕을 해하지 아니하리이다
삼상 24:13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시 125:1
열다섯 편(120-134)의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가운데, 오늘은 여섯 번째 시이다. 곧 ‘여호와를 의지한다는 것’에 대해 순례자의 필연적인 간구를 담고 있다. 그 신앙을 고백하고 고백한대로 지켜주시길 바란다. 같이 읽은 사무엘서의 내용은 다윗의 도피생활을 기록하고 있는데(19:18-27:12), 사울 왕이 참 ‘열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블레셋 사람을 쫓다 돌아왔다. 한데 누구의 전언에 따라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다는 말을 듣고 다시 저를 잡으러 길을 나선다. 저가 뒤를 보기 위해 굴로 들어갔다가 하필 그 굴속에 다윗과 무리들이 숨어 있었던 터, 누구는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라 하고 다윗은 사울의 옷자락만 베고도 마음에 찔려하는 모습을 본다.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24:4).”
같은 사안을 두고 한쪽은 이렇게 한쪽은 저렇게 해석하고 행동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흔들릴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인 것을 생각하게 된다. 시편 첫 구절도 그러한 자신을 두고 고백한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125:1).
어떤 어려움 혹은 기회를 앞두고 어찌할지 판단이 서지 않을 때 우리로 흔들리지 않게 하는 것은 말씀이다. 말씀으로 우리 악의 본질이 어떠한지를 바로 아는 것이 또한 중요하다. 가령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보다 더 말씀을 잘 알던 사람들이 있을까? 한데 저들의 악이란 세리나 창녀, 죄인들을 천대하고 멀리하던 게 아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드러나는 행실이고 그 본질적인 원인은 자신을 사랑함이었다. 성경은 악의 본질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잃은 것’으로 규정한다. 처음 사람의 경우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저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탄의 말에 더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곧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0-13).” 죄악의 본질은 하나님의 사랑을 버린 것이다. 그리고 나타난 행실은 생수의 근원을 대신하는 우물을 파는 것이고, 그 물을 터진 웅덩이에 담으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하나님보다 더 원하고 사랑하는 것이 악의 본질이다. 하나님만으로 기쁨을 얻을 수 없다는 것,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게 되는 것,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눅 16:14).” 하여 주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15).”
오늘 사울의 모습을 보며, 요즘 말로 참 ‘열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는 무슨 일로 누구의 개인방송을 보았다. 유치하고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시비를 삼아 전 정권을 그렇게 까대더니, 이번에는 또 현 정권을 두고 까댄다. 소위 그게 다 돈이어서 이를 보는 구독자들이 수만 명이고, 또한 저들 가운데 적잖은 사람들이 돈을 쏴대니 그것으로 먹고 사는지… 참 ‘열일’한다는 생각을 하였다. 저들이 보수니 진보니 할 것도 없다. 저들의 밥줄은 ‘모두까기, 돌려까기’로 시청자들의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것이다. 저쪽 욕하다, 이쪽 욕하고, 이쪽 까대다 저쪽 까대면서 그러는 자신이 옳다는 것이다. 그것으로 책도 쓰고, 강연도 하고, 가르치기도 하면서… 오늘 사울의 모습과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 이스라엘 백성들과 바리새인 등 우리의 모습이 중첩되는 것을 느낀다.
아차, 하는 순간에 판단이 흐려지기 십상이다. 이에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전 15:34).” 먼저는 바로 알아야 한다. 우리가 안다는 것은 단순히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다. 곧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앎으로 흔들리지 않는다. 자칫 동료들의 말처럼 기회로 여겨 사울을 죽일 수도 있었다!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삼상 24:4).”
그러나 다윗은 “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5).” 고작 저의 옷을 벤 것으로도 그 마음에 찔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6).” 곧 저에게는 그 어떤 상황이나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함이 우선이었다. 이를 바울의 설교로 다시 듣는다면,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살전 5:5-6).”
우리가 아찔한 것은 남을 업신여기고 거짓말을 하고 소위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우리의 본질이 문제다. 하나님 사랑하기보다 더 귀히 여기고 사랑하는 모든 것이 ‘터진 웅덩이’다. 공부하여 성공하는 것이,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돈을 사랑하는 것이, 자신의 명분과 신념을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이 ‘터진 웅덩이’다. 죄는 사람과의 관계나 그 결과가 아니다. 우리가 누굴 사랑하는 것, 무엇을 더 귀히 여기는 것, 우선하는 것, 이 모든 게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앞선다면 이것이 “…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이다. 그것을 스스로 가두어 “터진 웅덩이”에 두려는 것으로 나타난다(렘 2:13).
저들의 수고가 열심으로 비춰져서 최선을 다하는 삶으로 보이고, 이를 부추겨 서로가 옳다하는 것이 문제다. 사회는 이를 격려하고 부모도 이러한 자식을 자부한다. 정작 ‘터진 웅덩이’에 끌어 모으는 열심이라는 게 얼마나 가치 없고 허망한 것인지를 바로 알지 못할 때, 우리도 잘 모르겠다. 이걸 옳다고 해야 하는지, 그르다고 해야 하는지. 정작 문제는 하나님 사랑하기를 우선하지 못하는 것이다. 주를 멀리하는 것으로 자신을 더 사랑하는 일이다. 처음 사람이 그 과일을 따서 먹었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듣고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한 것 같은, 갑자기 그런 마음이 든 것은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4-5).” 하나님이 정하신 말씀보다 뱀의 말이 더 솔깃하였고, 그 말에 자신도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 그 순간 모든 사고와 가치는 뒤바뀐 것이다.
만일 다윗이 같이 있던 자들의 말에 따라 사울을 죽였다면, 훨씬 빠르고 수월하게 왕권을 회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를 하나님이 주신 기회로 삼으라는 말에 혹할 만하다.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참으로 그럴듯한 기회다(삼상 24:4). 요즘 같이 다수의 의견이 우선이고 여론이 무서운 시대에 살면서 올곧은 믿음을 지키기란 참으로 어렵다.
문득 여호수아와 갈렙을 생각하게 된다. 정탐꾼을 열둘 중 둘을 빼고 나머지 열은 부정적인 보고를 하였다. “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민 14:24).”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저라고 눈에 보인 현실과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인식하지 못했을까? 한데 저들은 먼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든 것이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약 4:15).” 우리가 사회를 살면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중에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16).” 의당 저들보다 못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남들처럼 살고 남부럽지 않게 살고자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17).” 죄란, 알고도 이를 우선하지 않는 일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이것이 오늘 우리의 숙명이다. 하나님은 중립적이지 않으시다. 우리가 믿는 복음과 진리는 중립을 바라지 않는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 10:37).” 하나님보다 우선하는 모든 것은 ‘터진 웅덩이’요, 악이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1-23).”
알면서도 안 한다. 우선에서 미뤄둔다. 그러면서도 우리 안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는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 생수를 두고 스스로 판 터진 웅덩이다. 돈도, 명예도, 사랑도… 하나님을 우선할 때 그 자식도, 가족도, 선을 행하고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이는 악이다(고전 13:3). 오늘 사울은 잠시나마 그 생명이 유지되면서 감상에 젖어 옳은 판단을 하고 돌아가는 듯하였으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하고 소리를 높여 울며,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16-17).” 그와 같은 감격이나 감상으로는 지탱이 안 된다. 우리는 흔들린다. 매순간 헷갈린다. 갈등하고 어찌할까, 고민한다. 그러는 것은 우리의 연약함이다. 이에 오늘 시편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1).
하고, 굳건한 믿음을 당부하고 있다. 오직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롬 14:23).” 미심쩍을 때는 영락없다. “또 그가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은 그에게 경배할지어다(히 1:6).” 하나님을 무엇보다 귀히 우선하지 못할 때, 아무리 나라를 구하고 세상에 인류 평화를 가져온다 해도 모두는 허사다.
우리의 의는 하나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 4:20-22).”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 1:6-7).” 세상에 다른 선과 의는 없다.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2).
곧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신 33:27).” 자식도 부모도, 돈도 성공도 중요하고 귀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로 맡기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역경과 실패도, 수고도 어려움도 주가 두심으로 의로운 선을 이루시고자 하는 일이다. 이를 믿고 신뢰함으로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불로 둘러싼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에서 영광이 되리라(슥 2:5).” 주가 책임지신다. 이를 아무도 끊을 수 없다.
악인의 규가 의인들의 땅에서는
그 권세를 누리지 못하리니
이는 의인들로 하여금
죄악에 손을 대지 아니하게 함이로다
(3).
하나님이 우리를 강력하게 지키신다. 자신을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심으로 책임지신다. 곧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사 50:9).” 그러므로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빌 1:28).” 세상이 아무리 요지경이고, 모두가 나름의 선을 찾아 서로를 까대고, 씹고, 욕하고, 대적한다 해도, 하나님은 근거 없이 은혜를 더하시지 않으신다.
여호와여 선한 자들과
마음이 정직한 자들에게 선대하소서
(4).
여기서 선을 행한다는 것은 우리로 하나님을 우선하는, 하나님 사랑하기를 가장 먼저, 귀히 행함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곧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끝으로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살전 4:1).” 과연 우린 무엇을 힘쓰며 살고 있는지…. 무엇보다 죄에 대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있을 수 없음이다.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들은
여호와께서 죄를 범하는 자들과
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지어다
(5).
성도란 주의 자녀들로, 주의 자녀란 주를 사랑하는 일로 주가 싫어하시고 멀리하시는 데에 대해 과감하고 결연한 의지가 필요하다. 결행이 따라야 한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 고로 아닌 건 아닌 거다. 그래도 이를 고쳐 쓰고, 저걸 이렇게 응용하면 선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모두가 터진 웅덩이다. 열일하며 삽질한들, 저들은 대체 왜 저러고 사는 것일까? 하나님 앞에 중립은 없다.
자기 길로 굽게 치우치려 할 때 한 팔을 자르더라도, 한 다리를 자르더라도… 부디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 3:16).” 하면 이보다 더 불행하고 비극적인 결말이 또 있을까? 하여 나는 오직 단 하나의 말씀을 붙든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37:3-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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