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므로 사울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하니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삼상 28:6-7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
시 129:2
다윗의 망명 생활과 사울의 몰락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이번 길보아산 전투에서 사울 왕가의 죽음은 접신한 여자를 통해 사무엘을 끌어올려 먼저 듣게 되는 내용이다. 다윗은 이 전투에 참가하며 아기스의 호위대장을 맡게 된다. 사울은 전투를 앞두고 접신한 여자를 찾아가 다급하게 미래를 알고자 하고, 블레셋이 수넴에 진을 치자 사울은 다급해졌다.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시자 저는 신접한 여인을 찾아 사무엘의 영을 통해 될 일을 듣는다. 사울이나 다윗이나 어려운 상황을 맞이한 셈이다. 실제 이 두 상황은 둘 다 하나님을 임의로 떠나서 생긴 결과라 할 수 있다. 다윗은 위기를 모면하게 하시고 사울은 이내 죽음을 당하게 하시는 결과를 보면서 구원과 유기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했음을 알 수 있다. 위기는 누구에게나 닥치지만 그 결과는 하나님의 것이다.
어디에 속한 것인지, “너희는 이 회중에게서 떠나라 내가 순식간에 그들을 멸하려 하노라 하시매 그 두 사람이 엎드리니라(민 16:45).” 결국 그 말씀을 듣고 안 듣고는 본인들의 결정에 달렸다. “그러나 너는 악인에게 경고하여 돌이켜 그의 길에서 떠나라고 하되 그가 돌이켜 그의 길에서 떠나지 아니하면 그는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전하리라(겔 33:9).” 성도라 해도 그 역할에서 이탈하면 그 지경이 스스로 짊어지고 가야 한다. 비천한 자리는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벧후 3:17).”
귀신도 있고 사탄의 권세도 엄연히 우리 생활에 따른다. 일련의 접신한 자들을 그저 흥미나 재미로 관여할 대상이 아니다. 저들에게 있는 신통력은 실제 사탄의 권세로 누구의 장래나 과거를 아는 일이나 이를 운운하는 것들이 모두 가능하다. 그래서도 나는 귀신영화나 무슨 점보는 자들을 TV에서 흥밋거리로 방송하는 것에 경계한다. 저들의 존재는 엄연하고 그 위험성 또한 크다. 뿐만 아니라 교회들 가운데서도 영적으로 이를 드러내는 자들이 있다. 성령을 운운하고 어떤 권세를 나타내기도 하는데, 이를 내세워 우리를 어지럽히는 일은 속되다. 그럴 수 있으나 더욱 조심하고 또한 스스로가 겸손하여야 한다. 표면적으로 이를 보고 좇고 따르는 무리에 대해 성경은 옳다 하지 않는다. 가령 예수님도 기적과 이적을 보이셨으나 그것은 엄연히 사람들을 끌고자 하는 게 아니었다. 한데 여기에만 관심을 두고 모여들었던 무리들이 저를 왕으로 삼고자 한다거나 더 많은 이적을 보려할 때는 경계하시고 도망치시기도 하였다. 인위적으로 이를 부각시켜 말씀을 저해하는 일은 결코 옳지 않다.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계 3:2-3).” 정작 그런 데 관심 있는 자들은 엉뚱한 데 한 눈 팔려 이단이나 사이비를 따르기 십상이다. 감정이란 늘 그런 것이다. 하나님이 그 뜻을 드러내지 않으실 때 자신을 돌아보아 회개하고 주 앞에 통회할 일이지, 없애고 멀리하였던 박수나 신접한 자를 도로 찾는 일에서 사울의 결국은 예고된 것이다. 두려움이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이지 자신의 앞날을 두고 이를 어찌 하려는 게 아니다.
그들이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너를 대항하여 진 친 그들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셨으므로
네가 그들에게 수치를 당하게 하였도다
(시 53:5).
이를 지혜자는 격언으로 남겼다.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잠 28:1).” 저들의 음침하고 음울한 분위기에 또는 신통하고 범상치 않은 것으로 이를 은사라 하며 주의 일을 도모하려 하는 것은 위험하다. 정작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드러내려는, 하나님을 팔아 장사하는 사람과 다를 게 없다. 경우야 어떻든 하나님을 멀리하고 신접한 자로 사는 자의 경우들도 은밀하다. 참 신앙은 위기에서 드러난다. 위기에 직면한 사울은 하나님의 응답이 없자 스스로 그 답을 얻고자 신접한 여자를 찾는다. “사울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하니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삼상 28:7).” 저의 믿음의 실상을 알려주는 단적인 예이다. 우리가 같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 해도 어떤 이유나 의미로 주를 찾는가 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일이다. 이를 위해 이스라엘이 겪었던 훈련이 동일하게 우리 신앙생활에서도 적용이 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신 8:2).”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당당하였던 다니엘의 친구들은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단 3:17).” 곧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그 이상의 믿음이 있었다. 그러니까 단지 당장의 위기, 그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 이상의 하나님의 섭리와 그 뜻을 구하였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18).” 곧 아닌 것은 죽는다 해도 아닌 것이다. 한데 사울은 그럴 수 없었다. 저가 알고 믿었던 하나님은 허깨비였다. 늘 저 앞에 벌어진 현실을 두고 씨름하는 정도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곧 자신의 판단이 기준일 때 성경을 스스로 부정하고 아랑곳하지 않는 자리에까지 떨어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나 너희가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고 거리낌 없이 산지로 올라가매(신 1:43).”
실제 우리의 일상에서 그런 경우가 어디 한둘이던가? 그런 이유로 교회를 다니고 주의 이름을 부르고 주께 간구하는 기도가 어디 한두 번이던가? 하여 “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형벌할 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당돌하고 자긍하며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들을 비방하거니와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도 주 앞에서 그들을 거슬러 비방하는 고발을 하지 아니하느니라(벧후 2:10-11).” 한동안 누구와 성경공부를 할 때 이를 두고 설왕설래한 적이 있다. 실제 신접한 여인이 끌어올린 이상이 사무엘의 영인가, 아닌가. 그런 일이 가능한가, 아닌가. 그때도 저에게 일러 그게 요점이 아니라고 그렇게 말해도 저의 관심은 그것이었다.
내가 아는 선생은 뜬금없이 어느 책을 권하며 누가 죽었다 살았는데, 저가 다녀온 천국을 글로 썼다며 그런 데 온통 관심이 팔려 있었다. 여기로 저기로 쓸려다니는 무리들 가운데 누가 무엇을 보았다 하고, 어떤 이적을 행했다고 하는, 뭔가 신기들린 것에 관심을 두고 안개 같은 호기심으로 휩쓸리는 경우들이 많다. 저들의 특징은 뭐라 한들 주된 괸심은 하나님의 뜻이나 섭리가 아니다. 당장의 문제와 그 이상이다. 기이한 일, 예전에 누가 나더러 그런 은사를 구하라고 권한 적이 있다. 실제 저는 누구와 통화하며, 목소리만 듣고 저의 일을 알아맞추기도 하여 그것을 권면해주기도 했다. 그러면 사람들은 환장을 한다. 나도 은근히 그런 은사를 바라고 저처럼 시골 어디에 기도원을 꾸려 그리 신통하게(?) 주의 일을 감당했으면 하는 이상도 있었다. 나는 이를 부정하거나 반대하지 않는다.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방언도, 예언도, 이적도, 기사도 그 이상의 어떤 권능도 가능하다. 하나 그 일은 주를 나타내고 더욱 겸손히 주를 섬기기 위한 것이고 더러는 믿음이 적은 자들을 향해 하나님이 펼치시는 행사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를 꾸려 장사꾼처럼 행세하는, 그리하여 미신적인 일로 퇴락시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경우가 더 많으니. 그건 사람들이 그리 순순하게 그 일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 너머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기보다 자신의 바람과 당장의 욕구와 그 처지를 위한 수단으로, 영적인 허기를 채우려고 스스로 종교가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내가 아는 누구는 그렇게 목사질을 하다 기어이 어디 암자로 들어가 중도 아니고 목사도 아니고, 기독교도 아니고 불교도 아닌 기묘한 신전을 꾸며 들어 앉았다. 별의 별 것들이 다 있는 세상이니 뭐라 할 건 없고. 모든 결국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는 경우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인 것을 아무리 설명한다 해도 소용이 없을 터. 신비적인 은사에 빠지면 답이 없다.
저런 자와의 대화는 어지럽다. 하루는 예수님도 하도 이적을 보이라 하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 12:39)." 이는 곧 자신이 죽으셨다 살아나실 것을 내포하는 말씀인데, 이를 또 알아 듣기나 하나? 결국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은 우리의 종교성이다. 사울의 오늘 모습은 그래서 더욱 씁쓸하다. 죽음으로 갚아도 갚을 수 없는 큰 죄이다. 접신 한 여인 앞에서 사울은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맹세까지 한다. “사울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에게 맹세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이 일로는 벌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10).” 그런 지경에서 저의 상태를 짐작할 있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일,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12).” 이를 두려워할 줄 모르면 더는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저가 성도라 해도 혹은 안 믿는 자라 해도, “사람이 아직도 예언할 것 같으면 그 낳은 부모가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말을 하니 살지 못하리라 하고 낳은 부모가 그가 예언할 때에 칼로 그를 찌르리라(슥 13:3).” 스스로 지껄이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도 못할 때, 술 취한 자의 손에 들린 가시나무나 칼과 같다. 곧 우리의 영적인 무지가 우리로 은연중에 주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으며 살게 한다. 부지중에 죄를 범한다 해도 죄는 죄다.
“내가 말하기를 이 무리는 비천하고 어리석은 것뿐이라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하니(렘 5:4).” 우리로 주를 떠나게 하는 것은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 4:18).” 우리의 환난은 다만 우리 신앙의 순도를 측정하는 계기가 된다. 그것을 해결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문제로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런데 그게 그런가? 당장의 문제만이 급급한 현실이다 보니.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를 성가시게 하느냐 하니 사울이 대답하되 나는 심히 다급하니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나를 향하여 군대를 일으켰고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하지 아니하시기로 내가 행할 일을 알아보려고 당신을 불러 올렸나이다 하더라(삼상 28:15).” 저는 급하여 귀신이라도 끌어들일 판이었다.
그 정도로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을. 상대적으로 저는 임의로 자기 판단과 기준으로 행하며 살아왔다. 시기와 질투와 자기의 종교심과 그 열정으로, 결국 저는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자기 수고에 수고하다 죽는 셈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66:10-12).
믿는 자에게도 시련은 따른다. 오늘 두 사람의 처지, 다윗이나 사울이나 다를 바 없는 경우를 본다. 저들의 오늘은 하나님을 등졌을 때의 일이고 그 결국은 전혀 다른 결과로 드러난다.
오늘 시편에서,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도다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
(129:1-2).
곧 이런 괴롭힘, 어려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번번이 당하는 자가 있고 그럴수록 주 앞에 더 단단해지는 자가 있다. 특히 우리가 믿음으로 인해 겪는 시련은 우리로 더 혼란스럽게 할 수 있으나 더욱 주를 의뢰하게 한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 5:41).” 누구는 어려움으로 질겁하고 갖은 묘책을 찾아 떠도는데 누구는 어려움으로 오히려 그것을 합당한 일로 여기며 기뻐한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14:22).”
어려움으로 주를 찾는 일은 같을 수 있으나 그 목적과 기준이 서로 다른 것으로 판명날 때가 올 것이다. 결국은 우리의 승리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잠 24:16).” 그 차이를 우리는 어렴풋이 안다. 알면서도 어찌 하지를 못한다. 스스로를 위축시켜 옥죄려는 무리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하지만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8-10).” 곧 당장의 어려움이 다가 아니다.
밭 가는 자들이 내 등을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지었도다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도다
(3-4).
어려움이 등을 밭 가는 것처럼 어렵게 하는데도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붙들고 산다는 것,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이를 마땅히 여길 줄 아는 게 지혜일 텐데,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벧전 5:10).”
이런저런 일로 누구의 어려운 처지에 한숨부터 난다. 마음이 좋지 않아 주의 이름을 부른다. 우리로 주께 더욱 가까이 하게 하시려고 어려움을 허용하시기도 한다. 바람이 일 때 우리 구원의 배는 빨리 항해한다. 일상에서의 어려움이 우리로 주를 생각하게 하고 주 앞에 회개하고 돌이켜 주의 긍휼하심을 바라게 한다면… 누구를 탓하고 어떤 일에서 원인을 찾아 그 일을 해결하려 기를 쓰고 용을 쓰는 일이, 우리에게는 전부가 아니다. 안 믿는 자들이든, 접신한 자든 그 이상도 바라고 구할 때가 있다. 하나님은 그런 데서 망령되이 여김을 당하시는 것을 아주 싫어하신다. 그러므로 불의에 대한 선포는 우리의 특명이다.
무릇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여 물러갈지어다
(5).
이를 당하면서도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밍밍하다면 그게 어디… 하물며 주의 일을 감당하는 자로 살면서 자신의 문제에 연연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꼴이라면.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 언약의 말을 따르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렘 11:3).” 두려워할 줄 안다는 것은 사는 데 따른 어려움으로가 아니라, 그것으로 더욱 주를 사랑하는 데서 나온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또는 우리 주께서 임하셨도다(고전 16:22).” 결국은 주를 사랑함이 나의 어려움으로 나의 신앙을 독려하고 위로하며 붙들고 드러낼 것이다.
그들은 지붕의 풀과 같을지어다
그것은 자라기 전에 마르는 것이라
이런 것은 베는 자의 손과
묶는 자의 품에 차지 아니하나니
(6-7).
곧 우리에게 임할 날들이 지금으로 전부가 아니다. “그들이 실족할 그 때에 내가 보복하리라 그들의 환난날이 가까우니 그들에게 닥칠 그 일이 속히 오리로다(신 32:35).” 오늘로 서로 사탕발림이나 하듯 등을 토닥이는 위로는 위험하다. 괜찮을 거야, 하는 거짓 위로가 우리 영혼을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 5:3).” 결코 괜찮지 않은데, 저의 미적거림이 끝을 예감하게 하는데도 쉬쉬 하는 것은 문제가 크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누구를 위한 기도는 자신을 영혼을 바로 세우는 일이기도 하다.
지나가는 자들도
여호와의 복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거나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축복한다 하지 아니하느니라
(8).
악인은 악한 날에 악으로 끝날 것이다. “가지가 마르면 꺾이나니 여인들이 와서 그것을 불사를 것이라 백성이 지각이 없으므로 그들을 지으신 이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며 그들을 조성하신 이가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시리라(사 27:11).” 이와 같은 말씀에서 진정한 두려움을 느껴야 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말 4:1).” 그러니 어찌할 것인지? 두렵고 떨려하는 마음에 말씀을 이으셨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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