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그의 얼굴을 가리고 큰 소리로 부르되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니
삼하 19:4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 1:5-6
저마다의 사연과 목소리로 왕을 에운 군상들을 본다. 더러는 염치없고 더러는 자신들을 과신한다. 어떠하든 그날이 오면 모든 게 드러난다. 누구는 억울함을 호소하고 누구는 죄를 고하고 용서를 빈다. 여기서 옳고 그름을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죽음으로 슬픔에 잠겨 국정을 어지럽힌다. 이에 요압이 충정을 다해 이를 지적하고 왕권을 회복하는데 기여한다. 훗날 다윗은 솔로몬에게 요압을 제거할 것을 당부한다. 앞서 요압의 안하무인격의 태도로 다윗은 마음이 상하였다. “내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 대로 갚으실지로다 하니라(삼하 3:39).”
하나님은 악인이라도 죄 중에 죽어가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이는 다윗의 슬픔으로 알 수 있는 주의 마음이다. “어떤 사람이 요압에게 아뢰되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울며 슬퍼하시나이다 하니(1).” ‘압살롬을 위하여’ 비록 저는 반역을 일으켜 자신을 해하려 하였으나 다윗은 슬픔을 억누를 수 없었다. 이는 하나님의 마음을 연상시킨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겔 18:23).” 우리는 죽어 마땅한 죄인이나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32).” 주님의 마음은 오늘 다윗의 슬픔으로 연상케 한다.
이에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엡 3:12).” 누구와의 대화나 어떤 이에 대해서는 뭐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어 지레짐작으로 마음이 가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안에도 같은 미움이 또는 적대감이 자리하기도 한다. 누가 여전히 회사에서 시비에 얽혀 어려움을 겪고 급기야 도저히 더는 다닐 수 없는 지경을 호소하며 기도를 부탁하였다. 나는 저의 억울함만 들어 상대적으로 저들이 어찌 그러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저들을 위해 기도하며 주의 사랑으로 대해주길 권하였으나 그럴 수는 없는가보다. 그러니 그 속에 분을 품고서야 어찌 자신은 괴롭지 않을까?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겔 33:11).” 어쩌면 이것이 우리로 주 안에서 기뻐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억울함은 물론 미움이 내 안에 있으면 누구보다 우리가 먼저 주의 평안을 누릴 수가 없다. 나는 지금 그 친구가 이 글을 읽을 것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쓴다. 모든 관계는 일방적이지 않다. 하나님의 사랑은 악인도 자신의 악으로 멸망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종종 나의 학창시절을 생각하면 지금도 와락, 눈물이 고일 정도로 슬픔이 치솟을 때가 있다. 그때 앞장서 나를 괴롭히고 못살게 굴던 아이의 모습과 그가 행한 일은 수십 년이 지났어도 생생하다. 어느 선생의 터무니없는 욕설과 가식적인 친절도 기억난다. 심지어 나는 저의 팔자 주름도 기억한다. 하지만 이를 마음에 두고 살 때는 더불어 가식적인 나로서 정작 내가 누구인지를 분간할 수 없었다. 누구나 그와 같은 페르소나 즉 가면을 쓰고 산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를 원하지 않으신다. 하여,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76:10).
이를 자주 글씨로 옮겨 쓰며 더는 아무렇지 않은 것은, 마음이 그것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고 주께 아뢰고 고하였던 것이다. 갚으심은 주께 있고 용서는 우리가 취할 덕목이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더러는 부모에 대한 마음으로, 더러는 유년시절의 씻을 수 없는 슬픔으로, 누구는 지금의 당면한 억울한 시달림으로 고통스러워하나 이를 주 앞에 정직하게 고할 때,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마음의 평안은 전혀 새로운 것이다. 나 한 사람의 행함이 모두를 감동시킬 수도 있다. 가령 “왕이 그 아들을 위하여 슬퍼한다 함이 그 날에 백성들에게 들리매 그 날의 승리가 모든 백성에게 슬픔이 된지라(2).” 하는 오늘 본문을 보면, 마치 “그 날에 백성들이 싸움에 쫓겨 부끄러워 도망함 같이 가만히 성읍으로 들어가니라(3).”
저 하나로 모두의 승전가는 슬픈 전운으로 감돌뿐이다. 문득 여호수아의 결연하였던 자성의 촉구가 생각난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수 24:15-16).” 때론 백 마디 훈계보다 자신의 결연한 태도 하나가 모두를 하나로 이끌 힘을 더한다. 앞에서 에스라가 슬피 울며 주께 죄를 고하자 백성들도 그 앞에 모여 주의 이름을 부른 광경도 연상된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스 10:1).”
곧 우리의 모습 하나가 전해지는 효과는 우리의 생각을 초월한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길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후 2:15-16).” 겉으로의 모습이 대수롭지 않은 것 같으나 그것으로 누굴 속이기기도 하나 그것으로 누구의 본이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이를 안다면 먼저는 하나님 앞에 순전함이 우선이겠고, 그와 같은 일심(一心)으로 날마다의 삶을 일관되게 행하는 것이 중요하겠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17).”
날이 궂고 몸이 무거워 잠시 누웠다가 혼곤한 잠에 들었다. 일어나보니 한 뭉치의 사연이 들어와 있고, 그에 따른 기도를 부탁하는 것이었다. 고통은 의미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도적으로 환난을 제공하신다. 어제도 설교원고 초안을 잡다가 데살로니가교회를 향한 바울의 서신에서 그 의미를 확신할 수 있었다. 가끔 누가 말하길 교회 다니고, 예수 믿고, 누구보다 신앙생활에 정성과 마음을 다하는데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환난과 고난을 주시는가? 하는 억울한 토로를 종종 듣는다. 이에 확신하게 된 것은 첫째, 환난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치유하신다. 더 나은 신앙과 믿음으로 자라가게 하신다. “또한 우리를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시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살후 3:2-3).” 여기서 알게 되는 것은 믿음이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것, 곧 거룩함이 배양되지 않는 믿음은 훗날에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고로 어려움에 처하는 것이 좋을 리는 없으나 그것으로 주의 이름으로 주의 뜻을 살피며 더욱 주를 의뢰함으로, 나를 신뢰하고 내 주장이나 생각으로 하나님의 일을 주도하려 하였던 것을 도려내게 된다. 곧 오늘 우리의 고난은 우리로 낫고 거룩함에 이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합당하신 사랑으로다. 나는 이 말씀 앞에서 문득 공부하러 오는 ‘아픈 아이’를 생각했다. 어느새 3년이 되었는데 여전히 공부할 때면 떼쓰고 울고 심지어 막말도 한다. 하지만 아내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가 틀린 것을 지우고 다시 쓰게 하고, 다 할 때까지 아이가 지랄을 떨어도 상관하지 않는다. 꾸역꾸역 아이는 욕질도 해대면서, 어느새 구구단을 외워 덧셈 뺄셈은 물론 곱셈 나눗셈도 하고 한글도 깨우쳐 동화책도 소리 내어 읽는다. 아이 편에서 선생의 강제성은 환난이다. 눈물 콧물 짜며 억지를 부리듯 막말을 쏟아낼 땐 제풀에 꺾일 때까지 내버려둔다. 조금은 더디고 늦돼도 아이는 자폐도 아니고 미숙아도 아니었다.
저 애의 경우와 같이 오늘 우리의 일도 다르지 않다. 내 뜻대로 할 수 없을 때, 원치 않는 일을 당했을 때 우린 이를 환난이라 하고 고난이라 여겨 하나님 앞에 억지를 쓴다. 때론 막말도 하고 몹쓸 생각도 한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로 환난을 동원하심으로 우리의 몸에 밴 세속성을 씻어내고 죄로 물든 영혼을 치유하신다.
둘째, 우리의 환난은 하나님의 공의를 바로 알게 한다. 그러므로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주의 재림과 심판의 날을 기대하게 된다. 누구도 심판을 면할 수 없다. 아무도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할 수 없다. 그때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6-9).” 가만히 읽고 묵상하면 그 내용 그대로다.
‘나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다. 그뿐인가? ‘환난을 받는 나에게는 안식으로 갚으실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다.’ 이를 위해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즉 재림은 곧 이루어질 것이고 세상은 주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때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실제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부인하고 부정한 자들이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21).” 그러므로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이것이 저들의 형벌이다. 다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주의 공의도 자비도 그곳엔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만으로도 두려운데 저들은 어떻게 들을지.
결국 우리에게 환난을 주심은 세 번째로 주의 안식에 들어가게 하려 하심이었다.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살후 1:7).” 이를 위해서도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설레었고 마음이 조급하기까지 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일러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이처럼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것이 복이었다. 우리의 복이 무언가? 이 땅으로의 삶이 전부라고 한다면 굳이 하나님이어야 할 이유가 있겠나?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눅 6:22).” 진정한 복을 알면 알수록 오늘의 나는 무엇을 바라고 구하여야 하는지를 더욱 더 갈망하게 된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약 5:11).” 그러므로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 1:1-2).
여기서 보면 악은 생물이다. 점진성이 있다. 더, 더, 악을 악으로 여기지 않으면서 악으로 확장한다. 저들은 말씀을 모욕하는 돼지들이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 7:6).” 하여 “미련한 자는 죄를 심상히 여겨도 정직한 자 중에는 은혜가 있느니라(잠 14:9).” 뭐라 이른들 아무 소용도 없는 자들이 늘어가는 이때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그의 결국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악이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게 한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다음에 일어나는 소요는 일일이 열거할 것도 없이 오늘 우리 사회의 모습 그대로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29-31).” 그런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아무렇지도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 된다. “인자야 네가 반역하는 족속 중에 거주하는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겔 12:2).”
그러므로 누구를 같이 할 것인지, “내 아들아 그들과 함께 길에 다니지 말라 네 발을 금하여 그 길을 밟지 말라(잠 1:15).” 그리고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 6:14-16).”
하면 우리는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즐거워하는 자들인데,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 1:8).” 하여,
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들을
스스로 즐거워하며
또 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들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
주의 율례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119:47-48).
곧 우리 삶의 뿌리는,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3).
열매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렘 17:5-8).” 서로의 삶이 상대적으로 우리에게 교훈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마 7:24-25).” 나는 무엇으로 살 것인가? 부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 1:11).” 비록 하는 것도 부족하고 더디고 그릇하여 망치기나 하는 것 같지만, 주가 행하심으로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 1:10-12).” 이처럼 말씀을 찾고 또 찾아가며 나는 안도한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4-6).
이는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마 13:30).” 그때가 오면 모든 걸 다 알게 될 것이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그런 거 보면 매순간이 선택이다.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5-26).” 부디 나 역시 그러하기를. 그리하여,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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