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전봉석 2022. 6. 28. 05:05

 

압살롬이 다윗의 부하들과 마주치니라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날 때에 압살롬의 머리가 그 상수리나무에 걸리매 그가 공중과 그 땅 사이에 달리고 그가 탔던 노새는 그 아래로 빠져나간지라

삼하 18:9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시 150:6

 

 

이 모든 일련의 사태는 다윗이 죄를 범하여 그 왕국에 닥친 환난이다. 13-20장은 압살롬의 반역과 죽음을 기술한다.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과 그 무리를 추적하다 상수리나무에 머리가 끼어 매달리게 되었다. 당시 저의 머리의 풍성함과 그 고운 머릿결의 윤택함은 자기애를 상징한다. 한데 저의 최후가 어처구니없게도 그의 자랑이 나무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는 꼴로 죽게 되었다. ‘우연’ 같으나 ‘섭리’다. 하나님의 섭리는 이처럼 우리의 허를 찌른다.

 

9절에 보면 하필 “압살롬이 다윗의 부하들과 마주치니라.” 서로 그렇게 마주하기도 쉽지 않은 일인데, 이에 당황한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자리를 피해 도망치려다 그만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날 때에 압살롬의 머리가 그 상수리나무에 걸리매” 이 우스운 꼴을 어찌 누가 예상이나 했겠나?

 

흔히 이런 것을 우연이라 여기는데, 7절에 비추어 그 전쟁에 참가한 수가 서로가 수만 명에 이른다. 그런 가운데 압살롬이 다윗의 부하들과 마주치게 될 확률이 몇이나 되겠나? 흔히 말하는 우리의 우연은 우연이 아닌 필연으로 하나님의 섭리다. 예수님은 당시 한 사건을 두고,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하고 물으셨다(눅 13:4). 오늘에도 이러한 사건은 비일비재하다. 개인적으로 이런저런 우연한 일이 생긴다. 한데 이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은 충격적이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5).”

 

곧 우리 하나님은 그 어떤 일도 모르신 게 없다. 그 모든 일이 주의 주관하심 아래 놓였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 10:29).” 이처럼 오늘 압살롬이 상수리나무에 달려 바동거리다 칼에 찔려 죽었다. ‘어쩌다 어른’이 됐다거나 어쩌다 이런 일이 생겼다면서 서로들 대수롭지 않은 듯 툭툭, 털어버리라고 이르곤 한다. 하지만 그와 같은 우연 속에 감춰진 하나님의 섭리를 아는 것이 참 신앙이고 지혜이다. 애매하고 막연하여 때론 원망스럽기까지 하나,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창 45:7-8).”

 

요셉은 자신이 겪은 그 모든 일의 주관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린다.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치시길, “사자가 움킨 것이 없는데 어찌 수풀에서 부르짖겠으며 젊은 사자가 잡은 것이 없는데 어찌 굴에서 소리를 내겠느냐? 덫을 땅에 놓지 않았는데 새가 어찌 거기 치이겠으며 잡힌 것이 없는데 덫이 어찌 땅에서 튀겠느냐? 성읍에서 나팔이 울리는데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행하심이 없는데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 이와 같은 현상들을 가벼이 여겨 ‘그럴 수 있는 일’로 치부한다면 그 일이 알리는 바를 더 큰 강도에서 마주해야 하는 것이다(암 3:4-6).

 

곧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 1:11).” 오늘 우리가 여기에서 이처럼 사는 이 모든 것이 “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4-5).” 이 놀라운 섭리를 깨달을 때 복이 있다.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압살롬의 머릿결은 저의 자랑이었으며 아름다움의 상징이었다. “그의 머리털이 무거우므로 연말마다 깎았으며 그의 머리 털을 깎을 때에 그것을 달아본즉 그의 머리털이 왕의 저울로 이백 세겔이었더라(삼하 14:26).” 요즘도 머릿결을 돌보고 건사하느라 많은 사회적비용이 들지만, 우리의 소중한 것 그 자랑의 귀한 것이 도리어 파멸을 초래하는 경우를 왕왕 본다. 많은 재물, 저마다의 자랑 그런 것으로 누구도 영원한 생명을 살 수는 없다.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그가 영원히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인가

(시 49:6-9).

 

오히려 그것이 오늘의 터무니없는 상황을 연출하여 우리로 곤란에 빠뜨리는 것처럼, “그들이 그 은을 거리에 던지며 그 금을 오물 같이 여기리니 이는 여호와 내가 진노를 내리는 날에 그들의 은과 금이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하며 능히 그 심령을 족하게 하거나 그 창자를 채우지 못하고 오직 죄악의 걸림돌이 됨이로다(겔 7:19).” 그런 걸, 아등바등 죽기 살기로 매달리며 평생을 사는 모습을 보면 우리 인생의 허무함도 가히 그 결국을 짐작할 수 있겠다. 하여 주님은 예수를 따르겠다고 온 한 청년에게 일러,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저의 마음이 순전하였으면 그까짓 거 마땅히 그리하고 따랐을 텐데,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마 19:21-22).”

 

그러니 스스로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손에 쥐고, 놓지 못하면서도 주를 따르겠다고 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적절하지 않다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고 살았더라는 증거다. 그러면서도 괜찮다, 괜찮다 하고 자신을 감싼다. 하지만 성경은 일관되게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지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주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라(습 1:18).” 곧 우리가 소중히 여기던 것이 실제 우리를 구원할 수는 없다. 넉넉하고 적당한 것보다 모자라고 궁벽한 살림이 주를 더 온전하게 바라게 하는 일은 아이러니 한 일이기도 하다.

 

어제 점심께 문자 하나가 들어왔다. 성인 글쓰기도 가르치는가? 하고 묻는 내용이었고, 여차저차 대화를 나누고 돌아오는 목요일 오전에 우선 만나기로 하였다. 그 가운데 당연히 교육비가 어찌 되는가를 물어서, 따로 정한 것 없고 형편 되는 대로 후원하시면 된다고 하였다. 저는 의아해하며 자신은 영어 학원을 하고 있는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고 하였다. 그리 따지면 나 역시 익숙하지는 않다. 다만 전에 없이 감사한 것은 그 모든 수입원을 주께 돌리는 데 따른 자유로움이다. 한때 교육비가 좀 비싸다 싶게 받으며 아이들을 가르칠 때는 알게 모르게 돈 받는 날을 중심으로 우리의 만남이 이루어졌다면 이제 더는 그런 데 연연하지 않아도 된다.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교회를 이루면서 배워가는 가장 단편적인 훈련은 모두 주께 맡기는 일이다. 물론 이번 일도 우연이다. 어쩌다 저는 입간판을 보았고 그렇게 연락을 취한 것인데…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 다만 주의 뜻이 어디 계신가 하고 기대할 따름이다.

 

주의 일을 하는데 있어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걸림이 되면 됐지 도움이 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오히려 이런 걸 무엇에 쓸까, 하던 것들이 쓰임에 합당한 것을 보면 놀란다. 가령 임대아파트에 살면서 주변을 둘러싼 부유한 아파트와 달리 가난한 형편에서 그 부모들의 가르침에 대한 열망은 때론 눈물겹다. 한데 놀라운 사실 하나를 깨달은 것은 ‘공짜’라는 데 다들 시큰둥한다. 전에 하나님을 멀리하며 글방을 할 때 내가 여느 논술이나 글쓰기보다 배 이상 비싸게 받고 가르친 것은 그와 같은 허영을 알았다. 같은 것도 싼값이면 좋아할 줄 알았는데, 비싸야 뭔가 있는 줄 안다! 그러니 참,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약 5:3).”

 

오늘 나는 ‘압살롬의 머릿결’에서 그것으로 저가 그리 죽을 줄 저 또한 알기는 했을까? 그것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부친을 몰아내고 왕좌에 올라 거드름을 피우는 것에 소용되었을 뿐,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2:2-4).

 

그러니 우리의 가소로움은 한 치 앞도 알지 못하면서 그런다.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롬 13:2).”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은 주의 섭리가 모든 우연과 사소함 속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에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잠 25:2).” 그러므로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3:6).” 어떠하든지, 행여 당장의 억울함과 감당하기 어려움이라 해도.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

(25:7).

 

아니면 내가 무엇으로 주 앞에 설 수 있겠나? 나의 수고와 노력? 그 결과로 얻은 어떤 성과와 자부심? 압살롬의 머릿결과 같은? 아, 그 허무함을 가지고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빌 1:28).” 주를 인정하는 것이 지혜이고 신앙이고 우리로 주 앞에 서게 하는 것이었다. 자주 되새기는 문장 중에 ‘주를 경외하지 않으면 자신을 신뢰하게 된다. 자기주장이 강하다는 것은 주를 경외하지 못함이다.’ 그 결과는 참혹하다.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렘 11:7).”

 

당장은 이익이고 손해 보는 것이 없는 줄로 아나, 잃고 난 뒤에 안다. 돌이킬 수 없는 것을 잃는 슬픔이 그 어떤 소중하였던 것보다 값어치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해서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딤전 6:9).” 스스로 애쓰면 하늘이 돕는다는 세상 말은 거짓이다.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잠 23:4).” 그러니 이 일이 쉽겠나?

 

그래서 성경은 누누이 강조하시는 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이어서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벧전 4:2).”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후 13:11).” 나는 이를 서로에게 허물없이 기도를 부탁할 수 있는 사이로 이해한다. 누가 자궁에 혹이 있어 어떤 수술을 하는데, 앞서 이를 말하고 기도를 부탁한다. 이때 서로는 여자니 남자니 하는 따위의 선입견이 없다. 또 누구는 자신의 치부를 밝히며 그로 인한 어려움을 토로하고 기도로 힘을 얻기를 전해온다. 이때 서로에게는 자존심이 필요가 없다.

 

성도가 서로 문안함이란 차마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일을 알리고, 이는 함께 주 앞에 고하기를 부탁하는 것이다. 누가 이혼을 하고 우울증으로 시달리는데, 중2 딸애도 상담을 요한다며 학교에서 돌려보내는 일이 발생했다. 이를 숨기고 있을 때는 스스로 짊어져야 하는 일이나 ‘서로 문안함’은 이를 같이 주 앞에 내어드리는 일이다. 하여 저를 인도하여 교회로 가고, 그 아이 일로 어제 친구가 전화하였을 때, 나는 훌륭하다고 권면하였다. 그 일로 일요일이 졸지에 쉴 시간이 없는(?) 것을 투덜거리는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누군가 널 위해 날마다 그러하다고 알렸다. 가깝게는 저와 성경공부를 하였던 그 교회 어느 집사로 날마다 종용하고 설득하여 오늘의 저가 있는 것을 설명하였다.

 

곧 우리는 모두 사랑에 빚진 자들이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8).” 이로써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2-3).” 우리의 숨은 보화는 우연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 더러는 이해가 어렵고, 때로는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한데 성경의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의 경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만 바라였고 그 말씀으로 새 힘을 얻었다.

 

오늘 압살롬의 죽음과 다윗의 슬픔을 보면서 어쩌면 이 모든 게 자업자득이겠지만 또한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이루어진 일을 두고 묵상하게 된다. “이르기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더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높은 파도가 여기서 그칠지니라 하였노라(욥 38:11).” 당장의 형통함이 전부가 아닌 것처럼 당장의 슬픔이 영원하지도 않다. 고로 진정한 신앙은 하나님을 높이는 데 있다. “타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으로는 하지 말며 외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술로는 하지 말지니라(잠 27:2).” 이는 우리의 자만이 어떠한가, 알면 간단하다.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사 14:14-15).” 이에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4:11).” 하여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오늘 시편은 이제 마지막 장으로 그 내용은 아주 담백하고 간결하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6).

 

더 무슨 말을 덧붙일까? 이에 우리가 살았다는 것은,

 

짐승과 모든 가축과 기는 것과 나는 새며

세상의 왕들과 모든 백성들과

고관들과 땅의 모든 재판관들이며

총각과 처녀와 노인과 아이들아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의 영광이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심이로다

(148:10-12).

 

그 영광이 땅과 하늘에 뛰어나심을 안다면 다른 무엇이 뭐 그리 중요하여 애지중지하다 결국은 상수리나무에 걸려 죽음을 자초하겠나?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계 5:13-14).” 이는 우리의 영원한 호흡, 숨결이다. 곧

 

여호와여

주께서 지으신 모든 것들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성도들이 주를 송축하리이다

(145:10).

 

이는 하나님만이 그 모든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기 때문이다.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할지어다

(150:1-2).

 

이는,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113:3).

 

이를 앎으로 피를 토하듯 아들 압살롬의 죽음을 두고 슬퍼하면서도 주를 인정하는 다윗의 영성이 위대하다.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은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더라(삼하 6:5).” 그리고 일러,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40:3).

 

저의 뜨거운 환희와 찬양은 광야를 쫓기면서, 또는 온갖 수모와 역경을 지나면서, 스스로가 당하였던 그 사소하고 우연한 일들이 실상은 주의 놀라우신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소고 치며 춤 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3-5).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를 앎으로 주를 경외하고 자신을 신뢰하지 않을 수 있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14:8).” 이와 같은 고백이 어찌 아무나의 것이겠나? 이를 알기에 다윗은 죄를 인정하고 주 앞에 호소한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51:10-12).

 

이에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19-21).” 하면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