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시편 100편 /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심과 성실하심

전봉석 2022. 7. 28. 08:23

220731 주일

 

시편 100편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심과 성실하심

 

시 100:1 [감사의 시]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시 100:2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시 100:3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시 100:4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시 100:5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들어가는 말

 

사사시대의 특징은 한 마디로 “저들이 왕이 없어 자기들 좋을 대로 예배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통치가 없는 곳에 무작위적인 자기 선호가 판단의 기준이 됨을 뜻한다. 오늘 우리의 도덕적 타락과 영적 무능함도 다르지 않다. 우상숭배가 일상적이고, 신상을 만들고, 거룩을 도모하려 드는 교회와 성도가 다반사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17:6, 21:25).” 오늘 우리는 다른가?

 

우리 삶에 왕이 없다. 스승이 없는 시대다. 부모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아버지 부재의 가정이 늘고 있다. 이를 현대주의로 착각한다. 지혜자는 말하길, “내 아들아 여호와와 왕을 경외하고 반역자와 더불어 사귀지 말라(잠 24:21).” 예전에 우린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 하여 스승과 부친과 왕을 하나로 높이었다. 한데 요즘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때 성경의 이와 같은 경고를 표지로 세우면 어떨까?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신 30:15-18).”

 

언제부턴가 우리 삶에 경고판이 없다. 각자 자기 좋을 대로 하고, 자기 선택을 우선하며, 서로는 독려하기를 ‘네가 행복하면 돼!’ 한다. 과연 그런가? 시편 16편 11절에 보면,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곧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은 정해진 노선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의미다. 한데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겼으므로 그 죄로 말미암아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니라(대하 24:18).” 보면, 열에 아홉은 문제가 있는 아이에게 문제가 있는 부모가 있었다. 조상을 탓하라는 소리가 아니다. 저들의 죄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우리 조상은 어떠하였나? 로마서 1장 21절에서 23절을 보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우리나라만큼 오만 잡신이 득실거리는 나라도 드물 정도다. 일본과 맞수를 이루듯 미신이 넘쳐나고 그 결과로 자살률 1, 2위를 서로 다툰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온갖 신은 다 섬기면서 툭하면 자살을 선택한다.

 

이는 ‘통치’가 없어서이다. 이는 규범이 될 만한 스승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기능적인 선생은 넘쳐나도 참된 길로 이끌려는 스승은 사라졌다. 부모의 역할이 제한되고, 각자 개인의 의사가 우선시되면서,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아니한다.’ 이는 세계적인 추세다. 대형교회들이 박물관이나 유흥업소로 팔려나간다. 그런 중에도 작은 개척교회는 개인의 사생활이 너무 노출되는 걸 꺼려, 사람 많은 큰 교회로들 몰린다. 적당한 거리에서 ‘친절한 타인’으로 겉치레의 교제만 있다. 노인들만 남은 교회가 있고 청년들만 모이는 교회도 있다. 서로의 문화가 다르기 때문이란다. 교회 양극화가 성경의 참 교회를 훼손하고, 성도의 교제를 제한한다. 죄란 말씀의 통제를 벗어난 모든 것이다. 시인은 고백하기를,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 119:11).”

 

자주 언급하지만 말씀은 줄고 새로운 찬양이나 사교적인 교제가 늘어가는 추세다. 순간 예수님의 말씀이 머쓱하게 들린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그럼에도 큰 교회들은 점점 더 확장하여 기업형구조를 이루고, 공공연히 이제는 개척교회의 시대는 지났다고 한다. 다시 성경으로 눈을 돌리면,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고전 5:6-7).” 곧 예수의 십자가 보혈이 점점 고리타분한 진리로 전시되는 것 같다.

 

바울은 비탄에 젖은 목소리로 외친다.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2).” 그러니 우리도 뭔가 새로운 모색을 해야 한다는 식으로 교회도 신앙도 믿음의 본질도 현대인들의 구미에 맞게 바꾸려 한다. 한 번 더, 바울의 애끓는 목소리로 들어보자.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엡 4:1).”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살전 2:12).”

 

오늘 앞서 이와 같은 현실을 논하는 것은 그럼에도 주가 오늘도 심판을 미루고 주의 재림을 늦추시는 까닭은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시 100:5).” 오늘 시인이 알리는 주의 성품을 인함이다. 오늘 시편을 통해 우리는 “돌아서서 유익하게도 못하며 구원하지도 못하는 헛된 것을 따르지 말라 그들은 헛되니라(삼상 12:21).” 하시는 성경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려 한다.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2:8).” 이를 명심하면서 오늘 시편으로 들어가자.

 

본문이해

 

오늘 시편은 하나님의 신정(神政) 시, 95편에서 100편까지 가운데 마지막 장이다. 오늘 시편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에 대하여 강조한다. 곧 하나님의 전우주적인 통치는 그의 인자와 성실하심으로 유지되고 있다. 다섯 구절로 짧은 편인데, 3연으로 구분하여 1연은 1-2절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환희와 기쁨’을 찬양하며 온 땅을 초대한다. 2연은 3-4절로, ‘하나님의 창조와 목양, 즉 자녀들을 향한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찬양한다. 3연은 5절 한 구절로 우리 하나님의 성품인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이 영원하다는 것을 선언한다.

 

곧 아무리 때가 악하다 해도 오늘도 우리에게 이와 같은 날을 허락하심은 돌이켜 ‘주를 찬양하는 자들’로 주의 잔치에 들어오기를 바라심이다. 오늘 시편을 보면 시어로 사용되는 표현들이 ‘즐거움, 부르심, 기쁨, 노래, 감사, 찬송, 송축’ 등의 용어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우리가 누릴 ‘하늘나라의 축제’인 것을 알게 한다. 이는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마 22:1-3).” 결국 우리가 들어갈 천국 잔치는,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계 19:9).” 하고 우리의 최종적인 종착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우리는 결코 죽음으로 끝나는 인생이 아니다. 우리가 때로 사느라, 사는 데 지쳐 눈물지을 때도 있는데… 선지자 느헤미야는 외친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 8:9-10).” 하고 선포한다. 다시 정리하면,

 

첫째, 날마다 우리의 날은 리허설과 같이 주의 성일을 예비한다.

 

둘째, 즐거움으로 ‘항상 기뻐하라’ 하신 것과 같이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도 나누어야 한다. 즉 어떤 어려움을 안고 교회를 찾는 이들을 위해 자리를 내어주어야 한다.

 

셋째, 이 날은 항상 주의 성일이다.

 

넷째, 근심할 게 없다.

 

다섯째,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이다.

 

특히 공예배로 모이는 오늘 주일은,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시 118:24).” 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인생은 아직 시작도 안 했다. 실제 공연은 아직 시작도 안 됐다. 그렇지만 우린 본 공연과 같이 리허설을 하는 연주자들과 같다.

 

이에 1-2절은, 우리의 참 기쁨과 감사를 알리고 있고, 3-5절까지는 그 기쁨을 누리는 데 있어 독특한 특징을 알게 한다. 오늘은 이 두 가지를 살피고자 한다. 곧 첫째, 우리의 참 기쁨과 감사를 알고, 둘째로는 우리의 기쁨과 하나님의 성품의 특징을 살필 것이다.

 

1. 우리의 참 기쁨과 감사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시 100:1-2).”

 

보면, 앞서 언급했던 오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처방전 같다. “온 땅이여” 하고 외친다. 이는 특정 성도들만을 향한 게 아니다. 본 공연이 시작되면 온 땅이 놀라고 경이로워할 것이다. 이에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그럴 수 있는 실력을 쌓아야 한다. 무슨 공연을 앞두고 단원들이 수많은 시간을 준비하고 또 같은 것을 연습하고 연마하여 실력을 쌓는 것과 같이 ‘즐거운 찬송’을 여호와께 부를 수 있는 실력이 되어야 한다. 하다못해 학예회를 준비하는 아이들도, 또는 무슨 오케스트라 연주공연을 앞둔 연주자나 배우들도 온통 그와 같은 공연을 준비하느라 숱한 시간 여념이 없다. 단 몇 시간의 공연을 위해 몇날며칠 숱한 시간을 갈고 닦아 실력을 쌓는데, 하물며 우리는 ‘영원한 즐거움’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러했을 때,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여기서도 세 가지 실력, 첫째는 섬김. 둘째는 노래-찬양. 셋째는 나아감. 이를 주목하자.

 

첫째, 섬김.

 

마음만 먹으면, 돈만 있으면, 아무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더욱이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우리는 어떻게 연습할 수 있을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9).” 눈이 안 보이는 하나님을 섬기는 연습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연마하는데, 실질적인 강도는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 12:31).” 그러할 때 첫째 되는 계명은,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29-30).”

 

도대체 눈에 보이지도 않고 실상도 없는 하나님을 어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란 소린가? 뜬구름 잡듯 관념적으로? 개념으로나? 혹은 자기 기분으로? 그게 아니다. 우리가 그와 같은 실전을 위해 오늘 우리 곁에 두신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데 그 이웃을 어떻게 사랑하느냐? 내 몸을 사랑하듯이 하란 소리다. 즉 우린 얼마나 이기적으로 자기를 위해 사는가? 좋은 음식, 옷, 집, 차 등등 자기 몸을 위해서라면 누가 사치고 허영이라 한들 괘념치도 않는다. 그렇게 최소한 그렇게 자기 몸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해야 하고, 이는 결국 우리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있어 그 사랑의 실력이 되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고백만으론 사랑이 아니다. 믿는다는 믿음만으로는 아니라 하셨다. 그러니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8).”

 

믿음은 실상이 없다. 사랑도 실체가 없다. 표현이 없고 헌신이 없으면 이 모두는 가짜다. 야고보 사도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 그러니 ‘믿는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는 헛소리로 믿고 사랑해봐야 소용이 없다.

 

둘째, 노래 곧 찬양함.

 

하다못해 노래 좀 한다고 하는 가수들, 전인권이니 이승철이니 하는 이들도 하루에 대부분을 연습한다고 하는데… 우리의 노래는 무언가? 찬양이다. 찬양이 무언가? 간증이다. 증거다. 자랑이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잠 10:19).” 무슨 일에서든지, 악재를 만나도 주의 뜻을 살펴 주께 감사하는…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곧 주가 나를 죽이시려 한다. 그래도 주를 찬송한다. 바울도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8).” 하는 놀라운 고백을 했다. 어떤 일에서든지 하나님 모르게 일이 벌어질 리가 있겠나? 하면 슬픈 일에서든지, 기쁜 일에서든지 우린 주를 찬송해야 한다. 간증도 훈련이다. 자랑은 자부심이다. 좋고 좋으니까 자꾸 말하고 전하고 자랑하고 싶은 것이다.

 

셋째는 나아감.

 

이는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이번에도 느낀 것은 한 영혼이 주 앞으로 오는 게 하늘에 별 따기보다 어렵다.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8).” 무슨 소린가? 하다못해 아무나 대통령을 만나겠다고 해서 그의 집무실로 갈 수 있겠나? 철저한 보안과 검증을 거쳐 한 나라의 대통령을 만날 수 있는 것인데 하물며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우린 어쩌면 이렇게 쉽게(?) 만나러 나올 수 있는 것일까?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3:12).” 이 믿음은 우리가 우리 의지로 선택한 것인가? 결코 아니다. 선물이다. 하나님이 특별히 선사하신 초대장과 같다. 아무나 달라고 한다고 얻는 게 아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곧 우리가 주의 자녀가 되었음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2. 우리의 기쁨과 하나님의 성품의 특징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3).”

 

앞서 우리가 가진 특권의 찬송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곧 우리의 찬송, 하나님을 증거하게 되는, 자랑. 간증. 감사와 영광. 곧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4).” 곧 누가 누구를 자랑할 때도 감사한 게 있을 때이다. 그 삶에 감사가 없다면 찬송도 없다.

 

찬송이 그럼 보다 구체적으로 뭐냐 하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곧 이는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는 훈련이 되었을 때, 찬송도 저절로 내 입술의 열매가 된다. 아니면? 순간 입만 열면 세상 사람들처럼 말한다. 돈 문제, 노후 문제, 건강 문제, 몇 년 더 살고 죽는 문제…… 끝없는 문제들로 찬송할 입술이 없다. 한데 성경은 일러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 이 얼마나 막중한 사명인가? 목사만 그렇다는 소린가? 아니다. 찬송을 한다는 모든 성도는 다들 한결같다. 그러할 때,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5).” 이와 같은 찬송, 하나님의 성품이 저절로 몸에 배어 우리의 삶에서도 증거가 되는 것이다.

 

나오는 말

 

세상은 어떠한가?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시 52:7).” 그럼 우리는 어떠한가? 과연 좀 뭔가 다른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요즘은 그저 돈이다. 돈만 있으면 여기가 천국이다. 영적 무지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기능을 상실했다.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렘 4:22).” 왜? 실은 돈 때문이다. 돈을 위해 혼합종교와 혼합신앙도 활성화된다. 사람들이 모여들면 그게 다 돈이다. 주님은 엄히 경고하시길,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바울은 강한 어조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자, 말씀을 정리하면 간단하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롬 16:17-18).” 바울의 설교와 같이 우리가 왜 찬송을 잃어버렸나? 왜 교회는 다니면서 특별히 간증할 게 없나? 왜 점점 감사는 줄어가고 불평과 원망만 쌓여 근심이 깊어지고 있나?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고전 9:11).”

 

이와 같이 말씀을 듣고도 밍밍하니 별 맛을 느끼지 못한다면, 자신의 몸을 쳐서라도 복종시켜야 한다. 반드시 그 날은 올 것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하시고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 15:5-6).” 지금은 서로 다 같이 믿는 자 같은데, 그날에 누구는 버려져 불에 던져질 것이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오늘 우리의 영적 싸움은 당연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함은 그들의 눈이 가려서 보지 못하며 그들의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함이니라(사 44:18).”

 

이에 오늘도 우리 주님은 심판을 미루시고 재림의 때를 늦추시면서 돌이켜야 할 주의 자녀들을 기다리신다. 이는,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시 100: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