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스가 다윗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내 목전에 하나님의 전령 같이 선한 것을 내가 아나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은 말하기를 그가 우리와 함께 전장에 올라가지 못하리라 하니
삼상 29:9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시 130:1
적국의 왕 아기스의 입에서 나오는 칭송과 다윗을 대하는 것에서 ‘주의 사람으로 어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저가 방백들에게 말한다. “아기스가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에게 이르되 이는 이스라엘 왕 사울의 신하 다윗이 아니냐 그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여러 날 여러 해로되 그가 망명하여 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그의 허물을 보지 못하였노라(3).” 곧 하나님은 모국 이스라엘과의 전투에서 자연스럽게 다윗을 제외시키신다. 그러는 동안 다윗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죽음을 무릅쓰고 쫓기면서도 기름부음 받은 사울의 옷자락만 베고도 그 마음에 찔려하였던 이가 자국의 하나님의 백성들과 싸워야 한다고 전투에 참여하는 중이었다. 그것도 아기스의 호위무사로서 함께 나가면서 그 마음이 참으로 심란하고 어려웠겠다. 오늘 시편의 첫 구절이 적절하게 다윗의 심정을 함축하고 있는 것 같다.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130:1).
누구에게 말할 수도 없고 드러내어 슬퍼할 수도 없는, 깊은 슬픔 속에서 내가 주를 부른다는 것. 그럴 때 절묘하게 그 위기를 모면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기이하다. 다윗은 그때 스스로는 빠져나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방백들이 저의 출신과 신분을 문제 삼아 전투에서 제외하게 하는 것이니, 다윗과 다윗의 권속들이 자연스럽게 그 ‘깊은 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이에 얻게 되는 교훈은 악한 것에 대하여는 일체 그 모양도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 2:21-22).”
물론 그때 다윗의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는 지경이었다 해도,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후 2:11).” 특히 오늘 날 모든 사람이 돈을 투자하는 데 있어 그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게 코인과 주식일 텐데, 어제도 누구와의 통화에서 답답한 심정이 들었다. 누가 대신 무슨 코인에 5천을 투자했다가 다 날리고, 그래도 원금이라도 되찾아야 한다고 주식에 다시 5천을 넣었다가 3천까지 떨어진 모양이었다. 나는 그나마 3천이라도 건지라고 하자, 그럴 수 없는 이유를 여러 개 말하는데… 내가 바보인 것인지, 나는 저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말이야 없다 생각하고 투자하는 것이라지만, 돈이 원래 그렇지가 않다.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11:3).”
그런 거 보면 있는 게 문제다. 없으면 없는 대로 있는 것으로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데, 우리의 허물과 실수에도 하나님의 구속은 착오 없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오늘 본문을 읽으며 생각한다. 그러니 허물과 실수도 괜찮다는 소린가? 그런 만큼 자신이 짊어져야 하는 곡절이 무겁기만 하다. 광야 40년을 돌아야 하고, 주저하고 미적거리는 동안 이고 지고 살아야 하는 무게는 고스란히 자신이 선택한 일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4-25).”
누구와의 통화에서 저도 안다. 그래서도 원금은 찾아야 한다는 소릴 되풀이하다, 저가 바라는 ‘대박’에 대한 기대를 숨기지도 못하였다. 저마다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벌이는 이와 같은 참여는 죄스럽다. 악인과 멍에를 같이 하면 그 화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그를
그의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 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 (셀라)
(62:4).
악이란 그런 것이다. “공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없고 진실하게 판결하는 자도 없으며 허망한 것을 의뢰하며 거짓을 말하며 악행을 잉태하여 죄악을 낳으며 독사의 알을 품으며 거미줄을 짜나니 그 알을 먹는 자는 죽을 것이요 그 알이 밟힌즉 터져서 독사가 나올 것이니라(사 59:4-5).” 이를 스스로 감당하겠다고 하는 게 요즘 세상의 돈벌이다. 우직한 맛이 없다. 예전에는 그래도 묵묵히 농사를 짓든지, 장사를 하든지, 한 우물만 파면 그런대로 먹고 살만 하였다는데 요즘은 그야말로 사는 일이 온통 ‘눈치게임’만 같다. 선생은 선생으로의 사명은 고사하고 적당한 선에서 자신의 책임을 모면하는 것으로 ‘일처리’를 하고, 졸지에 교육은 사라지고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나 사명은 ‘처리해야 하는 일’이 되었다. 그렇게 ‘올 해도 무사히’를 되뇌며, 교사나 공무원들은 지극히 사무적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짐짝일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일이라니,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이와 같은 말씀이 너무 멀게만 느껴진다. 도식적으로 그렇다는 소리지 삶에서는 실현되기가 어려운 말이다. 그래서 잠언은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13:20).” 이를 어찌 삶으로 실현할 수 있을까? “내 아들아 여호와와 왕을 경외하고 반역자와 더불어 사귀지 말라 대저 그들의 재앙은 속히 임하리니 그 둘의 멸망을 누가 알랴(24:21-22).” 여호와를 경외함으로다. 다른 묘책은 없다. 진리는 단순명료하다. 여러 설명이 따를 게 없다. 곧 우리 스스로 자신의 한계와 그 물질의 한계를 바로 아는 것이 지혜였다.
다윗의 능청과 거짓은 그 속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였겠다.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내가 당신 앞에 오늘까지 있는 동안에 당신이 종에게서 무엇을 보셨기에 내가 가서 내 주 왕의 원수와 싸우지 못하게 하시나이까 하니(삼상 29:8).” 전투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하자 저가 능청을 떤다. 이는 거짓말로 생긴 습관이다. “아기스가 이르되 너희가 오늘은 누구를 침노하였느냐 하니 다윗이 이르되 유다 네겝과 여라무엘 사람의 네겝과 겐 사람의 네겝이니이다 하였더라(27:10).” 악이 악을 따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거짓말 하나를 지키기 위해 열 개 스무 개의 거짓과 능청이 따라야 하는 법이다. 이것이 우리의 한계란 것을,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 2:22).” 참으로 부질없는 생을 살면서 그 삶을 연명하느라 다들 고생이 많다.
그래서 지혜자는 일러 “바람을 주장하여 바람을 움직이게 할 사람도 없고 죽는 날을 주장할 사람도 없으며 전쟁할 때를 모면할 사람도 없으니 악이 그의 주민들을 건져낼 수는 없느니라(전 8:8).” 나는 이점에서 주식이나, 개인방송이니 하는 소위 요즘 핫한 돈벌이들이 갖는 죄악성에 치를 떤다. 속된 말로 개나 소나 주식에 개인방송에 아주 난리도 아니다. 좌우 대립이 치열하면 치열할수록, 진영논리가 단단하면 단단할수록 당사자나 이를 부추기는 자나 모두가 한패다. 엊그제도 했던 말 같지만 나는 생전 관심도 없던 누구의 개인방송을 찾아보다 깜짝 놀랐다. 먼저는 허접한 저의 논리와 욕설에 가까운 막말에 구독자 수가 가히 엄청나다는 데 놀랐고, 저가 방송을 하는 동안 응원의 댓글은 물론 1만원 10만원 마구 쏴 올리는 후원금에 또 한 번 놀랐다.
그러니 성도로서의 신실함을 유지하고 산다는 게 이제는 말이 안 된다. 호구 잡히는 일이고, 진상으로 사는 꼴이며, 한심하기 짝이 없는 부류가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런 사람 한둘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나라고 왜, 어디, 청약 당첨 로또… 하는 지역에 대해 관심이 없겠나? 가끔은 없는 게 복이고 꼼짝 못하는 게 은혜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럴 수 있는 여력이 그럴 수 있는 죄의 길로 인도하는 셈이었다. 5천을 다 잃고 5천을 회복하겠다고 다른 데 투자하여 2천을 손해보고 있으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는 소리에 그나마 3천이라도 빼라는 내 말이 그렇게도 한심했을까?
나는 어느 시점을 기해 예전의 나와 오늘의 나로 갈린다. 예전의 나는 죽었고, 오늘의 나는 살았다. 어느 날 나는 죽었고, 어느 날 나는 살았다. 나는 이것이 나만의 특징이라 여기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이란,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5-16).” 이와 같은 자들로,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세상은 보란 듯 이를 비웃는다. 아내도 가끔은 나의 이런 셈법에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렇다고 내 안에 욕심이 없고, 누구의 성공을 부러워하는 마음이 없는가 하면 절대 그렇지는 않다. 나는 저들을 부러워한다. 그러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73:1-3).
사람으로 살면서 사람을 부러워하거나 부끄러워하는 것은 당연하겠다. 그러다가도…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16-17).
결코 누구도 완전한 자일 수는 없으나 신실하기를 주의 말씀으로 사모하고 또 자신을 쳐 복종시키는 일이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7).” 곧 오늘 날은 자신의 적이 자신이라는 사실에 늘 치를 떤다. 그럼에도 그러한 가운데서의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대해,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오늘 다윗의 사태를 보며 저도 별 수 없는 사람인 것을, 그러나 저는 주의 사람이었던 것을… 새삼 나의 나 된 것에 대하여 돌아보며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37:9-10).
그러니 바로 알아야 할 것은, 지금이 다가 아니다. 그야말로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특히 우리는 모든 게 끝났다 해도 끝난 게 아니다. 그 죽음까지도 귀한 것이어서 그 너머의 세계를 우리는 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이 놀라운 사실을 잊은 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불우하다.
오늘 시편, 우리 ‘인생의 깊은 곳’에 대해 묵상함으로 그곳이 기도할 자리이고 때인 것을 새삼 확신하게 된다. 거기는 원망과 한탄이 우글거리는 자리다. 누구의 말끝에 ‘없는 셈 친다’면서도 툴툴거리며 억울함을 억누르지 못하는 심정은 이해가 간다. 이상한 것은 부자이고, 그 정도는 괜찮겠다싶은데도 절대 손해를 용납할 수 없는 욕심이 저들 안에 있다. 누군들 쉽게 살겠나만 있으니까 있어서 더 골 깨지는 삶을 사는 것이니,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91:15).
자, 그러니 이제 어쩔 것인가? 여전히 ‘혹시나’ 하고 한숨 쉬고 기다리며 살 것인지, 주께 아뢰고 주 앞에 내어놓을 것인지, “그러므로 주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 넘기사 그들이 곤고를 당하게 하시매 그들이 환난을 당하여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에게 구원자들을 주어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거늘” 그럼 이제 구원의 기쁨으로 살면 좋을 텐데, “그들이 평강을 얻은 후에 다시 주 앞에서 악을 행하므로 주께서 그들을 원수들의 손에 버려 두사 원수들에게 지배를 당하게 하시다가 그들이 돌이켜 주께 부르짖으매 주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여러 번 주의 긍휼로 건져내시고” 이와 같은 긍휼하심을 여러 번 경험하면서도, “다시 주의 율법을 복종하게 하시려고 그들에게 경계하셨으나 그들이 교만하여 사람이 준행하면 그 가운데에서 삶을 얻는 주의 계명을 듣지 아니하며 주의 규례를 범하여 고집하는 어깨를 내밀며 목을 굳게 하여 듣지 아니하였나이다(느 9:27-29).” 결국 우리의 결국은 스스로 자초하는 것인가?
응답을 바라며 주 앞에 은근과 끈기로 기도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130:2-3).
이는 예수님 앞에서 모욕을 당하면서도 주의 선하심을 붙들고 끝까지 붙들고 간구하였던 여인처럼,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 15:27-28).” 우리의 간청은 결코 땅에 떨어져 버려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눅 11:8).”
그는 누구신가? 우리의 구주이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엡 1:7).” 곧 주가 다 아신다. 그리하여,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103:12-14).
나는 하나도 나은 게 없으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을 이제는 확신한다. 이를 잃지 않고 싶다. 무엇으로도 바꾸고 싶지 않다.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130:4-5).
오늘 시인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고, 나의 중심이 되기를.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사 50:10).” 다만 주를 의지한다는 것,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말 3:16).” 이에,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6).
이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풍성하시고, 그와 같은 하나님의 ‘헤쎄드’는 다함이 없는 사랑인 것을 나는 확신한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깊은 곳’의 나의 허물과 죄악을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이를 다 담당하셨다. 누구에게 말할 수도, 혼자 안고 살기에도 감당이 안 되는 것을 주 앞에 아뢰고 고하는 일…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 3:22).” 하여,
그러나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
(86:15).
이를 나의 입으로 감사하며 살 수 있는 것으로도 충분하였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합 3:17).” 괜찮다, 됐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18).” 그러므로 이제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
(130:7-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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