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스가 그 날에 시글락을 그에게 주었으므로 시글락이 오늘까지 유다 왕에게 속하니라
삼상 27:6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시 128:1
사울을 피해 다윗은 블레셋에 망명하여 가드를 얻는다. 이는 저를 따르는 자들이 육백여 명이나 되면서, 더는 광야로 떠돌 수만은 없어서였다. 어쩐 일인지 가드 왕 아기스가 이를 순순히 받아주었다. 저는 다윗을 적대하던 왕이었다(21:10-15). 당시 다윗은 저의 앞에서 미친 체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이는 아기스 나름의 정치적 계산으로, “아기스가 다윗을 믿고 말하기를 다윗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심히 미움을 받게 되었으니 그는 영원히 내 부하가 되리라고 생각하니라(12).” 이는 서로의 전략적 선택이었다. 다윗은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이와 같은 선택을 하였으나, 이것까지도 하나님은 선으로 바꾸시었다.
다윗은 결코 완전한 자가 아니다. 저를 의롭다하심은 순전히 하나님의 의로다. 어제도 누구와의 통화에서 굳이 너무 애써 그 삶이 피폐해지는 것에 우려하였다. 우리가 무얼 어떻게 얼마나 행하였음으로 우리로 의롭다하심이 아니다. 바울은 심지어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5).” 문맥적으로 이를 악용하여 그래도 되는 것처럼 굴 자는 애당초 주의 선하심을 바라지도 않을 터, 할 수 있는 만큼 우리의 선이 된다. 수제자로 불리는 베드로 역시 저를 그리 여겨주시는 이의 뜻이다. 그런데 저는 예수를 부인하고 부정하고 저주하기까지 하며 외면하기도 했다(마 26:69-75). 우리의 선이 의의 척도가 아니라 그 마음의 통회함과 자복함이 귀하다.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전 7:20).” 우리가 누굴 욕하고 비판할 때도 있는데 그럼 우린 좀 나은가? 똑같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9-12).” 누구에 대해 미워하고 싫어하느니, 내버려두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주 앞에 두고 준행하는 것이 지혜요, 복일 거였다. 더욱이 나는 저가 목사고시를 이미 다 치러두고 10여 년의 시간을 저러고 있었다는 데 놀라웠다. 막힌 담이 다른 데 있는 게 아니었다.
성경이 우리에게 다윗의 실패를 보여주는 것은 그 또한 우리에게 교훈이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 1-7절까지에서 다윗을 우리가 아는 다윗으로 보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구차하다. 그런저런 어쩔 수 없는 이유에서 망명할 수밖에 없었겠으나 하나님의 적국 블레셋 가드로의 결행은 신앙적인 실패가 아닌가 싶다. 성경은 이를 가감 없이 기록하였다. 이는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롬 15:4).” 오늘 저의 선택과 그 과정을 묵상하며 성경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교훈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누구도 완전한 자는 없다.
노아는 포도주에 취해 하체를 드러냈고, 아브라함은 두 번씩이나 이삭이 아닌 몸종과 하갈의 아들을 후사로 삼으려 했다. 모세는 의기소침하여 하나님이 가라 하시는 명령에 주저하고, 자기 분을 이기지 못해 반석을 내려치기도 하였다. 베드로는 예수를 부인하였고, 바울은 앞서 사울로 살며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핍박하였다. 이를 성경은 숨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할 때 자신의 신세나 그 대안을 바라고 모색하게 되어 있다. 오늘 본문 1절의 교훈이다.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리니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좋으리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영토 내에서 다시 나를 찾다가 단념하리니 내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고(삼상 27:1).” 나름의 전술이 때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 여태 나는 몰랐다. 저가 이제 개척을 하여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를 수행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왜 그러고 있었는가? 하고 물었더니 신랑과 아이를 앞세우며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소릴 한다. 오늘 다윗의 생각도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나름의 전략이었다. 우리의 생각은 늘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허울을 쓰고 자신을 가린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62:5-7).
시편은 그러한 우리의 태도에 일침을 가하는 듯하다. “우리가 헛되이 도움을 바라므로 우리의 눈이 상함이여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나라를 바라보고 바라보았도다(애 4:17).” 다른 무엇, 어떤 나름의 판단이 우리로 주의 길을 바로 가지 못하게 한다. 이는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24-25).” 곧 오늘 우리의 맡은 바 이 모든 상황과 사실과 사역은 우리의 능력에 따른 게 아니었다. 마치 그럴 수 있는 능력이 되어 다른 이보다 이와 같은 사명을 두셨는가, 오해하는 것 같은데… 이는 결국은 사탄에게 빌미를 제공하는 것뿐이다.
어떤 어려움, 그 연약함으로 사탄은 계속 뒤따르며 속삭인다. ‘이래도 계속할래? 그 주제에 이 일이 가당키나 할 것 같나? 그 정도밖에 안 되면서 이 일을 감당하는 게 말이 되는가?’ 하는 식으로. 전에 어떤 이가 누구 교재로 성경공부를 할 때 저는 자꾸 문맥이나 표현, 어휘나 그 의미를 붙들고 트집 잡듯이 질문에 질문을 이어갔다. 말꼬리 잡듯 하는 저에게 나는 저가 악의적으로 밀어내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결국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세상을 따르게 돼 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
(52:7).
늘 되새기는 말씀이지만 죽겠다, 죽겠다 하면서도 정작은 살만하니까 저런다. 누가 몸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심지어는 ‘한 번 죽지 두 번 죽냐’ 하는 말로 호기롭게 구는 것을 보고 알았다. 누구는 말로만 주를 알고 주를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도, 주를 바라는 마음도 없는 것을 보면서 그의 마음이 가장 큰 악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곧 하나님과 나 사이의 막힌 담은 누구나 무엇에 의한 게 아니었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약 4:4).”
그래서 성경은 일갈한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4).” 누구 탓할 것 없다. 현실을 운운할 일도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적당함, 그 안이한 생각이 문제였다. 오늘 다윗이 보인 결정이다.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23).” 예외가 없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고민에 빠지고 낙심에 절어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 다윗도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망하리라.” 하는 결론으로 블레셋으로 망명하였다. 훗날에 저는 이를 생각하며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찬송한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그들로
파멸의 웅덩이에 빠지게 하시리이다
피를 흘리게 하며
속이는 자들은 그들의 날의 반도
살지 못할 것이나
나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55:22-23).
어제도 누구와의 통화에서 내가 한 번 어긋난 결정을 할 때마다 10년 세월씩을 혹독하게 돌아서 가야 했음을 상기하였다. 주님은 이르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내가 애쓴다고 될 일이 아닌 것을 두고 언제까지 핑계 삼을 수 없다. 내버려두고 묵묵히 우리는 길을 가야 한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서 크리스천처럼, 어찌 가정을 버려두고 그럴 수 있는가? 반문이 드는 상식을 깨야 한다. 가족들이 따르지 않으면 본인이라도 길을 나서야 한다. 갑자기 생각나는 누가 있는데, 저는 남편과 아이 둘을 끔찍이 사랑하여 교회를 등졌다. 그때 저의 주장은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들이 예수를 믿지 않고, 저들이 지옥에 간다면 자기 혼자 예수 믿고 천국에 들어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소리였다. 그리고 어느새 10여 년이 흘렀다. 저 둘은 이혼했고,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 제 갈 길로 갔다. 저는 홀로 남은 친정 엄마와 단둘이 산다.
스스로 판단하고 생각하는 그 이상의 어리석음은 없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스스로를 자신하며 애써 자기 힘으로 어찌 해보려는 일보다 허무한 것도 없다. 신앙을 잃는 성도보다 비참한 존재는 없다.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저는 어째서 주께 묻고 주를 의지하던 신앙을 잃은 것일까? 저는 앞서 유다 땅에 거주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다윗이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삼상 22:5).” 블레셋은 엄연히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우상의 땅이다(5:1-5). 그렇게 같이 들어가 살게 된 팔백여 명의 사람들은 어떤 삶에 물들었을까? 물론 10년 넘게 사울에게 쫓기며 사는 삶이 고단하고 지겨웠을 것이다. 그런 땅에서 저는 거짓말도 했고, 미친 체도 하며 비굴하게 살아야 했다.
“아기스가 이르되 너희가 오늘은 누구를 침노하였느냐 하니 다윗이 이르되 유다 네겝과 여라무엘 사람의 네겝과 겐 사람의 네겝이니이다 하였더라 다윗이 그 남녀를 살려서 가드로 데려가지 아니한 것은 그의 생각에 그들이 우리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다윗이 행한 일이 이러하니라 하여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거주하는 동안에 이같이 행하는 습관이 있었다 할까 두려워함이었더라(삼상 27:10-11).”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된다. 그럴 수밖에 없다. 궁여지책은 그에 따른 옹색함과 거짓과 타협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블레셋 왕을 경호해야 하는 치욕을 겪기도 하였다. 빌어먹고 산다는 게 이처럼 비참하다.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그러면 당신의 종이 행할 바를 아시리이다 하니 아기스가 다윗에게 이르되 그러면 내가 너를 영원히 내 머리 지키는 자를 삼으리라 하니라(28:2).” 또한 그곳 사람들에게 모욕과 돌던짐을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30:6).”
왜 그렇게 힘든가 했다. 저에게 그리 말하였다.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왜 그런 수모를 당하고 사는가 했다. 한데 다 그 이유가 있었다. 이제야 모든 수수께끼가 풀리는 듯하였다. 이를 말하자 저의 고백이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목사님, 사실은 제가 사람들을 두려워해요. 정신과 약을 먹는 것도 그래서예요. 아… 주의 길을 간다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다. 나는 저에게 솔직히 고백하였다. 지금도 누가 오겠다고 하면 나 또한 안정제를 먹는다. 진정이 될 때까지 화장실을 들락거린다. 피하고, 숨고, 외면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가는 것이다.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오히려 나의 그와 같은 연약함이 나로 절박하게 주를 찾게 한다. 또 하나 신기한 건 누구의 어떤 아픔과 상한 마음이 고스란히 내 것처럼 여겨지게 하신다.
주의 은혜나 사랑이란 건성으로 듣고 뻔한 말로 위로하고 마는 게 아니다. 내내 나를 못 살게 군다. 내 일도 아닌데 내 일보다 더 신경 쓰여, 아내는 종종 그런 나를 뭐라 한다. 내 스스로도 답답할 정도로 감정이입이 문제다. 하지 말아야지, 그런가보다 하고 말아야지, 하고 외면해도 내심 저로 힘들다. 신경 쓰이지 않는 사랑이 어찌 사랑이겠나? 어디서 무얼 하는지, 왜 여태 저러고 있는지, 주의 사랑으로 누굴 생각한다는 일은 저의 짐을 같이 짊어지는 셈이다. 한데 이와 같은 고단함이 우리로 절실하게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한다. 기도할 줄 모르고, 주를 외면하는 저를 두고 내가 오히려 안달을 부리듯 주께 징징거린다. 고하고 또 바란다.
나는 그럴 수 있는 게 나의 약함, 말로 다 표현하기 민망할 정도의 지질하고 못난 기질이든 형편이든… 그것에서 주의 권능이 나온다는 것을 이제는 인정한다. 기꺼이 나는, 정신과를 다니고 약을 먹고 그러면서도 누구의 어떤 일을 덩달아서 짊어지고 힘들어한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이제 내가 사랑하고 의지하는 말씀, 나의 약한 데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게 하려 함이다. 담대하고 당당하기를 기도하지는 않는다. 낫게 해달라고 바라는 일도 더는 안 한다. 그리 두시는 이가 그 가운데 거하시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아니면 내가 졸음이 잔뜩 쏟아지고 어금니가 욱신거리고 허리를 지지고 누워 누구와의 통화를 한 시간 가까이 계속할 이유가 무엇이겠나? 저를 향하신 주의 사랑과 섭리를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아니면 그 가정이 어찌 되든, 저가 무슨 일로 힘들아 하든 말든, 그게 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저는 또한 그런 얘길 왜 나 같은 자에게 일일이 늘어놓겠나? 때론 누구의 기도 부탁이 성가시다. 말도 안 되는 일로 징징거리듯 칭얼거리며 전하는 저의 소식이 싫증날 때도 있다. 한데 그러라고 나를 여기에 두셨다. 그럴 수 있도록 나의 가는 길에 주가 동행하신다. 나는 누구에게 그와 같은 우리의 사명을 알려주고 싶었다. 내 생각으로가 아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128:1).
오늘 시편도 우리의 명료한 답이다. 하나님을 경외함이란 내가 주께 받은 사랑을 아는 자의 마음에서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행 10:2).” 주를 바라고 주를 의뢰한다는 것은,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2).
우리로 근면하게 한다. 나의 규칙적인 생활 패턴이 다소 병적이라 해도 나는 근면하고 성실하기를 원한다. 곧 “정직한 자를 악한 길로 유인하는 자는 스스로 자기 함정에 빠져도 성실한 자는 복을 받느니라(잠 28:10).” 하여 이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에서 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보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그것이 그의 몫이로다 또한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그에게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제 몫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전 5:18-19).” 그러므로 주께 간구하기는,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 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3).
복이 다른 게 아니다. 주신 곳에서 감사하는 게 복이었다.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전 9:9).” 오늘에 이르러 여전히 티격태격하면서도 주의 길을 함께 가게하심은 내버려둠으로 주가 이루시는 것을 믿을 때이다. 내가 일일이 참견하고 건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엡 5:28).” 다시 말해 자기를 사랑할 줄 모르는데 어찌… 그 귀한 자기 사명을 두고 허튼 데 마음 쓰며 사랑을 갈구하는 것으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며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
(4-6).
오늘 이 말씀이 주가 보장하시는 삶이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만큼 자녀를 아내를 사랑하려면, 먼저 내가 나를 사랑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곧 내게 맡기신 사명, 그 역할과 주의 일에 충성하는 일. 이는 역설적이게도,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눅 18:29-30).”
그러므로 나는 지금 무엇으로 심고 무엇을 거두려고 애쓰는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8).” 그러므로 어떠하든지, 하나님은 내 편이시다!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시 118: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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