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길르앗 라못으로 가라

전봉석 2022. 8. 4. 05:03

 

선지자 엘리사가 선지자의 제자 중 하나를 불러 이르되 너는 허리를 동이고 이 기름병을 손에 가지고 길르앗 라못으로 가라

왕하 9:1

 

주의 복을 받은 자들은 땅을 차지하고 주의 저주를 받은 자들은 끊어지리로다

시 37:22

 

 

하나님은 인류 모든 역사에 관여하신다. 이어지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역을 중심으로 남북 이스라엘의 네 왕들의 통치를 다루고(1-8장), 오늘은 북이스라엘의 장군 예후의 반란과 통치로 이어진다(9-10). 아합 가문의 심판을 예후가 관장하고 선지생도는 이를 알리며 예후의 머리에 기름 붓는다. 이는 엘리야 때의 예언으로 극도로 타락한 아합과 북이스라엘의 심판을 경고하신 바 있다(왕상 19:15-17). 일련의 사태를 두고 한 마디로 요약하면 오늘 시편의 한 구절이 적절한 것을 본다.

 

주의 복을 받은 자들은 땅을 차지하고

주의 저주를 받은 자들은 끊어지리로다

시 37:22

 

결국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진행된다. 지난주일 설교 본문 첫 구절에서,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100:1-2).

 

노래는 곧 우리 영혼의 표현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감정을 축약한다. 한데 아이러니한 것은 노래가 고난을 통해 나온다는 것이다. 노래로 서로 화합하고 주 앞에 나아감은 우리로 닥친 고난을 견디고 이길 수 있는 힘이기 때문이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19-21).”

 

문득 드는 생각이 왜 산문이 아닌 시와 노래였을까? 한동안 시인을 꿈꾸던 나는 시가 갖는 독특한 세계를 조금 안다. 시는 사람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있어 매우 함축적이다. 하여 시에 사용되는 언어는 ‘시어’라 하여 운율과 리듬을 살리는 데 있어 문법적인 제한을 일시 허용한다. 즉 시어는 단어의 뜻을 전달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고 감정을 전달하는 데 있어 함축적인 범위를 확장함으로 자유롭다. 반면에 산문은 덧붙여 설명하게 되는 구술이 많다. 한 상황이나 사건을 진술하는 데 있어 그 일의 발단부터 주변 개요까지 구술해야 한다. 산문은 이야기이다. 그러나 시와 노래는 그 모든 것을 생략함으로 구구절절 덧붙여야 할 생각들을 없이한다.

 

하나님의 섭리는 더러 맥락이 없다. 우리의 상식과 이해로 앞뒤 이야기를 알 수 없다. 여백이 많은 것이다. 생각의 확장을 의미한다. 여지를 둔다. 가령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조상으로서 저의 길을 제시하고는 그의 혈통으로 이삭 하나만 주셨다. 그럼에도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창 26:4).” 하시는 말씀 앞에서 우리로 멈추게 한다. 아브라함으로서는 당대에 그 일을 볼 수 없었다. 요셉은 그러한 자신의 고난의 길을 두고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문맥이 아니라 축약된 행간을 읽음으로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를 저는 알았던 것이다.

 

이를 히브리서 기자는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모두 그러하였음을,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히 11:39).” 그럼에도 저들이 믿음으로 받은 것은 ‘시와 노래’로 함축어로의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40).”

 

곧 우리가 부를 노래는 하나님을 의식하는 참여로 이뤄진다.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147:1).

 

내가 시편을 사랑하고 모든 성경을 읽는 데 있어 시편으로 이를 접근하고 묵상하는 것은 축약된 부분을 놓치지 않으려는 것이다. 축약은 생략이 아니다. 생략은 빼놓고 지나간다면 축약은 한데 뭉쳐 강하고 단단하게 다진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앞서 말씀하신 대로 예후를 통해 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우릴 세우심을 느낀다. 때론 그 섭리를 우린 알 수 없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셨는지… 맥락도 아무런 이유도 없이 벌어진 것 같은, 난데없는 사고 또는 고난의 모든 결정이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그런데 그와 같은 고난이 우리로 노래하게 한다는 것! 하다못해 대중가요도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노래를 들으면 ‘어떤 이별’이나 생의 축약된 공통분모를 갖는다. 그러니 우스갯소리로 시인들은 시를 쓰기 위해 이별을 하거나 연애를 한다. 생의 변수를 모의하는 것이다. 무던하여서는 시와 노래가 되지 않는다. 고난은 노래의 원료이면서 동시에 노래를 멈추게도 한다.

 

대표적인 예로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갔을 때 그 슬픔을 안고서는 도저히 노래할 수 없는 심경을 시인은 노래하였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137:1-4).

 

곧 우리 노래의 출처는 고난이다. 고난으로 찬송도 나오지만 고난으로 찬송조차 나오지 않는다. 한데 137편을 보더라도 그 자체가 노래다.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

(7).

 

결국 노래할 수 없는 상황에서 주를 생각하며 지은 시는 그것이 곧 찬송이 된다. 개인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찬송은 <내 평생에 가는 길>이다(새찬송가 413장). 어릴 때부터 유난히 좋아했는데, 뭘 안다고… 지금은 그 가사 하나하나가 의미를 확장한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저 마귀는 우리를 삼키려고 

입 벌리고 달려와도

예수는 우리의 대장되니 

끝내 싸워서 이기리라

내 지은 죄 주홍빛 같더라도 

주 예수께 다 아뢰면

그 십자가 피로써 다 씻으사 

흰 눈보다 정하리라

저 공중에 구름이 일어나며 

큰 나팔이 울릴 때에

주 오셔서 세상을 심판해도 

나의 영혼은 겁 없으리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찬송을 짓는 작사가들의 생은 대부분 말도 안 되는 고통을 겪는다. 하나님이 계시면 어찌 이럴 수가 있나, 싶을 정도의 고난이 저들 생에 느닷없이 닥친다. 앞뒤 축약한 하나님의 섭리를 알게 되면서 노래가 된다. 그 전에는 그저 죽고 싶은 마음뿐이다. 윌리엄 쿠퍼는 그와 같은 우울한 영혼으로 우울증에 시달리며 몇 번의 자살 기도까지 했으나 <샘물과 같은 보혈은>, (새찬송가 258장)을 지었다.

 

샘물과 같은 보혈은 주님의 피로다

보혈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정하게 되겠네 정하게 되겠네

보혈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저 도적 회개 하고서 보혈에 씻었네

저 도적 같은 이 몸도 죄 씻기 원하네

죄 씻기 원하네 죄 씻기 원하네

저 도적 같은 이 몸도 죄 씻기 원하네

죄 속함 받은 백성은 영생을 얻겠네

샘솟듯 하는 피 권세 한 없이 크도다

한 없이 크도다 한 없이 크도다

샘솟듯 하는 피 권세 한 없이 크도다

날 정케하신 피 보니 그 사랑 한없네

살 동안 받는 사랑을 늘 찬송하겠네

늘 찬송하겠네 늘 찬송하겠네

살 동안 받는 사랑을 늘 찬송하겠네

이 후에 천국 올라가 더 좋은 노래로

날 구속하신 은혜를 늘 찬송하겠네

늘 찬송하겠네 늘 찬송하겠네

날 구속하신 은혜를 늘 찬송하겠네

 

본문을 다소 벗어난 듯하나, 이는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우리가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데 단순하게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으로는 부족함을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 ‘쉬운성경’이나 ‘한글성경’ 심지어는 더 올바른 번역을 운운하는 것에 크게 동의하지 않는다. 이는 숲은 안 보고 나무만 보고 숲을 알려는 것과 같다. 또는 시가 어렵다고 하여 산문으로 늘어놓고 읽으려 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시는 이유는 하나다. 열어주셔야 보인다. 그래서 성경은 계시다. 주의 자녀는 이를 알아 본다. 마치 아이의 웅얼거림을 엄마는 알아듣는 것처럼 저들로 하나님의 언어를 보게 하신다. 해서 나는 성경공부를 해도 단어의 어원이나 문맥을 이해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을 두지 않는다. 그러느니 차라리 입에 물고 뜯는 게 낫다. 말씀은 삼켜야 한다. 배경이나 동기는 부수적인 산문의 영역이다. 함축어는 이를 생략함으로 자유롭다. 계시는 보여줌으로 알게 한다. 하나님의 섭리는 알면 알수록 의문만 쌓이다 여백이 채워진다. 그 여백은 우리 삶으로 채워지면서 말이다.

 

하여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이 단순하고 놀라운 한 구절이 성경 66권을 통째로 축약한다. 지혜자도 일러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전 7:13).” 나는 종종 누구와의 대화가 풀리지 않을 때 이 구절을 떠올린다. 저에게 이를 단서로 제공한다. 의외로 인생은 단순하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14).”

 

내가 다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알 수도 없다. 어째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어릴 때, 젊을 때, 나는 너무 오랜 시간을 이 문제를 알고자 씨름했다. 그 이유는 ‘내 인생은 나의 것’이란 주체를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일이 열거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그래서 나는 시인을 꿈꾸었고 이를 축약할 수 있기를 바랐으나, 이처럼 나는 구구절절 산문을 쓴다. 그렇다고 산문은 아니라는 소리가 아니라, 그 세계를 너무 구석구석 진술하고 묘사하는 데 있어 시처럼 함의로 축약할 수 없다. 어쩌면 목사는 시인이 아니라 산문가이다. 풀고 또 풀어서 꼬여 있는 듯 이쪽과 저쪽의 엉긴 매듭을 다시 이어줘야 한다. 하여튼!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느 9:6).” 이와 같이 모든 성경의 언어는 시편이 아니더라도 시어와 같이 함축어로 쓰였다. 세계와 세계 사이가 열렸다가 닫혔다 한다. 닫히면 벽이다. 열려야 문이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그렇다면 우리의 사명은 이를 열어 보이실 때 들어가고, 닫힐 때는 기다리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1-12).”

 

결국 우리 성도의 개개인이 하나하나의 음표와 같다. 시어이다. 너와 내가 연합하여 단어가 되고, 각 마디가 연결되어 한 음절이 되어 주를 찬송하는 노래가 된다. 그래서도 우린 전하는 자들이다. 들려주는 자들이다. 보여야 한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사 52:7).” 이를 오늘 본문 서두에서 엘리사는 젊은 선지생도를 보내 길르앗 라못에 있는 여호사밧의 아들 예후를 찾아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붓게 한다(2-3). 뜬금없고 난데없는 일 같은데 그로 인해 한 역사는 지고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 그러니 우리의 사명이 얼마나 엄청난가?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오늘은 신대원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앞에서 세미나, 그것도 설교를 하게 한 설교학 교수가 오기로 했다. 저는 한 번도 강요하지 않았고, 나를 형이라 부르며(?) 친근함으로 내게 참여의 자리를 내어주었다. 그리고 마지막 학기 때 예닐곱 명의 수업에서 나는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했다. 늘 원고로 대신하던, 병적인 나의 자세에 문을 열어준 것이다. 어려우면 안 해도 됩니다, 하는 말에 성령이 붙들어 일으키셨던가? 3학기를 하면서 같이 수학한 동기들도 나의 불안을 모두 양해하였다. 저들의 기다림도 하나의 열린 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고후 10:13).” 그때의 과정을 지나와서일까? 오늘의 목회에 대해 누가 묻는다면 나는 바울의 설교로 그 답을 대신할 뿐이다. ‘분량으로 나눠주신 그 분량의 한계’를 나는 더 이상, 왜요? 하고 되묻지 않게 되었다. 거의 일평생 나는 이 물음의 답을 스스로 채우려 기를 쓰고 살았다. 학창시절의 고단했던 삶에서는 물론 젊은 날의 억울함과 어떤 원망을 보란 듯 내멋대로 행사하면서… 그 숱한 죄악됨을 이제는 거울삼아 산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1-2).”

 

나의 충성이 죽이 되든지 떡이 되든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라, 하고 내맡기는 것. 그 근거로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곧 오늘 우리의 노래는 고난을 바탕으로 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가려져 있다. 닫힌 문은 어디가 벽인지, 문인지… 이때 나의 키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데서 문고리를 잡는다. 이제 평안하다.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하는 찬송의 반복이 내 것이 되어 간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내 탓이 아니다. 내 탓인데도 내 탓이 아니어야 한다. 어떤 결과든,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행 17:31).” 그러므로 나는 용서를 구하고 주는 개의치 말라 하신다. 누가 또 어그러졌을 때, 나름 나는 잘해보려고 주의 이름으로 다가간 것인데 혹시 나 때문에 일이 망친 것 같아서 괴로워하다… 전혀 그럴 일이 아니라는 것, 다만 “내가 또 너희 위에 파수꾼을 세웠으니 나팔 소리를 들으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듣지 않겠노라 하였도다(렘 6:17).” 그럼 어쩔 수 없는 건데, 예후에게 기름을 부으라 하실 때 젊은 선지생도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저가 그 일을 빌미로 자신을 죽일 수도 있었고, 혹은 없었던 일로 삼을 수도 있는데… 거기까지다. 내 탓인데 내 탓이 아닌 것이다.

 

하여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나는 다만 이를 붙들 뿐이다. 그렇게 많은 믿음의 선친들은 이 일을 앞서 갔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 11:36-38).” 이를 안 믿는 자들은 미련하게 보지만,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약 4:15).” 남들이 뭐라 하든지.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37:1).

 

저들은 저들의 일을 행할 뿐이다. “악인의 등불이 꺼짐과 재앙이 그들에게 닥침과 하나님이 진노하사 그들을 곤고하게 하심이 몇 번인가 그들이 바람 앞에 검불 같이, 폭풍에 날려가는 겨 같이 되었도다(욥 21:17-18).” 그러므로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잠 23:17-18).” 나는 다만 내 길을 간다. 어떠한가 하면,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3-6).

 

오늘 시편도 축약된 시어 사이사이에 하나님의 섭리, 그의 성품을 여백으로 남겨두고 있다. “공의로 판단하시며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원통함을 주께 아뢰었사오니 그들에게 대한 주의 보복을 내가 보리이다 하였더니(렘 11:20).” 이에 그 빈 여백을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의 삶으로, 내 이야기로 채워가야 한다. 그러할 때,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7).

 

이는 수련과 연마로 이뤄지는 것인데, 인내까지도 주가 주시는 권능으로 가능하다. 곧 믿는 일도 구원을 이루어가는 일도 저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는 일도, 모두가 주의 놀라우신 은혜와 섭리 가운데서 나는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8).

 

나는 할 수 없으나 나로 할 수 있게 하신다는 것인데, 때론 내가 못하겠다고 징징거려도 주는 아랑곳하지 않으신다. 이때 주가 나를 사랑하셨던 그 크신 사랑을 묵상하면 유구무언이 된다. 왜냐하면 나는 실제로 한 게 없다. 다만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 주를 인정하는 것, 오늘까지 교회를 이뤄오면서 내가 한 게 있던가? 늘 주가 예비하신 곳에 두셨고, 앞서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돕는 손길들과 주의 은혜로 주가 다 이루어 놓으신 것을 나는 인정하며 사는 것일 뿐인데, 해서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애 3:25-26).” 조금씩 아주 조금씩은 알 것 같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하시고 저들의 마음 써주는 마음으로 주의 마음을 눈치 채면서, 

 

주의 복을 받은 자들은 땅을 차지하고

주의 저주를 받은 자들은 끊어지리로다

(22).

 

이것이 믿는 자의 순리였다. 하나님의 섭리는 오묘하시다. 지나고 보니 믿음으로 사는 게 가장 쉬웠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23-24).

 

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7-58).” 바울은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그 고통 중에, 감옥에서도 기쁨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 수 있었을까 했더니, 그게 다 주가 행하신 거였다. 저는 다만 그를 인정함으로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그처럼 주의 사랑은 오묘하나 주와 함께 사는 삶은 단순하고 명료하였다. 도대체 내 책임이란 게 없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 지고 가셨다. 그리고 기다리신다.

 

여호와를 바라고 그의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똑똑히 보리로다

(34).

 

엄연히 우린 주의 자녀로서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잠 24:16).” 그러므로 “나의 대적이여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에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미 7:8).” 

 

온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지어다

모든 화평한 자의 미래는 평안이로다

(37).

 

반드시 주는 약속하신 바 주는 말씀을 따라 이루실 것이고, 나는 그리 되어 갈 뿐이다.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91:15).

 

이는 곧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사 58:9-11).” 그러므로

 

의인들의 구원은 여호와로부터 오나니

그는 환난 때에 그들의 요새이시로다

(3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