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왕하 6:17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시 34:2
북이스라엘 여호람의 시대이다. 아람 장군 나아만이 문둥병을 고침 받고 돌아갔다. 이어 엘리사는 선지 생도들을 양성하는 처소를 짓다 물에 빠뜨린 도끼를 물 위로 떠오르게 한다. 아무리 악한 때라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남겨놓으신다. 가장 악명 높던 아합의 시대에도 남은 자 7천 명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 19:18).” 때론 그 수가 너무 적다해도 온전히 주를 경외하는 사람을 주가 보호하신다.
당시 북이스라엘에 주의 선지 생도들이 교육 받고 있었다는 것, 엘리사는 저들을 지키고 가르치는 교사요 선지자였다. 이와 같은 직분은 주가 더하신 권능으로 알게 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행 6:7).” 곧 아무리 시대가 악하다 해도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는 무리는 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고전 3:10).” 이로써 우린 단합하고 하나 될 수 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하여 이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서 난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빌 1:27-28).” 그러나 악인들의 공격은 끝이 없다. 오늘 본문 8절부터 다음 장 7장 20절까지의 내용은 연속이다. 엘리사를 잡으러 온 아람 군대를 사마리아로 데려가 후히 먹이고 돌려보냈거늘(21-23), 저들은 이를 빌미로 북이스라엘을 포위한다. 오늘 13, 14절에 보면 엘리사는 도단에 있음을 알고 저를 잡으러 왔을 때, 사환이 이를 알고 두려워하자 저의 영안을 열어 하나님의 군대를 보게 한다.
이 땅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계와 공격은 끝이 없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저들 안에는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1-23).” 그러니 뭐라 이른들 들을 리 없다. 바울은 비통한 심정으로 설교한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0-21).”
곧 그런 저들에게 우리가 주를 찬송하고 자랑함이 미련해보일 뿐이다. 저들의 영안이 감긴 것을 우린 안다. 하면 우린 믿음의 눈으로 세상의 여러 현상을 보고 있는 것일까?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그러므로 믿음이란 참으로 가장 고상하고 귀한 기적이고 신비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1, 3).”
믿음으로가 아니면 우리가 이 시대에 무얼 보고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알고 의지하며 의뢰하고 나아갈까? 우리는 선히 베풀어도 저들은 악의적으로 받는다.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삼상 30:6).”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으나 다윗은 기도로 찬송한다.
내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하게 치는 자들이 많사오니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56:2-3).
우리가 주를 의지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신앙을 버틸까?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5-37).” 때론 너무 힘들고 지쳐 사람의 행함이 극에 달하여, “여인이 대답하되 이 여인이 내게 이르기를 네 아들을 내놓아라 우리가 오늘 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먹자 하매(왕상 6:28).” 뭐라 언급하기 끔찍할 정도이다. “우리가 드디어 내 아들을 삶아 먹었더니 이튿날에 내가 그 여인에게 이르되 네 아들을 내놓아라 우리가 먹으리라 하나 그가 그의 아들을 숨겼나이다 하는지라(29).”
이러한 지경에서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으로 산다는 일은 “새벽에 여호와께서 불과 구름 기둥 가운데서 애굽 군대를 보시고 애굽 군대를 어지럽게 하시며(출 14:24).” 철저히 주의 보호하심 아래 거하는 일이다. 우리가 스스로 어찌 해결하려 할 때 자식까지 돌려가며 잡아먹는 끔찍한 현상이 벌어진다. 실은 이 일이 그렇다는 은유가 아니라, 현실이다. 아이들이 어찌 되든지 경쟁 속으로 밀어넣고 우수한 성적과 남부럽지 않은 직업으로 살기만을 바란다. 그러는 동안 서로의 아이는 정서적으로 어찌되든지, 그 영혼이 뜯겨지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므로 그들의 길이 그들에게 어두운 가운데 미끄러운 곳과 같이 되고 그들이 밀어냄을 당하여 그 길에 엎드러질 것이라 그들을 벌하는 해에 내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23:12).” 결국 저들이 인정하든 안 하든 아이들은 죽어나고 있다.
서로가 물고 뜯고, 아군이 적군이 되고 어제의 동지가 오늘은 나를 뜯어 먹고 자신은 살겠다고 아수라장이다. 그야말로 싸우기를 좋아하는 귀신들이 항상 제석천과 싸운다. 불교에서 말하는 팔방천의 하나로 동방의 하늘을 말한다. 이처럼 역사는 돌고 돌아 그 자리를 헤맬 뿐이다. 이에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요일 2:10-11).” 이 시대의 현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 것이고, 역사의 교훈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일이다. “그는 재를 먹고 허탄한 마음에 미혹되어 자기의 영혼을 구원하지 못하며 나의 오른손에 거짓 것이 있지 아니하냐 하지도 못하느니라(사 44:20).”
어느 시사평론가의 말처럼 이 시대의 참상은 곧 우리 국민의 현재 최상의 모습이다. 자기들 손으로 뽑은 것이다. 어떠하든지 이를 감당하며 살아야 할 몫은 각각의 것이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2).” 그러니 어쩔 것인가?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4:18).” 아무리 그러해도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9).” 하지만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21).” 결국 남겨진 자의 숙명이다.
자기 신앙을 온전히 지켜 산다는 것은 좋은 시절을 만나, 좋은 지도자 아래서, 좋은 교회를 섬기며, 좋은 사람들과 평안함에 있는 게 아니다. 이 세상에서 이와 같은 현상은 일시적이거나 거짓되다. 일찍이 나는 어려서 너무 빨리 사람의 본성을 보고 자랐다. 가장 재미있게 성도들 200여 명 모이며, 비록 개척교회이나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 합심하여 선을 이루어 사는가 하는 모습은 극히 짧다. 하다못해 정착촌 교회 내에서도 완력은 있고 적의 세력은 존재하여 기어이 주의 종을 몰아내고, 저들 좋을 대로 교회를 장악하는 권세는 있었다. 입 안에 혀처럼 굴던 이들이 언제 독을 뿜으며 우리의 정수리를 물려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그리 하는 것은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 주시리라(잠 25:21-22).” 당시는 불씨는 귀한 것으로 저의 머리에 핀 숯을 놓으라 함은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11:1).” 그 대가를 도로 받을 생각하지 말고 주께서 갚아주실 것으로 믿고 선을 행함이 옳다. 곧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나는 오늘 본문을 읽으며 오늘 우리의 현실을, 정치를, 사회적 갈등을 생각하였다. 믿음 안에서 서로 교제하나 그 생각이 달라 때론 진영논리에 따라 보는 시각이 다를 때면, 슬그머니 더는 말을 이어가지 않는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18).” 이와 같은 말씀을 순순히 받기에는 너무 악한 때를 사는 것 같다. 한데 중요한 것은 악한 자들도 저들 스스로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야말로 병적이다. 아람의 벤하닷이 다시 이스라엘을 포위하는 것을 보면서, 주의 은혜가 아니시면 악은 물리칠 수 없다. 스스로의 문제로서도 말이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겔 11:19-20).” 하여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 그러니 우린 스스로 자신의 신앙을 온전히 보존함이 필요한 시기다.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딤후 3:13-14a).”
이에 오늘 시편으로 다시 본문을 살피고 우리 현실을 돌아본다. 때는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이다. 그러니 그 참상이나 심정은 어떠하였겠나? 그럼에도,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34:1-2).
아, 이 놀라운 마음을 주가 주시지 않으면 어찌 소유하고 살 수 있을까?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데 감사한다 함은 성도의 기품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의 권위다. 저들 눈에는 가소롭고 한심한 것일 수 있으나, 나는 두 아이가 나란히 앉아 예배에 함께 하는 것으로 족하였다. 혹은 말하길 개척교회의 시대는 지났다고 하나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신다’는 말씀을 바로 안다면 내 앞에 맡기시는 저 한 영혼으로 천하를 얻은 것보다 귀한 일이다. 이는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20).” 때론 순종이 어려우면 복종도 괜찮다.
몸을 쳐서라도 복종시키는 바울이나 예수님도 자기를 복종시키심으로 주의 뜻을 따랐다 하심 앞에서 나를 붙들어 둔다. 내가 시류에 휘말리지 않는 비결이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이는 어떤 조건이나 상황에 따른 결과가 아니다. 내 기도에 대한 응답의 조건도 아니고, 내 뜻이 이루어져 터지는 고백도 아니다. 심지어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나를 죽이실 것이나 나는 주를 의뢰한다는,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그들이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내었으니
그들의 얼굴은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3-5).
‘우리’로 함께 서로를 위하고 기도하게 하심은 복이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 18:19).” 친구가 아이들 방학을 이용하여 세 시간에 걸쳐 기차를 타고 청량리에서 또 인천으로 온다. 그렇게 왕복 여섯 시간에 걸려 왔다가 너덧 시간 주 안에서 교제하고 대화하며 서로를 위해 기도하다 간다. 모 교수 또한 방학을 이용하여 직접 온다고 한다. 내가 어디 나가기를 어려워하니까 주께서는 이렇게라도 우리의 만남을 허락하심인데,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40:1-2).
서로의 방문과 교제는 주의 사랑이다. 나로 주께 감사하고 감격하게 하시듯 저들에게도 우리의 만남이 복되고 아름다울 것은 주의 사랑을 함께 누림이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 26:3).” 이게 보면 친구로서는 어렵다. 다른 친구는 수 년 동안 보자, 보자, 온다, 온다 하면서도 그리 못한다. 이는 온 김에 어디, 술자릴 찾고 예전처럼 대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또는 늘 가까이 하던 스승 또한 더는 전화통화조차 내 마음이 어려운 까닭은 우리가 서로 바라보고 가는 길이 다르고, 생각하는 관점이 이젠 달라서, 나눌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때론 나의 이러한 현상도 희한하다. 그렇게 좋아하던 것이, 그렇게 배설물처럼 여겨질 수도 있는구나, 하는. 뭘 꼭 그럴 것까지 있나, 싶은데… 주의 군대가 막아서는 것을 본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
(6-7).
내 임의로, 내 의지로의 일이 아니다. 나는 다만 시대가 어떠하든 주를 바람인데,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를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너희는 삼가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그를 노엽게 하지 말라 그가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아니할 것은 내 이름이 그에게 있음이니라(출 23:20).” 이는 내가 특별난 존재여서가 아니라, 주의 백성이고 그의 남겨진 자이면 저가 지키심이었다.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히 1:14).” 그러므로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8).
이를 ‘우린 안다.’ 알기에 서로를 위한다. 그 마음은 주의 것이다. 누구는 원주에서 오고, 누구는 군포에서 온다. 주일을 지키려 대면예배가 속개되면서 아이가 왔다. 저의 앞날을 주께 맡기고 말씀만으로 주 앞에 나아온다.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엡 4:12-14).”
내가 하는 일이 아니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9).
이 뜻을 살펴 사는 일,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
의인이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들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15, 17).
그러므로,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18).
비록,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19).
주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고 사는 삶은 복되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이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3:1).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84:11).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 되고 온전히 주를 바람은, 때가 아무리 악하다고 하나 ‘남겨진 자들’로 주의 특별하신 은혜 가운데 사는 삶이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19-20).” 비록 생활은 어렵고 그 삶은 곤고할지 모르나 초대교회 이후 우리는 여전히 개척교회의 시대를 살고 있다. 나는 뜻이 있는 젊은 동역자들에게 개척을 권한다. 여느 교회에 들어가 편히 부교역자로 사역을 감당하는 일도 중요하겠으나, 실감나는 주의 사랑은 늘 벼랑 끝에서다. 기꺼이 나는 나의 남은 생이 하루하루가 여한이 없다. 살아도 주를 위하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
여호와께서
그의 종들의 영혼을 속량하시나니
그에게 피하는 자는
다 벌을 받지 아니하리로다
(34:2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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