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들을 살리시는도다

전봉석 2022. 7. 31. 04:46

 

오직 한 가지 일이 있사오니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을 용서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곧 내 주인께서 림몬의 신당에 들어가 거기서 경배하며 그가 내 손을 의지하시매 내가 림몬의 신당에서 몸을 굽히오니 내가 림몬의 신당에서 몸을 굽힐 때에 여호와께서 이 일에 대하여 당신의 종을 용서하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엘리사가 이르되 너는 평안히 가라 하니라 그가 엘리사를 떠나 조금 가니라

왕하 5:18-19

 

여호와는 그를 경외하는 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그들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그들이 굶주릴 때에 그들을 살리시는도다

시 33:18-19

 

 

한 가지 일에는 만 가지 일이 예비 되어 있다. 오늘 이야기는 단순하다. 아람의 군대 장관 나아만이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였다.’ 저가 엘리사를 만나 그의 말에 순종함으로 병을 고친다. 한데 그 일을 이루는 데 있어 여러 개의 이야기가 중첩된다.

 

먼저는 그에게 이스라엘 땅에서 잡아온 어린 소녀가 몸종으로 있었다. 하루는 그 소녀가 여주인에게 선지자 엘리사를 소개하며 주인 나아만의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 한다. 그 말에 아내는 남편 나아만에게 이 소식을 알리고, 나아만은 자신이 섬기는 아람 왕에게 이를 알리고, 나아만은 이스라엘 왕 앞으로 글을 보내 저의 병을 고치라 한다.

 

이 소식에 왕은 다른 의도를 의심하며 ‘자기 옷을 찢으며’ 괴로워한다. 이를 빌미로 자신에게 시비를 걸려는 것으로 알았다. 그때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런 소식을 듣고 왕에게 사람을 보내 저를 자기에게 보내라 이른다. 하여 나아만이 엘리사를 찾아오고, 엘리사는 사자를 그에게 보내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전한다. 하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 것이었다.

 

나아만은 명색이 아람의 군대 장관인데, 저의 태도가 마뜩찮아 기분이 상해 돌아가려 한다. 그때 종들이 만류하며 병 낫기 위해 더한 것도 따르지 않았겠나, 하고 저를 요단강으로 이끈다.

 

이에 저는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잠근다. 그러자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깨끗하게 회복된다. 이에 나아만이 모든 군대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 도로 온다. 그리고 그 앞에 서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예물을 바치려 한다. 하나 엘리사는 이방의 것을 예물로 받지 않고 저를 돌려보낸다.

 

나아만은 자원하여 노새 두 마리에 흙을 싣고 앞으로 유일하신 하나님께만 번제물과 희생제사를 드리겠다고 서원한다. 그리고 회개한다. “오직 한 가지 일이 있사오니,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을 용서하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며 저가 이방의 주인과 림몬의 신당에 들어가 경배하며 우상을 숭배하였던 것을 뉘우치며 용서를 구한다. 엘리사는 저를 평안히 돌려보낸다.

 

그런데 가장 가까이 엘리사를 따르던 사환 게하시가 탐욕이 생겼다. 스스로 꾀를 내어 그를 쫓아가 무엇이든지 받으려한다. 그때 두 청년을 보내 거짓으로 나아만을 속여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요구한다. 나아만은 기꺼움으로 두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아울러 받아온다. 언덕에서 이를 기다리던 게하시는 물건을 받아 집에 감추고 그들을 보낸다. 이 일을 이미 알고,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나아만의 나병이 발하게 하여 저의 몸이 눈같이 된다.

 

먼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알게 하시는 데 있어 그럴 만한 사람이 따로 있다. 저를 위해 이스라엘의 한 어린소녀가 앞서 몸종으로 그의 집에 잡혀 와 있었다. 여기서 우선 말씀이 전하여지는 데 있어 복음 전하는 자의 고난은 필연적임을 알게 된다. 저 소녀가 우연한 기회에 어쩌다 몸종으로 붙들려 간 것 같으나 이는 모두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벌어진 일이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말을 듣고 나아만이 그에게 가는 과정이다. 저의 고통이 저로 하여금 절박하게 하여 군대 장관으로서 왕께 고하고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로 간다. 한데 저에게는 아직 그 권위와 위상이 있었다. 이스라엘 왕 앞에 서서 자신의 왕의 서신을 전함으로 혼란을 야기한다. 이를 시비거는 것으로 알고 괴로워하는 이스라엘의 왕을 보고 엘리사는 나아만을 자기에게로 보내라 이른다. 그 일이 세상적인 문제가 아닌 것을 알고 있었다.

 

나아만이 그에게 갔을 때 저는 의도적으로 저를 만나지도 않고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담그라 한다. 이는 참 어처구니없는 처방이다. 명색이 장관인데 그와 같은 예우는 자존심이 상한다. 여전히 저의 속에는 자신에 대한 자긍하는 교만이 있었다. 이에 돌아가려 할 때, 저의 종들은 저를 설득하여 병 낫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한 일도 하라 하면 했을 것이라 이른다. 나아만은 어디 두고 보자 하는 심정으로 요단강으로 가 몸을 담갔을 것이다. 한데 저가 순종이 아닌 복종이라도 하였더니 평생 시달리던 나병이 나았다.

 

그때 저의 반응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앞에 예물을 드리는 것, 다른 하나는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회개하고 앞으로 주만 섬기겠다고 하는 것. 이와 같은 주의 놀라운 구원 사역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오히려 항상 주의 사람 엘리사를 곁에서 따르던 게하시가 물욕에 사로잡혀 저에게서 재물을 받아 챙긴다. 그 일로 저의 나병이 그의 것으로 돌아온다.

 

여기서 몇 가지 영적인 교훈을 삼는다. 나아만은 아람 왕 벤하닷 2세의 군대장관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대하 18:1-3, 28-34). 저는 본래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였다. 멀쩡한 것 같으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의 예표다. 모두 문둥병과 같이 그 영혼이 병들어 있다. 곧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인물이 이스라엘에서 잡혀 왔던 어린소녀이다. 저가 비록 붙들려와 저들의 몸종이 된 것 같은 신세이나,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주를 알게 하는데 그 쓰심에 합당하게 행한다. 곧 저들은 원수이나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잠 24:17).” 말씀과 같이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눅 6:35-36).”

 

이는 우리가 주의 성도로 사는 데 따른 숙명 같은 일이다. 우연 같으나 모든 게 필연적으로 주를 전하는 데 쓰임을 한다. 우린 엄연히 어떤 처지든지, 그 상황이 어떠하든지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인간적으로야 원수의 고통에 아랑곳하고 싶었겠나?

 

복음은 전해져야 한다. 자신이 아는, 만난 하나님을 알게 하여야 한다. 우린 그럴 수 있는 자이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4-15).” 이에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마 10:27).” 이것이 믿는 자의 사명이다. 소명에는 이처럼 사명이 따른다. 부르심엔 그 역할이 있다.

 

나아만이 엘리사를 찾아가는 데 있어 한껏 군대를 거느리고 넉넉한 부와 권위를 가지고 왕 앞에 먼저 선다. 은 십 달란트와 금전 6천 개, 의복 열 개를 준비하여 과시한다. 저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살았으니 무엇으로 자신을 충족시키며 살았을지 알만하다. 그런 그를 대하는 데 있어 엘리사는 의도적으로 저를 무시하듯 만나지도 않고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그라 한다. 성경의 일곱이란 숫자는 완전함을 의미하는데, 저에게 구하는 것은 재물이 아니라 온전한 마음이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

 

그의 죄가 어떠하든지, 저는 결국 복종함으로 몸이 낫는다. 이는 또한 영적으로의 새사람이 된 것을 의미한다. 오늘 본문으로, 이어지는 저의 회개와 다짐을 보고 알 수 있다. 누가 뭐래도 회개 없는 구원은 말도 안 된다. 이를 텍스트로 삼을 수 있는 성경은 시편 51편으로 다윗의 회개 시, 혹은 변절자의 시라고도 하는 본문을 묵상함으로 알 수 있다. 먼저 자신의 죄를 자각, 인지하고 이를 인정한다. 나아만 또한 주 앞에 자신의 죄를 직면하고 고한다. 그간의 일을 직시하는 일이다. 이는 쉬운 것 같지만 죽기보다 어렵다. 천하의 다윗도 이를 외면하고 회피하느라, 충직한 군사를 죽이고 저의 아내를 자신의 것으로 취하여 아무렇지도 않은 척 1년을 가까이 시치미 떼고 살았다.

 

여기서 죄와 죄악과 죄과는 구분해야 할 것 같다. 죄과는 의도적인 반역으로 하나님을 등지고 자기 욕구를 따르는 일이다. 죄악은 그 일그러진 상황을 부정하고 이를 감추려고 악의적인 행실을 자행한다. 여기엔 시기와 질투, 거짓말과 온갖 추행이 따른다. 죄는 말뜻 그대로 ‘과녁을 벗어났다’는 의미로 의당 하나님을 인정하는 데서 돌아선 것이다.

 

회개는 그와 같았던 자신을 인정함으로 ‘주께만 범죄하였으니’ 이는 다들 그러고 산다 해도 스스로의 선한 양심은 이를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동안 이를 외면하고 모면하려 저지른 모든 악행은 주님과 나 사이의 일이다. 그래서 양심의 가책과 회개는 다르다. 양심의 가책은 사람으로 살면서 그럼에도 찔리는 마음인데, 이는 사람들 속에서 무마된다. 한데 회개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것으로 주께만 범죄하였다는 고백이 옳다.

 

하여 회개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여느 변명도 할 수 없다. 핑계댈 게 없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이는 근본적인 문제로 자신은 날 때부터, 어머니의 모태에서부터 죄인이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곧 죄는 오늘의 행위가 아니라, 본래 사람의 됨됨이의 문제다. 이를 인정하는 것이 오늘 나아만의 회개를 연상케 한다. 저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 앞에 절하였음을 인정하고 앞으로는 주 앞에서만 예배할 것을 약속한다.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가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겔 18:21).” 그러기까지 ‘어떤 이야기’ 하나를 풀어가는 데 있어서는 그 모든 일이 합력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그럼에도 우리가 구제불능상태에 빠지는 것은,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5).”

 

나아만이 그대로 돌아갔더라면 어찌 됐을까? 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담그라 하는 것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일 같았다. 곧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그와 같이 우리가 주를 믿고 의뢰한다는 일이 가소롭고 한심한 일로 여겨질 수 있다. 믿음이 없이는 이해가 불가하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여기서 하나 더 교훈을 얻자면, 엘리사와 함께 하였던 게하시의 순간적인 선택이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2-13).” 항상 율법을 가까이 하고 나름 열심당원으로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이 사울이었던 때를 돌아보며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던 일에 대하여 고백하는 것이다.

 

누구보다 은택을 입은 자로, 나는 목사 아들로 자라면서 늘 교회 안에서 생활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나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다. 그때에 누구는 안 믿는 부모의 눈을 피해 주일을 지키려고 새벽 일찍 도서관에 갔다가 주일예배에 참석하기도 했다. 누군 성경책을 안 믿는 부모에게 빼앗길까봐 겉표지를 다른 책 표지로 덧대어 들고 다니기도 하였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3년 반을 하나님의 독생자 우리의 구세주와 함께 공고동락하고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자 저마다 예생활로 돌아가 살 궁리를 하기에 급급하였다.

 

나는 오늘 게하시를 보며 단순히 저의 탐욕에 의한 좌악이 아님을 안다. 저는 늘 곁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살아계심을 지켜보았다. 그러던 그가 순간 물욕에 눈이 어두워져 그와 같은 선택을 한 데는 사람의 본래 죄의 본성을 보게 된다. “사람이 아직도 예언할 것 같으면 그 낳은 부모가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말을 하니 살지 못하리라 하고 낳은 부모가 그가 예언할 때에 칼로 그를 찌르리라(슥 13:3).” 우리의 악행과 악의는 근본적인 죄의 결과 때문이다. 어쩌다 그리 된 우발적인 잘못이 아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바울 사도의 이와 같은 결연함은 괜한 기우가 아니다. 야고보 사도도 이르길,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 4:1-3).”

 

곧 일련의 상황이 벌어지면 그 한 문제만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더 깊은 내적갈등과 외부적으로 고질적인 문제의 근원은 결국 죄로 인한 것이다. 이를 인정해야 한다. 양심의 가책이 신호라면 회개는 믿는 자로의 특징이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요 8:9).”

 

결국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막 3:29-30).” 만일 몸종으로 잡혀온 어린소녀가 그 주인에게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알리지 않았더라면… 나아만이 그 말을 듣고 하찮게 여겨 이스라엘로 가지 않았더라면… 엘리사가 왕이 괴로워하는 일에 나 몰라라 하였더라면… 나아만이 엘리사에게 왔을 때 저의 의도적인 외면에 감정만 상해서 그냥 돌아갔더라면… 이와 같은 모든 일의 배후에는 주의 영이 이루어 가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우리가 성령을 모독한다는 것은 ‘바로 그때’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행함이 따르지 없으면 죽은 믿음이다!

 

백날 믿는다고, 주의 길을 간다고, 스스로 자위하듯 항변한다 한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

(33:1).

 

오늘 시편은 우리의 마땅한 권리? 특징? 의무? 그게 무엇이든지, 우리의 마땅함은 주를 찬송하는 데 있음을 밝힌다. 사로잡혀 이방나라에서 몸종으로 지내던 어린소녀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없었다면 이번 일은 애초부터 어찌 됐을까? 우리가 주를 찬송함은 그를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대상 29:13).” 하여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6-17).”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아름답게 연주할지어다

(2-3).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처한 상황 속에서,

 

시를 읊으며 소고를 치고

아름다운 수금에 비파를 아우를지어다

(81:2).

 

하면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곧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가 행하시는 일은 다 진실하시도다

그는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그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 같이 쌓으시며

깊은 물을 곳간에 두시도다

(4-7).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것은 그가 행하신 바, 오늘의 이 모든 우주만물과 우리 생의 모든 일 분 일 초까지도 주가 다스리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곧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합 2:14).” 이렇게 가득한 증거와 사실과 모든 상황 속에서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사 46:10).” 반드시 주의 말씀은 모두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에게 성경은 그 어떤 보물보다 귀하다. 여기에 보증이 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 3:22).” 곧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이는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6-17).” 이에,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상의 모든 거민들은 그를 경외할지어다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여호와께서 나라들의 계획을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하게 하시도다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8-11).

 

그러므로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사 50:10).” 이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진정 그 두려움의 대상을 알 때, 사는 데 따른 이런저런 우여곡절은 그리 큰 문제가 안 된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

곧 그가 거하시는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들을 굽어살피시는도다

그는 그들 모두의 마음을 지으시며

그들이 하는 일을 굽어살피시는 이로다

(13-15).

 

언제부턴가 나는 이제 이와 같은 말씀으로 오히려 안도한다. 나의 나 된 것이 주의 은혜임을 인정하면 할수록 어찌 살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하는 따위의 물음으로 시달리지 않게 된다. 왠지 내 인생이 이대로 끝난다 해도 전혀 허무하지 않을 것은,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대상 29:11-12).”

 

아, 그러니 다른 모든 문제가 무슨 문제가 될까? 내 수고와 노력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지난날의 여러 죄악으로부터, 심지어 현재도 여전한 나의 죄악에서도, 아니 앞으로도 지을 수밖에 없는 크고 작은 죄에 이르기까지 더는 그것에 얽매여 끌려 다닐 필요가 없다. 지난날로 시달릴 이유도 없다. 오늘의 문제로 힘에 겨워할 일도 아니다. 앞으로의 막연함으로 불안해 할 일도 없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세어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도다

구원하는 데에 군마는 헛되며

군대가 많다 하여도

능히 구하지 못하는도다

여호와는 그를 경외하는 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그들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그들이 굶주릴 때에 그들을 살리시는도다

(17-19).

 

아, 나의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대하여,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그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우리 마음이 그를 즐거워함이여

우리가 그의 성호를 의지하였기 때문이로다

(20-21).

 

반드시 “그 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의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할 것이며 여호와의 손이 이 산에 나타나시리니 모압이 거름물 속에서 초개가 밟힘 같이 자기 처소에서 밟힐 것인즉 그가 헤엄치는 자가 헤엄치려고 손을 폄 같이 그 속에서 그의 손을 펼 것이나 여호와께서 그의 교만으로 인하여 그 손이 능숙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누르실 것이라(사 25:9-11).” 하면 더는 끌려 다닐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의연하고 초연함이란, 세상을 등지는 게 아니라 당당히 그 가운데서도 주를 바람으로 사는 일이다.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사 35:10).”

 

이에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 그러므로

 

여호와여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소서

(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