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아스가 그와 함께 여호와의 성전에 육 년을 숨어 있는 동안에 아달랴가 나라를 다스렸더라
왕하 11:3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시 39:7
남유다 여호람 왕의 처 아하시야 왕의 모후인 아달랴가 일시로 왕권을 쥔다. 그러면서 유다 왕족을 진멸하는 가운데 어린 요아스를 6년 간 성전에 숨겨 기른다. 후에 어린 요아스가 왕권을 찾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도 하나님의 구속사는 끊이지 않는 것을 본다. 오늘도 여전하여 종말까지 이어질 것이다. 이에 주를 신뢰하고 의지함이 귀하다. 가령 아침에 묵상글로 저녁에 가정예배로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게 십 수 년이 되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어떤 절박함 혹은 무던함이 은혜이다. 돌이켜 가족들 앞에 먼저 무너진 모습 그대로를 보인 뒤 우린 가정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같이 모여 찬송하고 기도하고 성경을 한 장 같이 읽는 정도지만 더러는 누가 빠져도 둘이서라도 한다. 엄밀하게는 하게 하신다는 표현이 맞겠다. 이젠 마치 끼니때에 식탁에 앉는 일처럼 사소하고 자연스럽다.
주를 의뢰한다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사 63:9).” 곧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날에 동참하시고 ‘자기 앞의 사자’로 우릴 구원하심이다. 어제도 한 주간을 마무리하는 금요일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우리 안에 주를 구주로 삼고 살게 하심에 감사하였다. 인생이란 무던함으로 벌이는 승부인 것 같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 3:22).”
격변하는 남북 이스라엘의 역사와 그 왕권 다툼을 보면서 어떠하든 그 역사 속에 개입하시고 끊임없이 이어가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에 때론 놀랍다. 그럴 때 보면 공통분모가 하나 있는데 이는 인내로 주의 뜻을 사모하는 것이다. 그렇게 아달랴가 휘젓듯 남유다를 다스릴 때에도 다음 계보를 잇는 요아스는 성전에서 자라고 있었고, “일곱째 해에 여호야다가 사람을 보내 가리 사람의 백부장들과 호위병의 백부장들을 불러 데리고 여호와의 성전으로 들어가서 그들과 언약을 맺고 그들에게 여호와의 성전에서 맹세하게 한 후에 왕자를 그들에게 보이고…” 하며 이어지는 과정이 새롭다(4).
세상이 어찌 돌아가든지, 지금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주를 바라며 묵묵히 인내하고 무던함으로 이 길을 가는 자에게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누구와 그의 가정에도 권하기를 끊이지 않고 가정예배가 드려지기를, 아이의 일이나 남편의 문제로 혼자 씨름할 것이 아니고 이를 주께 맡긴다는 것은 주의 개입을 공식화하는 일이다. 나로 돌이켜 주의 길을 가게 하실 때, 나는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었다. 그때 큰애가 고2 작은 애가 중2, 다들 학교 끝나고 학원 끝나고 돌아오면 10시 11시가 넘는데도 그때에 같이 둘러 앉아 손을 잡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찬송한 일은 놀랍기만 하다. 나는 물론이고 다들 어색하여 싫은 내색도 있었지만 그것이 일상으로 자리 잡으면서, 이제는 아주 당연한 하루 일과가 되었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시 37:7).
주가 일하심을 확신할 수 있는 게 가정예배와 묵상이다. 그저 형식적인 것 같다 해도, 마치 밥맛이 없어 물에 말아 먹는 끼니라 해도 그렇게 우리의 영육간의 강건함은 무던함으로 생을 이어간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4).” 마치 뭔가 달리 해야 할 것 같은 마음도 부질없다. 새로운 시도도 그때마다 변덕스럽기만 하다. 그때, 하나님이 나를 강권하심으로 돌려세우셨을 때 늘 밤낮이 바뀐 생활을 하던 사람이 새벽마다 이끌려 새벽예배를 나갔다. 가면 늘 울다 오는 게 일이었으나 그것이 오늘에 이르러는 이와 같은 묵상의 시간이 된 것 같다. 무던한 세월 앞에 장사 없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65:4).
나는 이 시의 고백을 사랑한다. 그러면서 더는 아이들 일에 부모로서의 조바심이나 간섭이 없어졌다. 어떠하든지 우리의 예배 중에 주의 영이 각자에게 임재하실 것을 믿는다. 공부하느라 예민해진 아들도 묵묵히 가정예배를 지킨다. 나는 설교 가운데 평소 하고 싶은 말을 말씀으로 전한다. 이는 모두 주께 맡김이다. 주께서 알아서 하실 것을,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 4:8).” 할 때,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144:15).
주가 이루신다. 모든 역사에 개입하시듯 하나님의 구속사는 끊이지 않는다. 모든 게 소멸되고 더는 부질없이 여겨져도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눅 19:17).” 어느 훗날 주가 칭찬하실 내용은 간단하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 4:1).” 그러할 때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하면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3-4).” 이것이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다. 주가 하신 일에 대해 나는 그저 쓰임을 다할 뿐이다. 믿음이란 결코 수동적인 게 아니라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다. 내가 어찌 해보려고 하는 생각과의 혈투다.
더는 가족들의 일에 뭐라 하지 않는 것은 함께 예배드리고 주일을 지키고 각자 고백하며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되었다. 저들도 저들의 하나님과 관계가 성립되었을 것을 믿는다. 그저 각자의 생으로 다만 충성할 뿐이다. 충성이란, 나의 생각이나 주장을 뒤로 하는 것이다. 아침에 꼭 이 글을 쓰고 이처럼 매일 이럴 게 해서 뭐 있나 싶을 때가 왜 없게나? 그러나 그러한 나의 생각을 무시한다. 이 길이 맞나? 하는 의심도 개의치 않는다. 그저 나로 주의 말씀 앞에 앉히는 것. 여느 교회는 어떠한데 이렇듯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 같은 일에 언제까지 이래야 하나 싶을 때도, 이게 아니라면 주가 알아서 하실 일이지 내가 어찌 바꾸어 볼 문제가 아니라, 믿고 맡기는 것. 나는 경영자가 아니라 그의 종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일생을 무던하였던 노아를 생각한다.
어떤 변화도 성과도 누구의 동조나 더 나아지는 아무런 기미도 없이 그저 매일 같은 일의 연속으로 무려 120년이나 방주를 지으면서 저의 심정은 어땠을까? 답답하거나 의문이 들거나 하나님께 되묻지 않았을까? 한데 가만히 오늘의 나로 저를 생각하면 그러는 동안 저는 그것으로 충분하였다. 주가 함께 하시고 주를 의뢰하는 것으로, 아무도 저의 모습에 감동하여 주를 영접하고 돌아오지 않았다 해도,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2:21).” 그러면서 맞이하는 오늘 하루도 또 주가 어찌 다루실까, 하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 10:42).”
그렇다고 난 나의 하루가 누구보다 거룩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이래도 되나 싶게 느슨하고 나른할 때도 있다. 누가 오고, 어떤 일을 함께 다룰 때 느끼는 긴장으로 가슴이 눌리는 불안을 겪기도 하지만 그 또한 이젠 그러려니 하고 약을 먹고도 진정이 안 되면 또 먹으면서도 묵묵할 뿐이다. 할 만하니까 하게 하시는 것이고, 할 수 있으니까 맡기시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엊그제도 서로가 잘 아는 교수와 만나 모처럼 이런저런 얘길 하다가, ‘이러다 죽자’ 하는 심정으로 한다고 고백하기도 하였다.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나는 다만, 오늘도 나무를 해오고 다듬고 방주의 어느 귀퉁이의 틀을 깎아 끼우든간에 묵묵히 그 일을 하면서, 쨍쨍한 날에도 홍수를 대비하였을 노아를 생각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9:7-8).”
실은 주가 하심을 알았다. 내가 한다고 하는 일이 모두 주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임을 이젠 의심하지 않는다. 아니, 내 안에 드는 의심까지도 그러려니 하고 내버려둔다. 나의 감정이나 생각은 저 혼자 요동치기 마련이어서 일일이 이를 상대하면 버릇만 든다. 나의 어떤 판단을 우선하는 일보다 더 큰 훼방은 없다. 그래서 이걸 해볼까, 이럴 땐 저렇게 해볼까 하는 생각에서 나는 이제 뒤로 물러선다. 그리고 묵상을 하고 가정예배를 드리고 주를 인정한다. 주의 관여와 개입을 알기 때문이다. 또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면서도 주가 하실 것을 알고 주의 이름을 부르다 잠든다. 이게 아니라면, 그 또한 주가 가장 선한 때에 막으실 것이다! 하여 조바심으로 쩔쩔매느니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란 의뢰함이 훨씬 쉽다. 모두 밀어둔다. 주 앞으로 말이다. 누가 왕이 되고 또 어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이 뒤섞이든지 우리의 여호와 하나님 만군의 주는 언제나 그 시대마다 주의 사람을 붙드셨다.
오늘 시편의 기도와 찬송을 나는 그리 되뇐다.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하지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
(39:1).
나는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운데 하게 하시는 일에 충성할 뿐이다. 나를 잘 알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나를 상대하지 않으려 애쓴다. 나는 내가 제일 어렵다. 내가 제일 골치다. 내가 늘 말썽이다. 그런 내가 또 무슨 꿍꿍이로 어떤 마음이 동할 때, 더는 동요하지 않고 주께 아뢰고 맡기고 내어버리듯 그 앞에 두는 것. 새로운 나를 내가 기대하고 도모할 문제가 아니다. 나는 그저 묵묵히 오늘 주시는 말씀으로, 이 길이 맞나? 싶은 생각을 멀리하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흔들려서는 늘 제자리걸음을 면할 수가 없다. 그럼 누구라도 지친다. 내가 하려 하면 망한다. 예수를 나의 구주로 알기 전에는 항상 그와 같은 일의 연속이었다. 그러니 내가 아는 나는 내가 하려 하는 것과 거리를 두고 주께로 더 가까이 하는 것이 복이었다. 하나님의 징후는 현실 가운데 생생하다. 오늘 시편에서 읽는 내용도 그것이다. 때론 침묵하고 무던하게 하던 대로 하는 것이 지혜를 더하신다.
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하지 아니하니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
(2).
이는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수백 년 후에 예수님도 그리하셨다. 곧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3-25).” 일체 의문을 가지고 꼭 이렇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으로 다른 계획을 세우신 게 없다. 오직 주의 뜻대로, 아버지의 원대로. 그리하여 이루어진 구원을 성부 하나님이 가벼이 여기실 리 없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불이 붙으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3-4).
곧 인생의 허무함을 알고 사는 삶이 지혜롭다. 그 끝은 같아서 화려한 장례를 두고 호상이라 할 수 없고 무연고의 초라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해서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어느 인생도 그 끝은 같음으로,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24-25).” 하여 말씀으로 붙들려 사는 일은 세상을 기웃거리지 않으면서도 세상을 마친다.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
(5).
이는 허무함이 아니라 허사뿐인 세상에서 그럼 우린 무얼 바라고 살 것인가, 하는.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20-21).” 그래서 가만히 주변을 봐도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9-10).” 저들의 끝이 허무할 뿐이다.
이를 우린 주 안에서 이겨내는 자들인데,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6).
하여,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7).
이와 같은 고백을 가슴에 새기고 산다는 일은 세상 남부러울 게 없는 일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곧 우리에게 일어나는 하나님의 섭리는 언제나 선을 이루신다. 어떠한 결과로든 이 땅의 일로 결정되고 정의되지 않는다. 이 땅으로 전부였다면 믿음으로 사는 우리보다 불쌍한 사람도 없다. 노아가 불쌍하다. 그러나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함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까닭이니이다
(9).
주를 신뢰함이란 나의 의견이나 판단이 중요한 게 아니란 것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아직 젊을 때, 자신이 뭐든 하면 할 수 있을 것 같은 때는 인정하기 어려운데… 그래서 주가 저의 의지를 거두어 가실 때, 그 고통은 가히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다. 한데 그런 일, 그 고통조차 없다면 그게 더 끔찍한 일이다. 하나님의 내버려두심의 결과는 우리가 익히 잘 안다. 차라리 오늘의 고통과 징계가 사랑인 것을 이젠 잘 안다.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며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나이다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
(11-12).
오늘 시편의 마무리가 불행한 듯하나 복이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창 45:8).” 이처럼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것,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이를 근거로 무던할 수 있다는 게 은총이었다. 그 어떤 축복보다 복이었다. 그러므로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11-12).”
그러할 때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 12:7-8).”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부복하는 일, 묵묵히 무던함으로 인내를 이룬다는 것은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하여,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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