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삼하 12:22-23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 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 …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시 144:3-4, 15
한순간의 정욕으로 엄청난 죄에 빠졌던 다윗에게 기어이 하나님의 사람 나단이 찾아왔다. 저는 지혜로운 이야기로 예를 들어 악한 자가 다윗임을 지적한다.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7).” 저의 이와 같은 지적으로 단박에 죄를 인정하고 회개한다. 그러나 밧세바 사이에서 낳은 아이는 그로 인하여 죽는다. 다윗은 아이를 위해 금식하며 기도하다 죽음 뒤에는 이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하나님은 밧세바 사이에 새로 아이를 주시니 저가 솔로몬이었다.
하나님은 먼저 나단을 보내 이를 알게 하셨다. 다윗은 1년여 가까운 시간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았다. 그와 같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다시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곧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이내 우리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죄는 결국 하나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다.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 같이, 네 죄를 안개 같이 없이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사 44:22).” 오늘도 이는 여전하여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미 7:19).” 하나님이 상대하신다. 우리는 이를 감당할 수 없다. 천하의 다윗도 그러하였다. 결국 나단을 통해 이를 알리셨고, 저는 주 앞에 인정하였다. 그렇게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벧전 3:18).”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사는 게 어렵다. 겉으로는 화려하나 그 속은 다들 문드러져 곪아터졌다. 참 감사하고 다행한 일은 하나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일이다.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요 17:12).”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자기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시고, 저들의 죄를 해결하시기까지… 어쩌다 몇 번씩 하나님의 계획이 수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은 그와 같은 섭리 가운데서 궁극적으로 자신이 또한 그와 같은 죄를 담당하심으로 구원을 완성하셨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이에 따른 바울의 변론은 깊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31-32).”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구의 이런저런 시달림의 소식을 들으며 나는 저에게 우리와 같이 예배를 권하였다. 어디에 살든, 줌으로 예배가 가능하니… 저는 자신의 숨은 삶으로 망설였고 나는 화상 없이 소리로만도 괜찮다고 일렀다. 어찌 마음을 잡을지는 알 수 없지만, 저에게 늘 들려주는 말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는 것이다. 이에 따른 믿음은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13-14).” 그 사랑은 처음부터 사랑하신 것이고, 나를 먼저 사랑하신 그 사랑이다.
이에 죄를 인정하고 자신의 용서를 구할 때 하나님은 그 어떤 죄라도 능치 못하심이 없으시다. 늘 우리의 죄성은 눌어붙어 지긋지긋하게 떨어지지 않으나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오 다오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스올과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물로 채울 수 없는 땅과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불이니라(잠 30:15-16).” 우리에겐 진정한 회개뿐이다.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신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107:9).
저마다 그 고집이 있고 기질이 있고 성향이 달라서, 나는 자주 누구와 어떤 일로 부딪치면 입을 다문다. 이는 형제, 가족 간에도 예외는 아니다. 뭐라 한들 들리지 않고 전달이 어려운 것을 알면 더는 저와 상대하지 않고 주께 아뢴다. 언제부턴가 그것이 빠르다. 이는 아마도 ‘아픈 아이’와의 교제에서 얻은 교훈일지도 모른다. 일주일에 한두 번 같이 점심을 먹고 차를 한 잔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솔직히 나는 뭐라 이르기보다 듣기에 더 열중한다. 그리 되었다. 처음에는 어찌 말로다 설명하고 거듭 되풀이하면 낫지 않을까 하던 것인데, 내가 닿을 수 없는 지점의 사고와 주장에 있어서는 아이든 어른이든, 가족이든 남이든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 때론 뭘 그럼 굳이 만나고 대화하고 또한 돌아서서 허무해할까, 생각하다 그것으로 내게 맡기신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주의 이름을 부른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내가 나도 이기지 못하는 것을 두고 누구 일로 씨름한들 저와 담판을 지을 수는 없다. 성령이 하신다. 나는 이제 확신한다. 그의 역사와 사실을 바울은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5-6).” 해서 우리의 능력은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3-4).” 성경은 안 되는 것을 된다고 하지 않으신다.
주목할 표현은 8절에 나오는 현재시제 ‘확증하다’이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7-8).” 수천 년 전 저의 설교가 오늘 나에게도 적용이 되는 것이다. 곧 우리 안에 예수를 나의 구주로 인정하고, 믿음으로 살게 하신 이 놀라운 사실이 더욱 기이하다. 안 믿는 게 마땅하고 오늘과 같은 현대사회에서(모든 시대는 그때마다 현대사회였겠으니) 성경보다 허황된 주장이 또 어디 있겠나?
그런데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을 부어주신 데 따른 경험을 갖고 산다는 것,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8:9-10).” 오늘 본문에서도 밝히는 바, 몸은 항상 죄로 인하여 죽으나 우리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산다. 이 모두는 성령으로 말미암음이다. 그렇게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5:5).”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120:1).
그러므로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이는 성경이 제시하는 인생살이의 기본자세이다. 누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되돌릴 수 있겠나?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그러므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3-14).” 내가 즐겨 묵상하는 말씀으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신앙의 기본이었다.
이는 극한 슬픔도 견디게 한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약 4:15-17).”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내 아무리 여러 논리로 반박하고 나의 주장을 펼치며 불순종의 자리에까지 들어간다 해도,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 2:19-20).” 하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이것이 주의 사랑의 기본이다. 그런데 끝까지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10).”
말씀이 우리 속에 있다는 것,
나의 반석이신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며
손가락을 가르쳐 전쟁하게 하시는도다
(144:1).
나로 가르치시고 맞서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연단 가운데 은혜와 축복은 선명하여진다. 곧 욥의 고백과 같이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오늘이 나로 힘들게 하고 어렵게 한다 해도, 못하면 못하는 대로, 좌절과 실패 중이면 그 자리에서 우리는 단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8:10-11).” 주가 주를 위하며 주를 위하여 나를 사랑하심인데, 나의 그 어떤 허물이 주의 사랑을 가로막을까!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 구르는 돌은 이끼가 끼지 않고, 매일 바닷물에 시달리는 몽돌은 그 속으로 물이 스며들지 않는다. 이는 우리의 안전과 승리의 보장이다.
여호와는 나의 사랑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방패이시니
내가 그에게 피하였고
그가 내 백성을
내게 복종하게 하셨나이다
(2).
나의 사랑, 요새, 산성, 방패, 나의 피할 곳이니,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27:1-3).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체험하고 확신하고 내 마음에 간직하고 살 수 있다는 것보다 더 놀라운 기적이 또 있을까? 누구에게 위로하며 들려주려 하였던 말도 그것이다. 아무리 사람들이 괴롭히고 생활이 나를 힘겹게 한다 해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7-58).” 부디 사는 날 동안 그러하기를.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 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
(144:3-4).
이와 같은 고백은 성경 곳곳에서 드러난다. “사람이 어찌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어찌 의롭겠느냐(욥 15:14).” 그럼에도,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8:4).
이에 주의 사랑은 측량할 길이 없다.
여호와여 주의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며
산들에 접촉하사 연기를 내게 하소서
번개를 번쩍이사 원수들을 흩으시며
주의 화살을 쏘아 그들을 무찌르소서
위에서부터 주의 손을 펴사
나를 큰 물과 이방인의 손에서
구하여 건지소서
그들의 입은 거짓을 말하며
그의 오른손은 거짓의 오른손이니이다
(144:5-8).
범사에 성실하되 주를 인정하고 도우심과 은혜를 구하며 사는 삶으로 충분하였다. 이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곧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렘 10:23).” 이 한 구절의 말씀만 바로 붙들어도 그처럼 사느라 아등바등 기를 쓰며 ‘영끌’로 집을 사고, 누리려 애쓰며 살지 않을 텐데. 우리의 행복은 주의 뜻을 알고 주의 일을 수행할 때이다.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마음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내가 미워하는 것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슥 8:16-17).” 내가 주를 사랑함으로 나의 나 됨을 사랑하고, 내 몸 같이 이웃도 사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고로,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열 줄 비파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주는 왕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자시요
그의 종 다윗을 그 해하려는 칼에서
구하시는 자시니이다
(9-10).
이는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극진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만국의 모든 신은 헛것이나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도다(대상 16:25-26).” 어제 설교원고 초안을 작성하면서 이 말씀을 토대로 하였던 것을 생각한다. 하나님의 통치는 처음부터 있었고 영원까지 함께 하실 것이다. 이에,
이방인의 손에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
그들의 입은 거짓을 말하며
그 오른손은 거짓의 오른손이니이다
우리 아들들은 어리다가 장성한 나무들과 같으며
우리 딸들은 궁전의 양식대로 아름답게 다듬은
모퉁잇돌들과 같으며
우리의 곳간에는 백곡이 가득하며
우리의 양은 들에서 천천과 만만으로 번성하며
우리 수소는 무겁게 실었으며
또 우리를 침노하는 일이나
우리가 나아가 막는 일이 없으며
우리 거리에는 슬피 부르짖음이 없을진대
(11-14).
이와 같은 보장된 삶이 성도의 삶이다. 그러므로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7-9).” 삶이 곧 경배요 찬송이고 예배인 것을.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삼고 사는 삶은 헤아릴 수 없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축복의 삶이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이에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엡 1:3).” 이는 이미 창세전에 예비되어진 것이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4-6).” 그러므로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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