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그들 앞에 주었더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먹고 남았더라
왕하 4:44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시 32:11
엘리사를 중심으로 몇 가지 에피소드가 소개된다. 하나는 선지생도의 아내로 두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남편이 죽고 빚 준 사람이 와서 두 아이를 데려가 종을 삼고자 하였다. 이 소식에 엘리사는 그릇이 몇 개인지 묻고 이웃에게 빌릴 수 있을 만큼 빌리라 한다. 그리고 집에 있던 기름 한 그릇에서 붓고 또 부어 빌린 그릇마다 채운다. 이를 팔아 빚을 갚고 두 아들과 생활하게 한다(1-7).
또 하나는 엘리사가 수넴에 이를 때마다 음식을 준비하던 여인이 남편에게 청하여 작은 방을 담 위에 만들고 침상과 책상과 의자와 촛대를 두어 엘리사가 올 때마다 거기에 머물게 한다. 이에 엘리사가 수넴 여인에게 아들이 없음을 알고 이듬해야 아들을 낳게 한다. 아이가 자라 추수 때에 아이가 머리가 아프다고 하더니 수넴 여인의 무릎에서 죽는다. 이에 아이를 엘리사의 침상에 눕히고 여인은 급히 엘리사가 있는 갈멜 산으로 간다. 사정을 듣고 먼저 엘리사는 자신의 종 게하시에게 일러, ‘네 허리를 묶고 내 지팡이를 손에 들고 가라 사람을 만나거든 인사하지 말며 사람이 네게 인사할지라도 대답하지 말고 내 지팡이를 그 아이 얼굴에 놓으라.’ 하고 그 뒤를 따른다. 엘리사가 여인을 따라 수넴에 이른다. 아이는 죽은 채였고, 엘리사는 문을 닫고 여호와께 기도하고 아이 위에 올라 엎드린다. ‘자기 입을 그의 입에, 자기 눈을 그의 눈에, 자기 손을 그의 손에 대고 그의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여진다.’ 그런 후 ‘엘리사가 내려서 집 안에서 한 번 이리 저리 다니고 다시 아이 위에 올라 엎드리니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 하고 눈을 뜬다.’ 여인이 절하고 아이를 안고 간다(8-37).
또 하나는 길갈에 흉년이 든다. 선지생도들이 먹을 게 없어 굶주리자 ‘한 사람이 채소를 캐러 들에 나가 들포도덩굴을 만나 그것에서 들호박을 따서 옷자락에 채워가지고 돌아와 썰어 국 끓이는 솥에 넣었다.’ 이를 퍼다 먹는데 국에 독이 있음을 알고 엘리사가 가루를 뿌린 후에 이제 먹게 한다(39-41).
또 다른 이야기는 한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부터 와서 처음 만든 떡 곧 보리떡 이십 개와 또 자루에 담은 채소를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린다. 엘리사는 이를 백 명의 생도들에게 먹이라 한다. 그 사환이 어찌 이것을 백 명에게 주겠나이까? 하고 되묻지만 엘리사는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이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하여 떡을 나눠주게 하고 이를 먹게 하니 모자람이 없고 오히려 남았다(42-44).
일련의 상황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먼저는 우리가 종종 예기치 못한 역경을 겪는데, 그 일로 오히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생에서 믿는 자라 해도 고난을 당할 수 있다.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마 24:9).” 어쩌면 우리가 주로 인한 환난은 피할 수 없는 길이다. 한데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9).”
고난이 주는 교훈은 의외로 간단하다.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다. 고난이 없을 땐 이러한 사실조차 막연하였다.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 4:5).” 그런 가운데서 우린 성숙하여진다.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고난은 우리로 믿음을 점검하게 한다.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막 4:37-39).” 누구보다 신앙이 좋았던 이들에게도 고통은 따른다.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요 11:3).” 한데 이 소식 앞에서 예수님의 진리가 선포된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4).”
‘즉 고난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고,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신다.’ 이 무슨 논리이실까? 우리는 역경으로 원망대신 하나님 의뢰를 익히게 된다. 늘 우리 안에 밴 습관은 원망과 미련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민 14:2-3).” 앞서 그 놀라운 기적으로 애굽을 나온 뒤로도 툭, 하면 원망을 일삼는다.
비단 저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름 하려고 하는데 어려움이 터지면 누구라도 원망부터 하기 마련이다. 다음은 탓할 대상을 고른다. ‘너 때문이야’ 하고 정죄하면 악은 그 속을 채운다. 이를 지혜자는 정의하기를,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잠 19:3).” 보면 결국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데까지 간다. 이게 다 하나님 탓이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1-12).” 아담과 하와의 원망이 우리의 본성이 되었다. 결국은 하나님 탓이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전 10:10).” 원망은 못마땅하게 여겨 탓하는 것이다. 불평을 품고 미워하는 마음이다. 단지 탓하고 마는 게 아니라, 불평은 마음에 들지 않아 편치 않고 몸이 병들어 불편하게도 한다. 곧 마음의 일로 그치는 게 아니라 몸의 질병으로까지 원인이 된다. 폴 트루니에는 내과의로의 일을 접고 상담과 기도로 영혼을 어르는 사람이 되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저는 모든 병의 근원이 마음에 있고 이는 죄로 인함인 것을 알았다.
오늘 본문에서도 느낄 있지만 환난이 없을 수는 없으나 이미 앞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은혜가 있었음을 알게 된다. ‘네게 무엇을 해주랴?’ 하고 찾아오시는 주님이시다(눅 18:41).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고 먼저 물으시는 주님이시다(요 5:6). 이를 시인은 멋지게 찬송하였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주께서 그들을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말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31:19-20).
이와 같은 사실에 눈을 뜨기까지, “내가 맹인들을 그들이 알지 못하는 길로 이끌며 그들이 알지 못하는 지름길로 인도하며 암흑이 그 앞에서 광명이 되게 하며 굽은 데를 곧게 할 것이라 내가 이 일을 행하여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리니, 조각한 우상을 의지하며 부어 만든 우상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는 자는 물리침을 받아 크게 수치를 당하리라(사 42:16-17).” 곧 우리가 눈뜬 장님들 같이 ‘알지 못하는 지름길’을 차고 있음이고, 이에 암흑을 광명으로, 굽은 데서 곧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하려 하심이다. 곧 우리 스스로 잘해보려 했던 ‘조각한 우상’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심으로 하나님만이 우리의 하나님이신 것을 밝히신다.
은연중에 우린 얼마나 많은 ‘스스로 조각한 우상’을 마음에 두고 살고 있는지…. 대부분이 자식이고 건강이고 하는 일에 따른 기대와 소망이며 남부럽지 않은 삶으로의 희구다. 어쩌면 이를 목적으로 하여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고 남다른 열심을 가지고 사는 경우들도 흔하다. 이는 엄연히 조각한 우상이다. 그 마음의 기대나 꿈이 하나님의 뜻을 마주하지 못하게 할 때도 있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이는 목사로 주의 일을 감당하는 데 있어서도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저마다의 야심이 있다. 성경에 자신의 견해를 덧붙인다. 누구는 자기 신념으로 목회의 중심을 잡는다. 저는 연세가 많은데 코로나 백신을 한 차례도 맞지 않았다. 그 모든 게 무의미하고 불순하다고 멀리했던 모양이다. 교인들에게는 강요하지 않았다지만 은연중에 왜 모르겠나? 결국 지난 주간에 목사 내외가 코로나에 걸려 걱정거리가 되었다. 주일은 간신히 줌으로 돌려 채워졌다. 그 일로 성도들 몇이 시험에 들었다. 누구도 대놓고 뭐라 하진 않지만 은근히 실망한 목소리로, 누가 그와 같은 사실을 알려왔다. 평소 소신 있고, 강단 있는 저의 성품으로 소위 카리스마가 있어 성도들을 앞도하던 목회였다. 하긴 그 드센(?) 학부모들을 상대로 일류대안학교를 운영하고, 교회를 이루어갈 수 있었을 테지만….
모르겠다, 나는. 다만 내가 아는 것으로 목회자는 남다른, ‘잘난 사람’으로 세우시는 게 아니다. 성경의 여느 인물들만 봐도 알고, 바울의 증언에서도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한 마디로 겸손을 겸비하게 하시려는 어려움, 궁핍과 역경으로 곤죽이 된 자를 들어 하나님은 보란듯 주의 일을 감당하게 하신다. 이를 성도들이 주를 공경하는 마음으로 섬기는 것인데, 이를 마치 자신들의 남다름으로 우쭐할 일은 아니다. 번듯한 옷차림에 누군 아예 대놓고 목회자의 성공 여부는 성도가 몇인지, 교회 규모는 어떤지, 심지어 목사가 무슨 차를 타는가에 따라 목회 여부를 알 수 있다고 하니. 나는 할 말이 없다.
오늘 네 편의 에피소드는 우리로 할 수 있는 것으로 감당하게 하심을 보여준다. 특히 다윗의 경우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삼상 17:40).” 그의 처지는 어이가 없다. 한데 저에게 문제는 그런 요건이 아니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45).”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 교회에서 목사 청빙공고를 냈는데 40여 명이 넘게 몰렸다고 한다. 한데 또 저들의 학벌이나 스펙으로 추린 게 그 정도라 하니, 그야말로 여느 대기업 지원자를 능가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는 이제 예사로운 일이 되었다. 공공연하게 사람들은 그 교회 목사가 어느 대학 출신과 학벌은 어느 정도이고, 경력과 저의 현재 능력은 어느 정도인지가 우선이다. 거기에 외모까지 준수하여야 성도들이 모인다…
내가 아는 한 하나님은 그런 곳, 그런 사람과 함께 일하지 않으신다. 물론 저는 세상적으로 엄청난(?) 성과를 낼 수도 있다. 교인들 수를 배로 증가시켜 부흥을 도모할 수도 있다. 남들이 하지 못하는 놀라운 능력으로 교회를 몇 년만에 팽창시킬 수도 있다. 한데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살아서 저들이 이룬 업적으로 치면 가히 주 앞에서도 내세우고 자랑할 만하다. 그런데도 우리 심판자 되시는 주님의 반응은 의외시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3).”
결국은 스펙이나 어떤 성과 또는 남다른 이력으로가 아니라, 순종이다.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눅 5:5-6).” 말씀에 의지하여 산다는 게 세상과 동떨어져 독불장군처럼 독야청청 하는 게 아니다. 누가 담임 목사의 이번 코로나 증상으로 인해 시험에 든 것을 들으며, 나는 뭐라 말해야 할지 한참을 망설이다 그만두었다. 뭐라 말하자면 자칫 담임목사의 그릇됨을 말해야 하고, 그런(?) 모습을 항상 우월하게 여겨 ‘우리 목사님은…’ 하고 자부하던 저에게 오히려 더 그릇된 말로 들릴까 하여, 나의 침묵은 궁여지책이었다.
신앙은 신념이 아니다. 믿음은 의지가 아니다. 설교는 창작이 아니고, 주의 일은 독특한 예술세계가 아니다. 새로운 시도, 무슨 실험정신을 운운하며 목회의 방향을 잡는 이들을 종종 보는데 나는 그럴 때면 위태위태하다. 그래서도 입을 다문다. 누구는 늘 말할 때면 저의 담임 목사의 남다른(?) 성향을 자랑한다. 독특한 카리스마와 저만의 능력을 강조하기도 한다. 신기하게도 그런 자들은 또 '그래서' 하고 의논하는 법이 없다. 어떤 말을 꺼낸 것도 그저 통보다. 동조를 구하고 강요한다. 행여 내가 그런 데 대해 뭐라 충고하거나 성경적으로 권면하려 들면 순간 그 마음은 일그러진 듯 듣기 싫어한다.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만 보고 듣겠다는 데야! 다만 저 또한 주가 세우신 주의 종이겠거니, 나의 침묵은 오랜 생각 끝에 얻는 답변이다. 각자 믿음의 분량대로 사는 일이고, 것 또한 주의 은혜로 함께 하실 것을 믿으며, 주의 은총을 구할 뿐이다.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81:10-11).
그러는 데 내가 나서 뭐라 하겠나? 우리가 어찌 주의 사랑을 다 알까? 그 넘치는 주의 사랑은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엡 3:19-21).” 충만하신, 넘치도록 능히 모든 충만하신 하나님의 충만하심을 우리가 대체 무슨 수로 알까? 보여주시고 들려주셔야 알 수 있다. 하면,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32:1).
나는 그저 오늘 시편의 이 한 구절의 말씀에 유구무언이다. 어떠하든지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주의 은혜가 놀라울 따름이다. 진심이었다. 인성검사에서 두 번째 또 낙방하고 안타까운 눈빛으로 내게 되묻던 면접관 목사의 눈빛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제 어쩌실 겁니까? 하고 저가 물을 때, 그때 나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괜찮습니다, 다음에 또 보겠습니다. 계속 그래도 괜찮습니다. 하던 나의 말은 진심이었다. 처음엔 논술과 인성에서 떨어졌을 땐 좀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평생 글쓰기를 가르치고 논술 선생으로 살았는데, 인성감사로 인한 문제야 그럴 수 있겠다 싶었는데… 교만했음을 인정하니까, 계속 낙방을 하고 평생 목사고시를 준비하며 사는 것도 괜찮은 일로 감사할 것이었다.
오늘 시인의 심정을 나는 그리 이해한다. ‘나 같은 죄인’을 마다하지 않고 오히려 주의 일을 맡기시다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4-5).” 나는 말씀 앞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가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겔 18:21).” 이에,
진실로 의인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
(140:13).
이어서 오늘 시편은, 그리하여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2).
부디 나는 그러하기를. 그럴 수 있기를. 주의 은혜로 그것까지 그러하기를. 할 때,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3).
나는 그래서 누구를 뭐라 하다 내가 찔린다. 내 말에 괴로워서 내가 아프다. 다 나 들으라고 하시는 소리 같다. 내 말이 내게 향한다. 지혜자는 일러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하여 나는 너무하다 싶게 염치도 없다. 누구를 나무라고 충고할 때면 꼭 그런다. 같은 일과 같은 죄를 수도 없이 반복하고 또 지겹도록 같은 내용으로 회개하면서. 때론 주 앞에 또 아뢰기도 민망하고 송구하여 입을 다물려 하면 속이 타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다. 하여,
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38:7-8).
그 괴로움이 어떤 것인지 알겠다. 그럼에도 주의 은혜는 무궁하시다. 오늘 시인의 고백처럼,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셀라)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4-5).
고난과 역경은 이와 같이 나의 실체를 마주하게 한다. 직면하지 않는 죄는 영혼을 좀먹는다. 곧이어 위태롭게 한다. 외면하고 덮어둔다고 해결되는 죄는 없다. 죄의 문제는 주 앞에 드러내고 자복할 때 치유가 된다. 누구에게 절박함으로 글을 쓰시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시인들은 노래하였다.
여호와여 주로부터 징벌을 받으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이런 사람에게는
환난의 날을 피하게 하사
악인을 위하여 구덩이를 팔 때까지
평안을 주시리이다
(94:12-13).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119:71).
그러므로 다시 오늘 시인의 기도로 읊조리면,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셀라)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6-8).
우린 할 수 있다. 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아서 말이다.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 13:23).” 행여 우리의 가장 큰 불행은 믿는 자로, 복음 전하는 자로 산다고 살았던 것 같은데,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히 12:17).” 그러니 사는 동안 무엇을 두려워하고 또 근신해야 하겠나?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5).”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9-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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