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

전봉석 2022. 8. 5. 04:48

 

예후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중에서 바알을 멸하였으나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 곧 벧엘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는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왕하 10:28-29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

시 38:21-22

 

 

예후는 반란을 일으켜 아합을 치우고 이세벨을 처단하였다. 사마리아 방백들을 위협하여 아합의 아들 70명을 참수한다. 이는 엘리야를 통해 예언된 바가 성취됨이다. 왕족시대가 갖는 참상으로 역성혁명으로 얻은 정권은 이전 왕조를 몰살한다. 늘 되풀이 되는 이야기나 부모의 죄는 저들 대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아합의 아들들이 모두 참수되는 것을 보며 앞서 아합과 이세벨의 죄악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성경은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다시는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의 이가 신 것 같이 누구나 자기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리라(렘 31:29-30).” 서로의 죄는 개별적인데 서로가 죄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바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겔 18:2-3).” 저가 악인일지라도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죄는 곧 우리의 본성이라 죄에 이끌리는 죄과로 인해 배교하고, 죄악을 서슴지 않는 것이 우리의 실상이다. “너희의 죄악과 너희 조상들의 죄악은 한 가지니 그들이 산 위에서 분향하며 작은 산 위에서 나를 능욕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먼저 그들의 행위를 헤아리고 그들의 품에 보응하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사 65:7).” 말씀 앞에 가만히 앉아 지나온 나의 삶을 돌아볼 때 어찌 두렵지 않겠나? 그러니 오늘의 이 모든 게 은혜이고, 다윗의 고백처럼 항상 내 앞에 있는 죄로 신음하며 씨름할 따름이다.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시 51:2-3).

 

그러니 죄는 언제나 하나님과 나 사이의 문제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4).

 

사람과 사람 사이의 죄악은 본디 우리가 서로 악하여, “그가 제 어머니의 시킴을 듣고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마 14:13).” 헤로디아는 딸을 시켜 헤롯을 충동하고 저로 요한의 목을 치게 하였다. 악은 악함으로 죄라 여기지도 않는다. 다만 두려운 것은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16:27).” 우리의 결국을 살펴 묵상하면 은혜가 아니면 피할 길이 없다는 데서 두렵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없었던 일로 무마되고 덮일 죄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길은 무얼까?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56:11).

 

주만 의지하고 주 앞에 모두 가져다놓는 수밖에…. 언제는 신대원 때 교수가 다녀갔다. 모처럼 서로의 안부를 묻고 이런저런 근황을 나누는 데 있어 오늘의 현실도 예전의 것과 다르지 않음을 비탄스러워했다. 더욱이 목사나 교수 사회의 숨겨진 죄의 참상은 일반적인 문제들을 능가한다. 그러니 우리가 붙들고 설 수 있는 게,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이처럼 나는 필사적으로 묵상하는 시간에 말씀 앞에 나를 앉히는 데 하루의 중점을 둔다. 이는 나의 죄성을 알고 언제나 동일한 죄과가 내게도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차마 일일이 말할 수 없는 개인적인 어려움이 실은 주를 더욱 갈급하게 한다. 하여 나로서는,

 

주의 모든 계명들이 의로우므로

내 혀가 주의 말씀을 노래하리이다

(119:172).

 

말씀 앞으로 나를 앉히고 이와 같은 시간으로 하루가 채워지기를 바랄 뿐인데, 때론 이것이 너무 병적인가? 혹시 강박적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해도 몸에 밴 죄의 습성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 거듭나지 않으면 별 수 없는 일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 3:6-7).” 아직 육으로 살아야 하는 세상에서 내가 무슨 수로 육의 원함을 물리치며 살 수 있을까? 나는 할 수 없으나 나로 하게 하심을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8).” 나도 어찌 그러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하여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5).” 하신 말씀에 주목하게 되었고, 이는 ‘완전한 길’을 주목하여 ‘완전한 마음’으로 행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설교학 교수라 자연스럽게 어찌 설교 준비가 이루어지는가를 나누었고, 나는 매일 이와 같은 묵상글이 모여져 한 주간의 설교원고로 정리가 되는 것을 감사하였다. 마치 날마다 조각글을 쓰듯 하루하루 모여진 말씀과 묵상이 주일에 전해야 할 말씀과 무관하지 않음을 안다. 마치 우연처럼 겪는 일상의 모든 일들이 실은 주가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시청각교재처럼 전해오는 것도 느낀다.  하여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19-21).”

 

결국 사람을 두려워하고 세상을 곁눈질하면 비굴해지지만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영예로운 삶이 된다. 아무 것도 내세울 게 없고 성과도 없는 처지에서 나는 오늘의 이 모든 상황에 감사함으로 무던할 수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하게 하시는 이의 권능으로 말이다. 지혜자도 말하길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 그러니 별 수 없다. 사느라 산다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을 염두고 두고 살 수밖에는 없는 일이겠으나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곧 두려움의 실체를 바로 알 때, 사도들의 고백처럼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 이는 이제 우리 앞에 놓인 선택의 과제다. 저마다 애나 어른이나 자신이 옳다 여기고 좋다 생각하는 것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나는 무엇을 바라고 살 것인가?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얼마든지 편하고 아무렇지 않을 상대를 만나면서도 나는 긴장하여 평소보다 안정제를 더 먹어야 했고, 중간 중간 엄습하는 어떤 불안감에 치를 떨기도 하였다. 그러니까 나 혼자 평온하게 있을 때는 그런대로 견딜만한 것이 이유랄 것도 없이 서로 좋아하고 바라던 사람을 만나면서도 이처럼 어려워서야! 모처럼 만남이라 그렇기는 하였겠으나, 나는 그러므로 주를 바란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그래서 말씀 앞에 앉힌다. 나의 한 날을 다시 돌아보며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나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한다. 그때가 누가 생각나고 저의 어려움이 내가 겪는 일과 다르지 않아 나는 저를 두고 주께 구한다. 어쩌면 그러하여 내 곁에 두시는 이들이 하나같이 나 같은가, 하는 생각도 한다. 나 같다 함은 우리의 연약함을 두고 하는 소리다.

 

누구는 주의 일을 갈망할수록 이를 저지하는 어떤 두려움으로 신음한다. 가령 저의 대인기피증이나 공포증은 주의 일은커녕 일상적인 삶도 어려울 듯하다. 한데 또 그 마음에 두시는 갈망은 주를 전하고 주의 일에 쓰임 받길 간구하는 것이다. 그러니 앞뒤가 맞지 않고 어쩜 그렇게 우리의 어려움 가운데서 주님은 일을 하시려는가, 하는 반감이 생기기도 한다. 그럴 때 우리가 서로 곁을 같이 한다는 것,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잠 13:20).”

 

나는 이런저런 어려움으로 모두가 돌아가고 오후가 되어서도 숨을 고르며 고통을 느껴야 했다. 왜 그러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를 통하여 더욱 절실해지는 것은,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14).” 나로 주의 길을 달려가게 하시는 원동력은 무난한 진행이 아니라 어떤 절박함으로였다. 그럼에도 누굴 만나고 사랑하고 주의 이름으로 저와 마주하게 하시는,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8-29).”

 

오늘 본문의 끔찍한 참상과 그 가운데서도 목숨을 부지하려 전전긍긍하는 자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면서, “조용히 들리는 지혜자들의 말들이 우매한 자들을 다스리는 자의 호령보다 나으니라 지혜가 무기보다 나으니라 그러나 죄인 한 사람이 많은 선을 무너지게 하느니라(전 9:17-18).” 하여 나는 필사적으로 아침이면 주 앞에 앉힌다. 나로 말씀 앞에 앉게 하심을 은혜로 삼는다. 하루 중 하는 일이 이게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주의 말씀을 따라가다, 그것으로 나의 가는 길 ‘완전한 길’을 주목하고, ‘완전한 마음’으로 이를 행하기를 간구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

(101:2).

 

이렇게 이번 주일 설교원고가 윤곽을 드러내고 한 주간의 삶이 취합되어 주의 은혜를 받은 몸으로 전하게 된다. 그게 그저 한 영혼이라 하여도, 그것으로 노래하며 견딘다.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42:7-9).

 

주 앞이 아니면 누구에게 이를 알릴까? 설령 저가 나를 이해하고 위로한다 한들 나는 무엇으로 ‘완전한 길’을 주목하며 나아갈 수 있을까?

 

오늘 시편에서 시인의 절규를 듣는다. 저의 부르짖음이 나의 것과 같아서 나도 저처럼 주 앞에 나를 내어놓게 된다. 오늘 시는 참회 시로 분류되어 6편을 위시하여 32, 38, 39, 51, 130, 143편과 같이 육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통 중에 주를 찾는 시들이 있다. 이를 자신의 죄로 인함인 것에 간절함으로 주의 도우심을 호소한다. 오늘 시를 다윗이 밧세바를 간음하여 겪는 질병으로 6, 32, 51편과 같은 역사적인 배경에 놓고 보는 시각도 있다.

 

고통은 개별적이고 자기만의 몫이다. 아무리 가까운 이라 해도, 욥의 처는 저를 욕하고 하나님을 저주하고 떠났으며 저의 친구들은 그의 고통을 보고 일주일째 가까이 오지 못하고 멀찍이 서서 무얼 어찌 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였다. 고통은 찌르고 상처를 내고 악취가 나듯 서로를 피곤하게 하며 불안으로 신음하게 하고 탄식하고 심장이 뛰고 벙어리처럼 점점 더 할 말을 잃게 한다. 다시 말하면 오늘 시어로 구사된 고통의 언어는 오롯이 자신이 지고 가며 주와 직접 대면해야 하는 일이다.

 

시편은 이를 하나님의 징계로 열거하며 시작한다(1-10). 그리고 그 고통이 극심한 까닭으로 원수의 핍박에도 아무 대응을 할 수 없음을 토로한다(11-16). 하여 결국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속히 자신을 구원하여 주실 것을 주께 호소한다(17-22). 이를 보면서도 느낄 수 있지만 나는 내가 기도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 일인지를 알겠다. 이는 우리가 가진 비밀병기다.

 

여호와여

주의 노하심으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고

주의 분노하심으로 나를 징계하지 마소서

주의 화살이 나를 찌르고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

(38:1-2).

 

주 앞에 아뢸 때 모든 권세가 주께 있음을 알고,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픔 중에 다니나이다

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6-8).

 

이와 같은 하소연을 과연 누구에게 할 수 있으며, 한다 한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6).” 이처럼 서로가 자신을 토로하고 직면한 모습 그대로 드러내어 함께 기도할 수 있음이 복된 사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사는 동안 이와 같은 어려움에서 누가 과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기를 쓰고 돈을 벌고 자신의 취향과 만족을 위해 살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덮고 산다 해도, “그들의 안색이 불리하게 증거하며 그들의 죄를 말해 주고 숨기지 못함이 소돔과 같으니 그들의 영혼에 화가 있을진저 그들이 재앙을 자취하였도다(사 3:9).”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8-10).”

 

결국은 하나님이다. 말씀으로다. 죄는 다른 방도가 없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렘 17:5).” 이와 같은 말씀을 듣고도 여전히 추구하는 삶이 다르다면 별 수 없다. 저는 저가 옳다 여기는 길로 가는 것이다.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

(9).

 

비록,

 

내 심장이 뛰고 내 기력이 쇠하여

내 눈의 빛도 나를 떠났나이다

(10).

 

심지어는,

 

내가 사랑하는 자와 내 친구들이

내 상처를 멀리하고

내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

(11).

 

그러할진대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 4:14-16).” 그리하여,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내가 말하기를 두렵건대

그들이 나 때문에 기뻐하며

내가 실족할 때에 나를 향하여

스스로 교만할까 하였나이다

(15-16).

 

그런 와중에도 행여 나의 모습으로 주의 영광이 가려질까 하여, 그러나 주님은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 이와 같은 견딤은 내 의지로가 아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이에,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

(21-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