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리라 하셨느니라
왕하 7:1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기꺼이 노래 부르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그의 종의 평안함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는 말을 그들이 항상 말하게 하소서
시 35:27
주의 말씀을 어떤 이는 믿지 못하다 죽는다. “그 때에 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는 자 곧 한 장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하더라 엘리사가 이르되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니라(2).” 저들은 지금 아람 군대로 인해 성이 포위된 지 오래다. 당시 여호람 왕은 이 당면한 현실을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에게 돌려 저를 죽이려 하였다가 철회하고, 엘리사는 곧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을 예언하지만 왕의 측근인 장관은 이 말을 무시하고 치운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이 얼마나 신비롭고 놀라운 주의 역사인가를 바로 알 필요가 있다. 단지 누구나 믿는다는 의지로 예수를 영접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이는 엄연히 선물로 ‘거듭나야 하겠다.’ 하신 말씀을 이룬다. 성경은 이 일이 결코 혈통으로도 육정으로도 사람의 뜻으로도 이룰 수 없다는 데 방점을 찍는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하여 오늘 시인은,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
(28).
하는 고백으로 마친다. 좀 더 본문을 살펴 이를 연관지어 보면, 나병환자 넷이 있었다. 저들은 천대받고 멸시당하는, 소위 천형이라 하는 병에 걸린 사람들이다. 저들이 성문 어귀에서 생각한다. 들어가도 굶어죽고 여기 있어도 굶어죽으니 차라리 아람군이 진 친 곳으로 가 먹을 것을 구하자 한다. 하여 해 질 무렵에 일어나 아람 진영 끝에 이르러서 보니 저들 진영이 텅 비었다. 실은 저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한 것인데, “이는 주께서 아람 군대로 병거 소리와 말 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셨으므로(6).” 지레 겁을 먹고 줄행랑을 친 것이다(3-8).
여기서도 보면 먼저는 이 모든 된 일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사로 인한 것이었다. 저들 나병환자들은 굶어 죽을 판에 아람군이 진 친 곳으로 온 것인데 이와 같은 상황이 벌어져 있었다. 이를 다시 묵상하면 ‘돌아가자.’ 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온 둘째 아들 탕자를 떠올리게 한다. 그때 아버지는 저를 두고 큰 아들에게 하신 말씀이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 15:32).” 곧 우리의 믿음은 회개로 첫 발을 떼는데, 믿음이 없이는 거듭남이 없고, 거듭남이 없이는 믿음도 없다. 그 믿음은 죄를 직시하고, 이를 인정함으로 자신이 죄인인 것을 주께 고하고 주 앞으로 돌아오는 일이다.
다시 본문으로 오면, “나병환자들이 진영 끝에 이르자 한 장막에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거기서 은과 금과 의복을 가지고 가서 감추고 다시 와서 다른 장막에 들어가 거기서도 가지고 가서 감추니라(8).” 그러다 정신이 들면서 서로 말하되 “우리가 이렇게 해서는 아니되겠도다.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 우리가 침묵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알리자.” 하고 이스라엘 성문으로 돌아와 이와 같은 사실을 알린다. 저들의 말이 어떠한지 확인하려 사람을 보내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아람군대가 급히 도망한 것을 알고 이 모든 것을 노략하여 굶주렸던 백성들에게 가져온다(9-15).
결국 엘리사의 말은 현실이 되었고, 저의 말대로 하루 아침에 “고운 밀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이 되고 보리 두 스아가 한 세겔이 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다(16). 결국 이 말을 의심하였던 왕의 측근은 백성들에게 밟혀 죽는다. 그가 아무리 장관이라 하나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저가 전하는 말을 믿지 않음으로 “그의 장관에게 그대로 이루어졌으니 곧 백성이 성문에서 그를 밟으매 죽었더라(20).”
일련의 사태와 그에 따른 현상과 믿음으로 이를 받지 못할 때의 최후를 묵상하게 된다. 곧 우리의 믿음은 중생으로 거듭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기이한 현상이다. 이는 전적인 은혜로 이루어진다. 은혜가 아니면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 우리의 죄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영적으로 우린 죽은 자들이었고, 도덕적으로 타락하였으며, 법적으로는 죄의 값으로 죽어야 하는 신세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을 행한다는 것은 거듭남의 결과이지, 거듭나기 위하여 선을 행함이 아니다.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오늘과 같이 ‘내 인생은 나의 것’을 외치며, 스스로의 자존감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시대에 이와 같은 말씀은 반감이 든다. 하지만 성경은 일러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여기서 자유란 더는 나로 얽매이지 않음이다. 어떤 당위, 그래야 할 것 같은 의무감으로부터의 자유다. 이는 다소 어려운 주제이다. 없으면 책임이 결여되고 있으면 자기 의지로 주된 요인을 해결하려 든다. 세상이 그만큼 아리송하고 어렵다. 왜?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
왜 우린 영웅물의 영화를 즐기는가? 저들은 스스로 자기 인생을 개척한다. 이는 세상 교육의 중심이기도 하다. 자기 인생의 주체는 자신으로 ‘내 인생은 내가 지킨다’는 것인데, 예수님의 말씀은 그래서 더욱 사람을 어렵게 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대체 왜 새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일까? 한데 문제는 거듭나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으로 육신은 물론 영적인 죽음까지 모두 포함해서이다.
대체 거듭남이 무언가? 옛 생활을 반성하고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일까? 혹은 새로운 신앙의 종교인이 된다는 의미일까? 다시 말하면 옛 생활을 버리고 옛 본성을 개선한다는 의미일까? 그런 식으로 사람을 계도하여 새 사람으로, 새 삶을 살게 하는 그런 게 아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전들은 완전 새로운 현실을 맞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옛 본성을 고쳐 새 사람으로 사는 게 아니라 완전 새 본성을 덧입는 것이다. 새로운 신앙과 종교심을 갖는 게 아니라 새 생명을 갖고 사는 것이다. 초자연적인 현실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자기로 사는 일이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여기서 자유는 새로 개선된 더 나은 삶이 아니다. 전혀 다른 생명으로 사는 것인데, 예수를 찾아온 이는 다름 아닌 바리새인이었다. 저는 누구보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율법적으로 살던 자이다. 사울이 바울 되기 전의 모습처럼 저 또한 스스로 주 앞에 열심을 다하던 자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저를 보시고, ‘죽어야 살겠다.’ 하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죽은 자로 사는 자도 있다. 이를 예수님은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눅 9:60).”
곧 우리가 이 땅을 살며 알고 있는 도덕관, 나름 종교를 가지고 살며 꿈꾸었던 영적인 사고, 우리 영혼의 법적인 문제에 대하여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하고 말씀드리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61-62).” 곧 거듭남의 삶이란 우리가 생각하고 추측할 수 있는 그런 삶의 종류가 아닌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그러나 “또한 우리를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시옵소서 하라.” 하고 이르시되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살후 3:2).” 하셨다. 이 말씀의 상관관계가 거듭남의 원리다.
오늘 군대장관으로 있던 이는 이 모든 사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람의 예언을 믿지 못했다. 저의 결국은 다음 날 그리 되어 백성들에게 밟혀 죽게 된다. ‘내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 돌아왔다.’ 하는 아버지를 연상하게 된다. 기적을 안다고 해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미국을 안다고 해서 미국에서 사는 것은 아닌 것처럼, 안다고 구원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단 3:16).” 거듭남과 믿음은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 어째서 그런가?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 3:6-7).”
이는 우리의 지식과 이해의 한계를 넘는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8).” 즉 우리의 회개, 거듭남의 발로는 종교적 각성이나 신앙의 개선으로 얻는 게 아니다. 새로운 삶에 앞선 새로운 생명이다. 이는 초자연적 선물로, 우리 안의 일어나는 기적이다. 나는 누구를 대할 때, 말씀을 전하면서 자주 드는 생각이 믿음은 임의로 부는 바람처럼 어떻게 내 안에, 우리로 믿게 하심인지 우린 알 수 없다. 예수님은 이에 엄격한 기준을 말씀하셨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어떤 일, 말씀을 두고 믿고 안 믿고의 일이 우리의 자유의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예수님은 이를 숱하게 강조하셨다. 내가 길이다. 진리다. 생명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6:35).” 이는 믿고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다. 요한은 여기에 초점을 맞춰 기록한 이유를 밝힌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1).”
그리하여 믿는 것으로만 구원에 이른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 곧 우리가 거듭난다는 일은 그분의 생명을 덧입고 그분의 삶을 사는 것이다. 하여 바울의 고백처럼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오늘은 사모가 아이를 데리고 온다. 좀 봐주세요, 하는 말에 나는 큰 부담을 느꼈다. 아이는 여느 아이들과 다르고, 그럼에도 속엣 얘기를 하는 것을 들으면 그 부모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감정으로 세상을 배워가고 있다. 아이를 위해서도 주의 사역을 바로 감당해야 하겠다는 마음일 텐데, 소위 요즘은 온전한 아이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다시 말하면 그만큼 온전한 부모가 없다는 소리다. 아버지 부재의 시대를 산다는 것은 ‘통치’가 사라진 시대다. 성경의 가르침과 현대인의 교육관이 다르다. 본질적으로 아이라고 해서 죄인이 아닌 게 아니다.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더는 죄인이 아닌 것도 아니다. 우린 모두 죄인이다. 그 죄과는 믿음으로 소멸되었다 해도 여전히 죄악 가운데서 산다. 부모의 죄악됨이 아이의 인성과 영성을 어지럽힌다.
어찌 해야 하나, 나 혼자 생각이 많았다. 나는 ‘아이까지’ 감당할 자신이 없다고 밝혔다. 같이 점심이라도 먹으면서 아이를 좀 봐달라고 하는데, 설마 내가 뭐라도 나은 게 있어서 그러는 것은 아닐 테고… 다시 거절할 수도 없어, 그럴 거면 한두 시간 일찍 와서 같이 좀 보자 하였다. 내가 본다고 뭘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주의 뜻이 어디 계신가 알고자 함이었다. 그래놓고는 내내 마음이 어렵다. 두렵기도 하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사 6:5).” 나의 심정은 이러하면서 동시에 ‘여호와는 나의 왕이시다.’는 확신으로 그리 하기로 했다.
우리로 자신을 인정하게 하는 것은 어떤 깨달음이나 새로운 각성으로가 아니다. 예수 앞에 서야 한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 5:8).” 내가 뭐라고… 난들 나 하나 건사할 수 없는 죄인인 것을…. 그럼에도 내 안에 이는 마음은 해도 주가 하신다. 봐도 주가 보신다. 그럼 안 되겠냐? 하고 묻는 저이의 마음을 나는 그리 받았다. 우리 안에 믿음이 아니고는 영생도, 천국도, 주를 사랑하고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는 것도 불가능하다. 결국은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그러니 내가 한다 안 한다 할 문제가 아니란 생각을 한 것이다.
믿고 신뢰함이란 그러는 나 자신도 내가 낯선 법이다. 익숙한 거듭남은 없다. 나이 오십의 중후반을 사는 나로서도 모든 게 처음이다. 여든여덟의 고단한 육신을 이끌고 사는 장모의 삶도 처음인 것처럼, 우린 애나 어른이나… 증거가 필요하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11-12).” 요한이 첫 번째 서신에서 밝히는 바,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있는가? 그것이 있어야,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살려면 아들을 믿어야 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3).” 하신 말씀은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36).” 곧 거듭남의 삶은 실제이고 현실이다. 때론 잘 모르겠고 미심쩍어하는 두 마음에 끼어 갈등할 때도 있으나, 믿음이 있어서 거듭났고 거듭났음으로 믿는다.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35:1).
고로 오늘 시편의 기도처럼 내가 싸워 상대할 것이 아니다. 나 자신과의 싸움도 말이다. 이때 하나님을 앞세우는 일, 내가 어찌 하려는 내 생각이나 판단을 접는 것은 믿음의 지혜다.
방패와 손 방패를 잡으시고
일어나 나를 도우소서
창을 빼사 나를 쫓는 자의 길을 막으시고
또 내 영혼에게 나는 네 구원이라 이르소서
내 생명을 찾는 자들이
부끄러워 수치를 당하게 하시며
나를 상해하려 하는 자들이 물러가
낭패를 당하게 하소서
(2-4).
주가 친히 싸우신다. 오늘 이스라엘을 포위하고 있던 아람군이 줄행랑쳐 도망친 것처럼,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현상이 구원이고 그에 따른 믿음이다.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신 1:30).” 하여 나는 사모에게 한 번 주의 확신을 붙들면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주께 모두 맡기고 첫 발을 떼라 이르는데… 실은 그게 어디 쉬운가? 여전히 우리 자아는 우리의 주체가 되길 바란다.
그러나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사 50:9).” 이에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6).” 우리를 상대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대상은 아니다. 우린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를 주께 알리고 주의 도우심을 바란다. 왜냐하면 ‘사나 죽으나 나는 주의 것이다.’ 나는 이 사실에 안도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면,
그들을 바람 앞에 겨와 같게 하시고
여호와의 천사가 그들을 몰아내게 하소서
그들의 길을 어둡고 미끄럽게 하시며
여호와의 천사가 그들을 뒤쫓게 하소서
(5-6).
주께서 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셨다! 중생이란 그런 것이다. 거듭남이란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7-8).” 나도 모르는 현상 가운데서 사는 일이다. 지금은 희마하나 그때에는 선명해질 일이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그러므로 믿음뿐이다.
내가 대회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많은 백성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부당하게 나의 원수된 자가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시며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들이
서로 눈짓하지 못하게 하소서
(18-19).
주께 아뢰고 맡김으로 중생한 삶은 현실로 증명된다. 그러할 때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 10:33).” 비로소 내 문제, 나의 일에서 자유하고 남의 문제, 남의 일로 주께 고하고 함께 유익을 구하는 자로 살 수 있다.
나의 하나님, 나의 주여 떨치고 깨셔서
나를 공판하시며 나의 송사를 다스리소서
(23).
내가 저들보다 옳은 것은 주를 믿고 의지함이다. 이는 주가 더하시는 마음으로,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결코 내가 저보다 나은 게 있어서, 더 바르게 살고 있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나로 이 일을 감당하게 하심은,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29).”
하면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 자격지심과 열등의식조차 더는 나를 쥐락펴락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약 2:5).” 나야말로 누구 못지않게 쓸모없는 죄인이었는데,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합 2:3).” 그러므로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공의대로 나를 판단하사
그들이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소서
(24).
이처럼 당당할 수 있음은, 나는 약속을 가졌다. 거듭남이란 내가 죽고 내가 사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이에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기꺼이 노래 부르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그의 종의 평안함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는 말을
그들이 항상 말하게 하소서
(27).
나의 의가 무엇이 있겠나? 내가 주를 믿고 의뢰함으로 거듭난 자로의 삶이 삶 가운데서 증명되는 것일 테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나는 사모가 겪는 어떤 어려움 이면의 주의 뜻을 생각하며 소망한다. 저의 무너진 자신감은 주를 믿고 맡김으로 회복될 것이다. 아이 문제도 아이 스스로 주와의 관계에서 아이와 하나님의 관계일 뿐이다. 나는 이를 앎으로,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
(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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