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전봉석 2022. 6. 21. 05:18

 

그 장례를 마치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를 왕궁으로 데려오니 그가 그의 아내가 되어 그에게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삼하 11:27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

시 143:8

 

 

오늘 본문은 볼 때마다 이해하기가 어렵다. 먼저는 다른 사람도 아닌 다윗이 그러했다는 것이다. 또한 그 일을 은폐하려 벌이는 다음 행보가 가증스럽고 역겹다. 그리고 하나 더 꼽으면 간음과 살인이 너무 일순간의 유혹으로 그의 심령을 어둡게 한 것이다. 첫 구절은 그 배경이 된다. 나름 나라를 평정하여 더는 전쟁에 직접 나갈 일이 없어졌다.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에게 있는 그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1).” 그 해가 돌아왔다는 것은 ‘왕들이 출전할 때’로 팔레스타인에서 우기가 지나 건기(4월)를 맞이하는 때를 가리킨다. 앞서 10장에서 암몬과의 전쟁이 중단되었다가 다시 재개된 것이다.

 

그런데 다윗은 전쟁에 나가지 않았고 요압을 앞세워 자신은 자신의 책무를 소홀히 하고 왕궁에 남았다. 그래서 성경은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롬 10:12).” 경고하신다. 선 줄로 생각하면 그 마음이 완악하고 교만해지게 되어 있다.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완악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 그의 영광을 빼앗기고(단 5:20).” 그러므로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고전 8:2-3).” 결국 우리의 교만함을 다스릴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벧후 3:17).”

 

간음이란 아차, 하는 순간 이미 저지르고 난 뒤이다. 이는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를 실족하게 하는 죄이기도 하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마 18:6).” 육신이 정욕은 스스로 통제하고 다스릴 수 있는 게 아니다. 해서 요셉은 일찍이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할 때에 무조건 그 자리를 도망치고 보았다. 말로 설득하고 의지로 이겨낼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천하의 다윗도 속수무책이었던 게 음행이다. 저는 다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그가 아뢰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니(3).” 저가 누구의 아내라는 사실에도 멈출 수 없었던 것이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나는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사오니

주의 계명들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119:18-19).

 

우리는 영적인 눈이 감기는 순간 사리분별이 어려워진다. 죄를 다스리고 억제할 능력을 상실한다. 보면 혈기와 간음은 무조건 입을 다물고 눈을 감고 그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이다. 이는 누구도 장담하여 이겨내야 할 문제가 아니다. 곧 부르심의 소명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지혜와 계시의 정신이 어떤 것인지, 마음의 눈이 닫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말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7-19).”

 

또한 지금 어느 자리에 있는지, 어디를 보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하고 날마다 긴장할 필요가 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29-30).” 한데 스스로는 괜찮다, 자신은 예외다 하면 저는 영락없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도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육체를 입고 살면서 육체의 욕심을 따르지 않을 길은 하나다.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성령은 말씀으로 활동하신다.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를 쉬지 않는 것은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벧전 4:2).” 더는 예전 생활로 자신을 놓아두지 않도록,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3).” 그때는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과 우상 숭배를 대수롭지 않은 듯 여기며 살았다. 더는 육체의 남은 때가 그러해서는 안 된다. 정욕을 따르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 우리의 자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할 때이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 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고전 6:12-13).” 식탐과 음란과 자기주장은 하나로 통한다. 자기 사랑이 주된 이유다. 여기서 바울은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 5:13).” 자유를 위한 부르심을 위해 서로에게 종노릇 하라는 논리를 펼친다. 이에 베드로는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벧전 2:16).”

 

죄는 죄를 감추기 위해 더 큰 죄를 부른다. “속임으로 그 미움을 감출지라도 그의 악이 회중 앞에 드러나리라(잠 26:26).” 스스로 빠진다는 소린데, “함정을 파는 자는 그것에 빠질 것이요 돌을 굴리는 자는 도리어 그것에 치이리라(27).” 흔히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간다는 말처럼 “거짓말 하는 자는 자기가 해한 자를 미워하고 아첨하는 입은 패망을 일으키느니라(28).” 그러니 죄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회개밖에 없다. 감출 수도 개선할 수도 없는 게 죄다. 우리 몸은 이에 익숙하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28:13).” 그러므로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 55:7).”

 

오늘 다윗은 결국 저의 남편까지 죽음으로 몰아넣고는 급기야 아무렇지도 않은 척 저를 데려다 아내로 삼았다. 왕의 신분으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겠으나 그러고도 1년여 동안 대체 저의 영성은 그대로 마비되었던 것일까? 저는 그 일로 회개하지 않았고, 잘못이라 여기지 않은 것인지, 외면했던 것인지 어떻게 저럴 수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 영혼의 마비는 그처럼 무기력하게 한다. 우리의 신앙이나 믿음이란 게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오늘 본문은 다윗의 이러한 소행을 기술함으로 누구도 그러한 죄의 자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성경은 이를 알고 계셨다. 우리가 불의하다고 할 때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을,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눅 16:9).” 이는 앞서 불의한 제자의 소행으로 주인의 뜻을 짐작할 수 있다. 이야기의 표면은 불의한 종의 어처구니없는 살 궁리다. 저의 소행은 오히려 주인의 것을 잃는 일이었다. 한데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8).” 저의 불의를 지혜롭다고 하신다. 이는 없어질 것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으로 모든 없어질 것은 불의하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12:33).” 곧 ‘이 세대의 아들들’은 불의하나 빛의 아들들보다 낫다. 비록 우린 미련하고 천하고 보잘것없으나 나름 복 받은 자들의 삶보다 낫다. 

 

주인의 성품을 바로 안다는 것,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붙든다는 것은 곧 오늘 다윗의 죄가 단순히 간음하고 살인하고 거짓말로 일을 숨긴 것 이상으로 무겁다. 이는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자의 소행보다도 못한 것이었다. 이에 하나님은 "그 장례를 마치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를 왕궁으로 데려오니 그가 그의 아내가 되어 그에게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27)." 곧 우리 모두는 그러하다. 결국 죄는 토설 돼야 하고 이를 담고 있으면 악하다. 숨어서 자신은 끝내 이를 인정하는 것이 된다. 아마도 훗날에 다윗이 고백으로 지었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셀라)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32:3-5).

 

숨은 죄를 씻는 길은, “예루살렘아 네 마음의 악을 씻어 버리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네 악한 생각이 네 속에 얼마나 오래 머물겠느냐(렘 4:14).” 우리가 비록 사느라 살면서 여러 죄를 범하나 돌이킬 수 있는 기회 또한 열어놓으셨다. 오늘도 이 하루를 더하신 것은,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네 나귀를 이같이 세 번 때렸느냐 보라 내 앞에서 네 길이 사악하므로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나왔더니 나귀가 나를 보고 이같이 세 번을 돌이켜 내 앞에서 피하였느니라 나귀가 만일 돌이켜 나를 피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벌써 너를 죽이고 나귀는 살렸으리라(민 22:32-33).” 발람의 경우가 우리로 돌아보게 한다. 결국 저는 제 고집대로 행했으나…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 또 너희가 너희 조각한 우상에 입힌 은과 부어 만든 우상에 올린 금을 더럽게 하여 불결한 물건을 던짐 같이 던지며 이르기를 나가라 하리라(사 30:21).”

 

말씀이 내 곁에 계실 때, 이에 청종하고 주의하고 돌이켜 주를 바라는 것이 복이다.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행 3:26).” 오늘도 다윗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를 들추게 한다. 그리고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돌아보게 한다. 이처럼 말씀 앞에 앉히시는 것은 곧 우리는 모두 자신의 행실을 들고 주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이를 위해 우린 무엇으로 준비할까? 어떤 대책을 세워야 할까?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엡 6:8).” 오늘 이 모든 것, 이 아침의 이와 같은 다윗의 이야기로 자신을 돌아봄으로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7).”

 

주께 하듯 하며 산다면, 곧 그리스도 앞에 나 혼자 서 있고, 주는 나만 상대하고 계신다고 생각할 때 사람들의 이런저런 가치나 기준이 아닌 그리스도의 절대 선을 기준할 수 있다. 분명한 사실은 믿음으로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입는 것이 사실이고, 이를 구원이라 하지만 그리하여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들은 저마다의 상급이 다 다르다는 것이다.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전 3:14-15).” 이를 오늘의 시각으로 이해하려면 차등이니 뭐니 하는 부정적인 생각이 들겠으나 천국은 죄가 없음으로 서로의 모양과 크기로 마음 상할 일도 없다. 다만 각자의 누림이 다를 뿐이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그러니 할 수만 있으면 마치 내 앞에 카메라가 돌고 있는 것처럼, 내 앞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선을 행하고 악을 멀리하는 것이 지혜로운 자의 삶이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하여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8-10).”

 

오늘 다윗의 일련의 상황을 보면서 누구라도 그와 같을 수 있다는 것에 치를 떨며, 다윗의 읊조림을 듣는다.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

(143:8).

 

아니면 내가 어찌 그 가는 길을 장담할 수 있을까?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마 20:15).” 주의 살아계심 앞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게 된다.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

(1).

 

그러므로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전 7:20).” 이는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사람이 하나님께 변론하기를 좋아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욥 9:2-3).” 욥의 진술이 옳다. 내 무엇으로 나를 변호할 수 있을까? 우리는 받은 은혜로 산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주의 눈 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원수가 내 영혼을 핍박하며

내 생명을 땅에 엎어서

나로 죽은 지 오랜 자 같이

나를 암흑 속에 두었나이다

(2-3).

 

날마다 진다. 또 어그러져 화를 내고 좌절을 하고 우울감에 빠지기도 한다. 돌이켜 주 앞에 바로 서야지, 하고 다짐하고 일어서기 무섭게 죄가 기다리고 있다. 이는 우리가 상대할 수 없는 상대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그러므로 주의 권능으로가 아니면 나는 나를 이길 수 없고 감당할 수도 없다. 이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스스로 안다, 선줄로 여길 때 이미 쓰러질 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하며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참담하니이다

(4).

 

여기서는 주가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고 그의 긍휼하심만을 붙들고,

 

내가 옛날을 기억하고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읊조리며

주의 손이 행하는 일을 생각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셀라)

(5-6).

 

주께 아뢰고 주가 어찌 나를 오늘에까지 인도하셨는다를 생각하며, 기도하고 묵상하고 생각하고 다짐하면서 앞만 보고 나아가는 것이다.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사 55:2).” 주가 채우시고 만족하게 하실 것이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107:9).

 

곧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묵묵히 우리는 우리 앞에 두신 삶을 사는 것으로, 주만 의지하고 그때마다 주가 맛보게 하시는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것.

 

여호와여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내 영이 피곤하니이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을까

두려워하나이다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

(7-8).

 

할 때 주는 사모하는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신다고 하셨으니,

 

여호와여 나를 내 원수들에게서 건지소서

내가 주께 피하여 숨었나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

주의 영은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

(9-10).

 

이에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 18:10).” 이와 같은 말씀으로 말씀만 의지하며 나아갈 뿐이다. 하면,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니

그의 힘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

(59:9).

 

곧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이시기를, 그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삼으시는 이심을. 그러할 때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출 15:2).” 이것이 나의 간증이 되고,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레 26:12).” 이것은 나의 보증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면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이것은 나의 남은 생의 사명이 되는 것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살리시고

주의 의로

내 영혼을 환난에서 끌어내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나의 원수들을 끊으시고

내 영혼을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멸하소서

나는 주의 종이니이다

(11-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