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시편 98편 /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전봉석 2022. 7. 8. 10:33

220710 주일

 

시편 98편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들어가는 말

 

성경의 말씀은 정의할 수 없고 일반화시킬 수 없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여기서도 주목할 부분이 ‘충만하게 하시기를’이란 표현이다.

 

곧 믿음도 선물로 받고, 성화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뤄가고, 영화도 그리스도 예수의 대속과 대언으로 가능하다. 이에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곧 우린 어느 것도 은혜 아니면 얻은 게 없고 이룰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주를 안다, 성경을 안다 하는 것에는 매우 겸허히, 겸손함으로 ‘주가 열어보여 주시는 계시’로만 가능하다.

 

오늘 시편은 이를 우리에게 알린다. 우리는 노력이 더해지면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우린 마치 자신이 이룬 것처럼 여긴다. 그래서도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29).”

 

이에 <하나님의 통치>에 따른 우리의 겸손은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한계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때 겸손은 상대적인 게 아니다. 상대주의가 겸손을 오인하면 서로 견주어 누구보다 나은 성품으로 이해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오늘 본문 앞에서 우린 <겸손의 의미>를 성경적인 근거로 여섯 가지를 먼저 되새기려 한다.

 

첫째, 우리의 겸손은 지식이나 느낌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삶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둘째, 겸손이란, 예수님처럼 살려는 몸부림이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3-24).”

 

셋째, 겸손이란 자긍하지 않는 것이다. 자긍은 자신에 대한 긍지다. 긍지는 자아에 대한 남다른 우월감이다. 자긍하는 자는, “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이들은 당돌하고 자긍하며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들을 비방하거니와 …(벧후 2:10-11).”

 

넷째, 겸손이란 모든 것이 은혜임을 알고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곧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빌 1:2).” ‘은혜와 평강’은 십자가의 모형 그대로, 은혜는 수직적인 관계인 하나님께로부터 오고, 평강은 수평적인 관계인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또한 성화를 이뤄가는 데도, “…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2-13).”

 

다섯째, 겸손이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비판이나 비난을 달게 받는 것이다.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으니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노라(고후 5:11).” 곧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서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딛 2:15).”

 

여섯째, 겸손이란 우리의 숨겨진 모습이 낱낱이 드러날 때가 올 것을 알고 이를 대비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정리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겸손하다는 것은, ① 하나님께 속한 삶이고, ② 그리스도 예수처럼 살는 것이며, ③ 오직 진리를 위해 자긍하지 않고, ④ 모든 것이 은혜임을 알고, ⑤ 자신의 죄를 인정함으로 비난도 달게 받아들이고, ⑥ 숨은 죄가 낱낱이 드러날 것을 대비하여 회개하는 삶이다.

 

오늘 시편은 이를 알리며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그의 기이한 비밀’을 ‘새 노래로 찬송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새 노래’가 무엇이고(1-3), 이를 어떻게 알리는 것이며(4-8), 왜 그래야 하는지(9) 본문을 통해 살피고자 한다.

 

본문이해

95편부터 100편까지, 여섯 편의 시는 하나님의 통치 시이다. 오늘은 네 번째로, 98편의 주제는 <창조자요, 구속자 되시는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를 조명한다. 이를 보면 우리는 날마다 ‘새 노래’로 찬양하게 된다. 이를 이사야서 46장 13절에서는 “내가 나의 공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 그것이 멀지 아니하나니 나의 구원이 지체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나의 영광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시온에 베풀리라.” 하는 말씀과 51장 5-6절을 배경으로, “내 공의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내 팔이 만민을 심판하리니 섬들이 나를 앙망하여 내 팔에 의지하리라.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피라. 하늘이 연기 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 같이 해어지며 거기에 사는 자들이 하루살이 같이 죽으려니와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공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 하는 말씀을 바탕으로 하고, 이어 8절에서 “옷 같이 좀이 그들을 먹을 것이며 양털 같이 좀 벌레가 그들을 먹을 것이나 나의 공의는 영원히 있겠고 나의 구원은 세세에 미치리라.” 하시는 말씀을 토대로 하였다. 이를 시적배경으로 본다. 저자는 불분명하다. 70인 역에서는 다윗으로 본다. 혹자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누군가의 시로 저가 하나님이 베푸셨던 은혜를 회상하며 쓴 시라 주장하기도 한다.

 

어쨌든 오늘 시는 구체적으로 4연으로, 1연을 1절 상반절로 ‘새 노래로 하나님께 찬양하라’는 초대로 시작하여, 2연은 1절 하반절로 3절까지에서 ‘구체적인 하나님의 사역’을 기록하고 있다. 3연은 4-8절로 그럼 우리는 ‘하나님을 선포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를 시인은 각 구절마다 ‘찬송할지어다, 노래할지어다, 소리칠지어다, 외칠지어다’ 하고 외친다. 마지막 4연은 9절 한 절로, ‘종말론적인 심판’을 조명하며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낸다.

 

우리는 이를 세 가지로 압축하여 첫째, ‘새 노래’에 대하여. 둘째는 이를 선포한다는 의미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셋째는 하나님의 심판과 공의에 대하여 집중하고자 한다.

 

1. 새 노래: 은혜와 감사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1a).”

 

① “그는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의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음이로다(1b).” 하는 시인의 표현과 같이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주의 이름을 위하여’ 행하신 것이다. 이를 로마서 1장 5절에서 보면,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에베소서 1장 9절,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히브리서 6장 10절,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 요한계시록 1장 6절,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이를 시인은 기이한 일로 보았다. 곧 우리를 위한 기도는 ‘그의 구원’이다. “여호와께서 그의 구원을 알게 하시며” ② “그의 공의를 뭇 나라의 목전에서 명백히 나타내셨도다.” 곧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23:3).”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그가 이스라엘의 집에 베푸신” 것은 ③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을 기억하셨으므로 땅 끝까지 이르는 모든 것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하고 밝힌다. 여기서 <기이한 일 세 가지>,

 

첫째,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구원하신 것

둘째,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를 뭇 나라에 알리시기 위한 것

셋째,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인자와 성실하심이란 것

 

‘새 노래’는 무엇이 될까? 이를 알면 날마다 은총이 새롭다는 것이다. 오늘은 오늘의 은혜가 있다. ‘광야의 만나’처럼 날마다 부어주시는 ‘새 노래’가 필요하다. 묵상과 감사는 필연이다. 늘 같은 일상이도, 가령 엊그제 잔칫상을 받았다고 며칠씩 굶지는 않는 것처럼, ‘새 노래’는 끼니마다 마주하는 식탁과 같다. 하여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3-24).”

 

구원이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한 것임을 알았다.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겔 36:22).” 하여,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은혜가 큰 사람은 감사도 크다.

 

2. ~할지어다: 선포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소리 내어 즐겁게 노래하며 찬송할지어다

수금으로 여호와를 노래하라

수금과 음성으로 노래할지어다

나팔과 호각 소리로 왕이신 여호와 앞에 즐겁게 소리칠지어다

바다와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주하는 자는 다 외칠지어다

여호와 앞에서 큰 물은 박수할지어다

산악이 함께 즐겁게 노래할지어다

(4-8).

 

모든 구절마다, ‘~할지어다’ 하는 명령형이 붙었다. 이는 선포다. ‘할래? 하지 그래?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따위의 동의를 구하거나 설득을 이끌어내는 표현이 아니다. 한 마디로 구원은 기쁨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는 타협이 없다. 그런데 교회들은 시대적 흐름에 따라 다양한 프로그램을 위해 설교는 줄이고, 설교의 용어도 선포에 따른 명령형이 아니라, 청유형으로 바뀌었다. 청중들이 선포보다 권유를, 명령보다 자기 선호를 바라기 때문이다. 엄연한 사실은 예배가 청중을 위한 게 아니라 하나님께 향한 것이고, 설교는 그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온 땅이여(4), 수금으로… 수금과 음성으로(5), 나팔과 호각 소리로(6), 바다와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주하는 자는 다…(7) 큰 물… 산악(8) 등이 그리해야 하는 것은 만유의 주가 누구인지 알 게 한다.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97:12).” 지난주일 함께 나눈 말씀의 핵심이다. 그 대상은 통치자시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주의 뜻은 분명하시다.

 

3. 하나님의 공의: 심판

“그가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로다 그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공평으로 그의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9).

 

하나님의 공의는 궁극적인 심판으로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의 심판은 공정하고, 정의로우며, 온전하시다. 그는 ①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고, ② 공평으로 그의 백성을 심판하실 것이다.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9).” 이는 하나님이 독생자로 이 땅에 오심으로 죄인의 몸으로 십자가의 형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임을 당하셨다.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6).” 이는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계 21:27).” 하신 자들로서의 자격이 된다. 그럼 이제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5).” 곧 세상을 보면서 그에 따른 경각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5-16).”

 

그 특징은 간단하다. “그들이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며 그릇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는도다(벧후 2:18).” 안 믿는 자들과 어울릴 때 믿는 자로서 무엇이 불편한지를 살펴야 한다. 우리에겐 겸손으로 받는 ‘날마다의 은혜, 새 노래’가 필요하다. 이를 만유의 주 앞에서 뭇 나라들을 향해 선포해야 하는 사명을 가졌다. 하나님의 공의는 전파되고 실현될 것이다. 하여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딤전 4:14-15).” 이는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선포하시는 명령이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그는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의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음이로다

여호와께서

그의 구원을 알게 하시며

그의 공의를 뭇 나라의 목전에서

명백히 나타내셨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집에 베푸신

인자와 성실을 기억하셨으므로

땅 끝까지 이르는 모든 것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1-3).

 

그가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로다

그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공평으로 그의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

(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