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724 주일
시편 99편
그는 거룩하시도다
시 99:3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할지니 그는 거룩하심이로다
시 99:5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의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
시 99:9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
들어가는 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지기 위해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첫째, 이 세대를 따르지 않음으로 가능하다.
둘째, 날마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가능하다.
셋째, ‘변화’는 받는 것으로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다.
넷째, 이를 우리 속사람은 기뻐한다.
다섯째, 우리의 기쁨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여 우리는,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나이 들고, 병들어 죽음에 이르는 일이 결코 슬픈 일은 아닌 것이다. 이는 인생의 정한 이치다. 우리가 오늘을 더하여 사는 일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려 하심이다.
오늘 시편은 이를 알린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가 인생을 의지하는 것은 허무한 일이다. 이를 시편에서 각각 증거를 찾으면, 시편 39편 11절에서는 “주께서 죄악을 책망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먹음 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인생이란 모두 헛될 뿐이니이다 (셀라).” 잠언 24장 20절,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하였다.
그럼 행악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베드로 사도는 저들의 특징을, “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 이들은 당돌하고 자긍하며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들을 비방하거니와(벧후 2:10).”
첫째,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 행하는 자.
둘째, 그런 저들은 당돌하다.
셋째, 저들은 자긍한다.
넷째, 저들은 떨지 않는다. 곧 주를 경외하지 않는다.
다섯째, 저들은 영광 있는 자(주의 자녀)를 비방한다.
이를 바울의 논증으로 덧붙여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롬 8:12).” 즉 주의 사랑에 빚진 자이면서 육신대로 사는 사람들다.
그럼 육신대로 살면 어떻게 될까?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13-14).”
첫째, 반드시 죽는다하심은 영적인 죽음을 의미한다.
둘째,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하심을 받지 못한다.
앞서 이와 같은 내용을 살피는 것은 우리의 거룩을 위함이다. ‘거룩’은 오늘 시편의 주제어이고, 하나님의 성품이며 성도들이 갖추어야 할 최종적인 의이다. 이에 오늘 시편은 마지막 9절에서,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
이 한 구절의 말씀 안에 우리 기독교의 모든 진리와 복음의 핵심, 곧 그리스도 예수께서 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어야 하는지,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4-25).”
본문이해
시편 99편은 하나님의 구속사 곧 그에 따른 경륜과 섭리를 찬송한다. 이에 ‘그는 거룩하시도다.’ 하는 표현이 3, 5, 9절에서 반복되고 있다. 이를 중심으로 3연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1연은 1-3절로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찬양한다. 2연은 4-5절로 ‘공의를 사랑하시고 행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찬양한다. 3연은 6-9절로 ‘하나님은 그 자녀들을 은혜와 자비로 대하시는 거룩하신 분’임을 찬양한다.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의 진리를 붙들고자 하는데, 첫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할 줄 안다는 것으로 하나님의 거룩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하나님은 스스로 공의와 사랑을 나타내심으로 거룩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세 번째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와 자비하심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영광 가운데 증거한다는 것이다.
첫째,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을 증명하는 영광이 된다.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할지니 그는 거룩하심이로다(3).”
이를 위해 모두 목사가 되고 성직자로 살아야 한다는 게 아니다. 오바댜는 악명 높은 북이스라엘 7대 왕 아합과 왕후 이세벨의 악질적인 우상숭배에서도 궁내 대신으로 종사했는데, “아합이 왕궁 맡은 자 오바댜를 불렀으니 이 오바댜는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라(왕상 18:3).” 또한 앞서 요셉은 우리가 다 알듯이 애굽 땅에 노예로 팔려갔다가 총리까지 오른 자로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였다. 곧 우리 신앙은 환경의 문제로 좌우되는 게 아니다.
베드로 사도는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곧 오늘 우리의 삶을 거류민이나 나그네로 규정하였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영혼을 거룩하게 가꾸어 가는 것은 우리의 사명이다. 믿음은 선물이고 신앙은 연마이다. 바울 사도는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딤전 6:11).” 하고 설교하였는데, 먼저 이것은 앞서 돈을 사랑함에 대한 경고였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10).”
이 땅을 살면서 돈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권력과 명예와 자부심과 자긍하는 마음 없이 산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이겠나? 하여 저는 한 걸음 더 나아가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12).” 하고 우리의 부르심을 정의하였다.
즉 우리의 거룩은 단지 주가 주시는 믿음의 선물과 같이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에 오늘 시편은 하나님의 구속사를 근간으로 하여, “그는 거룩하시도다/ 그는 거룩하시도다/ 그는 거룩하시도다(3, 5, 9).” 하고 연거푸 강조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때 우리로 거룩하게 하는 첫 번째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주를 경외함으로 시작된다.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흔들릴 것이로다.”
여기서 우린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과연 나의 하루 가운데 주를 의식하고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이 있기는 한가?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이러한 바울의 증거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말씀하신 예수님의 복음을 확장한 것이다.
이에 오늘 시편은 “시온에 계시는 여호와는 위대하시고 모든 민족보다 높으시도다(2).” 하고 하나님의 존엄하심을 알린다. 이를 안다면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사 1:16).” 이에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 17:10).” 그러므로 “네가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의 영혼을 스올에서 구원하리라(잠 23:14).” 이에 바울도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이는 과장이 아니다. 자신이 얼마나 악한지, 약한지, 어리석은지, 부족한지… 죄인인 것을 알면 알수록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하여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는 말씀 앞에 승복한다.
하면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곧 죽었던 우리를 살리신 분이시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이에 오늘 시인은 주의 거룩하심을 찬송하는 것이다.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할지니 그는 거룩하심이로다(3).”
둘째,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증명한다.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의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5).”
이를 위해 우리 죄를 대신 지셨다. 하나님의 공의는 견고하시다. 우리의 의로 이르는 구원이 아니다. “무릇 나 여호와는 정의를 사랑하며 불의의 강탈을 미워하여 성실히 그들에게 갚아 주고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맺을 것이라(사 61:8).” 이를 오늘 시인은 “능력 있는 왕은 정의를 사랑하느니라 주께서 공의를 견고하게 세우시고 주께서 야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하시나이다(4)” 하고 찬미한다.
우리가 주 앞에 설 때 모두는 ‘더러운 죄의 옷’을 벗고 비로소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하게 된 ‘아름다운 옷’을 입을 것이다. 그때까지도 사탄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정죄한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슥 3:1).” 이때 오히려 하나님은 사탄을 책망하신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2-3).” 이를 잠깐 설명하면 우리의 추함은 마치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 같이 시꺼멓다.
하지만 사탄의 의도와 달리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4).” 이 옷은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로 깨끗이 씻음 받은 옷이다. 곧 아무리 추하고, 더럽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죄의 옷을 입고 있다 해도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정죄하시지 않을 것은 이를 위하여 아들도 아낌없이 내어주심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신 사랑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공의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미 만족함을 얻으셨다. 그러므로 아들의 영광을 우리에게도 덧입히신다.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5).”
이를 심판하실 왕, 우리의 재판장이 하나님이시다. “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이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라(사 33:22).”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자라가야 한다. 거룩하여져야 한다. 어디까지 말인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2:14).” 실제 이를 위하여 성령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
셋째,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와 자비하심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영광중에 나타낸다.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9).”
부모는 자식을 징계한다. 참된 스승은 회초리로 제자를 가르친다. 오늘 날 우리의 왜곡된 사랑은 인권을 운운하며 체벌을 법적으로 규제하지만 엄연히 사랑으로 징계함은 성경이 주도하시는 사랑이다.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잠 13:24).” 한데 세상이 점점 요지경이라, 죄를 심신미약으로 둔갑시키고, 촉법소년이라 하여 14세 미만의 아이들은 법적으로 처벌도 못하게 했다. 점점 이를 악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는데도 속수무책이다. 그로 인하여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시 55:17).” 부모의 시름은 깊어진다. 자칫 어린아이가 자기 부모도 고소하는 세상이다. 물론 개중에 악한 부모가 있으니까 법이 이를 보호하려는 것은 알겠는데,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것일까?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62:8).”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롬 14:23).” 고로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살후 3:6).” 게으름은 미루는 것이다. 나중에, 하고 미적거리고 뭉개는 것이다. 이는 영적으로 태만함이다. 그 심중에는 스스로 일러 ‘아무렇지도 않은 마음’ 곧 ‘화인 맞은 양심’이어서이다. 곧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2).” 하여 저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른다. 죽으면 그만이다. 스스로 죽음까지도 다스릴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러면서 헛되이 부지런한 사람도 있는데,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2:23).” 하여 다 누렸던 솔로몬은,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7:3).” 왜 이런 표현을 하는 것일까? 여기서의 근심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말한다. 이는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다(고후 7:10). 이에 우리가 주를 경외한다는 것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게으르지 않고, 우리에게 더하신 날들을 주의 이름으로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지키는 일이다.’ 이에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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