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전봉석 2022. 8. 7. 05:18

 

요아스 왕이 대제사장 여호야다와 제사장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성전의 파손한 데를 수리하지 아니하였느냐 이제부터는 너희가 아는 사람에게서 은을 받지 말고 그들이 성전의 파손한 데를 위하여 드리게 하라

왕하 12:7

 

주를 찾는 자는 다 주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시 40:16

 

 

요아스가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도움으로 남유다 8대 왕에 즉위한다. 여호야다의 주도 아래 대대적인 성전 재건과 함께 종교개혁도 이루어진다. 요아스 왕은 나이 7세 때에 그러니까 북이스라엘 예후 7년 곧 B. C. 835년에 왕이 되어 남유대를 40년 통치한다. 제사장 여호야다가 살아 있을 동안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산당은 제거하지 않았고 그곳에 제사하기를 여전하였다. 요아스는 성전세를 거둬 훼손된 성전을 복원하였다(4-5). 그러나 그가 왕이 되고 23년이 흐르도록 이 일은 진척이 없었다. 이는 성전세로 자신들의 생계를 꾸리는 부패한 제사장들의 착복으로 지연된 것이다. 성전 재건을 제사장이 아닌 수리를 책임자에게 따로 맡기고, 성전세를 성전 입구에 두어 투명하게 모금하고 집행함으로 일이 빠르게 완료되었다(6-16).

 

이를 계기로 요아스 이후 요담에 이르기까지 앞으로 4대에 거치는 남유다 왕들의 통치가 비교적 선을 행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를 보면서도 알듯이 한 사람의 올바른 선택이 주의 일을 하는 데 상당한 선을 끼친다는 것을 본다.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신 9:5).”

 

하여 바울은 고백하기를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도 불가능함을 알린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곧 어려서 말씀으로 양육하고 주를 경외하는 데 따른 교육은 저의 일생을 좌우한다. 요아스가 성전에 숨겨져 제사장 여호야다 아래 유년기를 보냈으니, 비록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다 하나 주를 경외하는 중심을 지켰다. 시인은 늘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의 율례들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

(119:33).

 

이는,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9).

 

하는 시인의 완곡한 소망이 바탕을 이룬다. 모세는 기술하여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6-9).” 무엇보다 말씀을 중심으로 그 삶에 방향을 바로 하게 하였다. 왜냐하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저녁께 친구의 전화가 들어왔다. 통영 어디로 내려가는 길이라며 운전 중이었다. 평생 몸 담고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영화제 일을 그만두고, 여러 각도에서 할 일을 찾더니 무슨 굴 생산과 보급 사업장이 있는데, 거기서 홍보 쪽 일을 할 것 같다며 전혀 생소한 일에 뛰어든 것이다. 앞서 한 번 다녀간다 해서 언제쯤 오려는가 했더니 이미 일이 그리 결정이 돼서 가는 길이었다. 통영이 어디쯤인가 하고 찾아보니 남단 저 끝부분으로 최소 4시간 이상의 소요시간이 표기되어 있었다. 우리 나이 50대 중후반, 결코 늙지도 않고 젊지도 않은 나이에 새로운 도약이니 축하해야 하는데 나의 마음은 어딘가 허전하였다. 남은 제2의 인생을 운운하며 아무렇지 않게 굴지만 좋은 출발인지 어떤지… 나는 숙소는 어디고, 가족들과는 어찌 하고… 여러 궁금한 게 많았으나 운전중이라 통화음이 자꾸 끊겨 더는 길게 묻지를 못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물론 그 얘기는 있었으나, 어찌 됐든 교회 안수집사가 되어 나는 저가 저의 남은 생을 주의 일에 헌신하기를. 그 영화제와 관련된 지식을 잘 동원하여 이제 역사와 전통과 노인들만 남은 교회에서 다시 젊은 세대의 활력이 되어주기를. 전화로 가끔 대화하면서 언제 만나면 그 일을 두고 보다 구체적으로 저의 남은 길을 이야기해야겠다, 했던 것인데… 밤 시간을 이용해서 벌써 통영으로 가는 길이었으니, 그렇잖아도 며칠 전 동기들 모임에서 내 얘기가 나와 술 자리에서였기는 하지만 전화를 하였었다는데, 나에게는 아무 기록도 없었다.

 

나는 이른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다가 친구와의 통화로 마음이 우울해졌다. 좋아하고 가까이 지내온 사이라 더 할 말을 하지 못하고, 해주어야 할 말마저 주저한 것은 아닐까, 후회가 또 안타까움이 밀려들어 한동안은 뒤척거렸다. 우리가 산다는 일,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사 5:2).” 그 헛되고 고단한 삶에 대하여, 기어이 살아보고 그 답을 안다고 하면 더는 뭐라 할 수가 없기는 한 것이어서,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 하면 서로의 공통분모는 사라진다. 우리가 주의 것으로 살아도 주의 것이고 죽어도 주의 것이라 하면 함께 주의 뜻을 구할 텐데.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2-13).”

 

보면 특히 가깝다고 여기고 함께 자주 어울리던 친구들에게 주의 뜻을 바로 전하기가 어렵다. 그러니 내가 어찌 살았던가, 하는 게 알만하다. 함께 추구하고 바라던 삶에서 튕겨져 나오듯 더는 그 길을 가지 않는다 해서, 서로 상황이 다르나 서로의 대화는 더 이상 자연스럽지 않고 생각 또한 겉돈다. 그러니 함께 믿는 자로 부르시고 같은 곳을 바라보며 주를 바라고 살아가게 하심이 귀하다. 하나는 저쪽으로 하나는 이쪽으로 서서 서로의 길을 바라본다는 일은 슬프다. 아무리 외친들… “그러나 칼이 임함을 파수꾼이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여 백성에게 경고하지 아니하므로 그 중의 한 사람이 그 임하는 칼에 제거 당하면 그는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제거되려니와 그 죄는 내가 파수꾼의 손에서 찾으리라(겔 33:6).” 나는 저의 결정이 마치 내 책임인 것만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그리 결정할 거였으면 좀 더 일찍 서둘러 만나고, 앞서 주의 뜻을 말해주었어야 하는 것인데… 어떤 속상함 가운데서도 나는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붙들 뿐이다. 설마 이 나이에 통영 어디로 가서 굴 따는 작업을 하는 것도 아닐 테고, 전혀 낯선 곳에서 안 믿는 사람들과의 일이 해야 하는 것인데, 내가 아는 저는 호기롭게 떠나기는 하지만 혼자 있을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행여 어떠할지, 홍보 일이라고는 하는데 그게 또 어떤 일인지. 나는 너무 막연하여 감을 잡을 수가 없어서 답답하였다. 무엇보다 전혀 새로운 일에 남은 생을 도전해보겠다는 저의 말에 나의 마음은 응원보다 불안이 앞섰다. 우리가 살면서 더욱이 이제들 은퇴를 하고 그야말로 제2의 인생을 새로 도약해야 할 시기여서 이 일 저 일, 너무 많은 일들이 지뢰처럼 감추어져 무엇이 어떻게 터질지, 혹은 폭발하여 하나님과 더욱 멀어지게 할지, 우린 알 수가 없다.

 

그런 가운데 나의 조언이 저들에겐 '목사니까' 하고, 가벼이 듣고 마는 소리라, 돈벌이가 그 중심이 되는 선택을 두고 주를 바라고 헌신한다는 일이 소명없이는 결코 쉬운 결정일 리 없다. 하물며 본문의 제사장들도 성전세를 거둬 성전 재건과 증축을 미뤄가며 자신들의 생계를 우선하느라 23년이나 지연되었던 것을 보면…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하시는 말씀이 진정 비현실적인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모두가 목사가 되고, 선교사가 되란 소린 아니지만 친구가 그래도 섬기던 교회에서 퇴직을 할 즈음에 안수집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혼자 생각이 많았었다. 주가 주의 일을 맡기시려는가, 하고 기대도 컸다. 비록 자원하는 마음으로 안수집사가 된 것은 아니라 해도, 점점 노령화되는 교회를 영상이나 기타 영화제 경력을 살려, 청년들이 돌아오는, 뭔가 주의 뜻이 있지 않을까 하고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아,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 11:28).” 때론 갈 길을 알 수 없을 때,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 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아 1:8).” 믿는 자로 산다는 일이 저마다 주의 뜻을 따름인데, 목사나 선교사가 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나, 때론 교회에서 ‘앞서 가는 양 떼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것’도 필요하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사 43:19-20).”

 

한데 문제의 발단을 우선 자신이 아는 범주에서 그 일을 찾으려 하는 것이고, 더 큰 문제는 이를 위해 안 믿는 자라도 저들과 뜻을 같이 하고 그 권유를 성경의 가르침보다 앞세우는 것이다. 물론 그럴 수 있고 어쩌면 그러는 게 이 땅을 사는데 맞는 이치인지 모르겠다, 나는. 그저 자꾸 속상하고 마음이 아파 눈물이 날 것만 같다. 그것도 통영이라니, 일어나 앉아 지도를 보면서 긴 한숨을 쉬고 떨어진 거리만큼이나 너무 멀어서 마음이 아팠다.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 11:28).” 한 번 다녀가라는 말에 나는 울컥하는데 내색은 못하겠고, 부디 주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만을 바랐다. 

 

늘 내가 기도하는 것 중의 중심에는 함께 어울려 주를 멀리하며 지내던 사이의 친구들이 부디 거듭남으로 주를 영접하고, 전혀 새로운 새 사람으로 사는 일인데, 그래서 더 어렵고 긴 시간이 필요한가보다. 한때는 늘 나의 벗으로 누구보다 가깝고 내 무엇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을 사람들이었으니.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바울의 이러한 심정을 어찌 감히 나의 지금 심정으로 대신할 수 있겠나만. 한 친구는 여전히 선교를 운운하고 입만 열면 주를 전한다고 하면서 늘 저는 사업가로 동기들과 모여도 술자리로 하고, 그곳에 모이는 친구들 대부분이 믿는다는 친구들로 각자의 자리에서 주를 찬송하며 산다고 사는 이들인데… 나의 편협함 때문인가?

 

마치 성전을 재건하면서도 산당을 없애지 못하는 이스라엘 왕들의 두 섬김을 연상하게 한다. 그럴 정도였다면 어찌 바울은 그처럼 무모했던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다들 말하길 맥주 한 잔이 어때서? 우리의 술자리가 어때서? 하며 나의 신앙을 골수분자의 것처럼 여길 때도 있다. 한데 나는 그 ‘한 잔이 어때서!’ 하는 마음이 문제라고 본다. 술은 사람을 흥분하게 하고 풀어지게 한다. 그런 자리에서 나누는 이야기나 다음 행보는 나도 잘 안다. 한 잔이 어디 한 잔이 되던가? 이를 빙자하여 속엣 얘기가 나오고, 하면 사람으로 사람의 인정과 위로를 받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고. 그런 가운데 주를 찬양하고 주께 아뢰며 주께 기도할 수나 있던가? 마음이 중요하다면 그 자리로 보이는 것이다. 술은 말과 행동의 제지를 어렵게 한다.

 

저들이 부르거나 그런 자리에서 나와 통화를 하려 할 때 내가 깊이 있는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취한 사람한테 그런 말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고. 더욱이 목사인데?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4-5).” 앞서 나의 생각이 편협하고 어리석은 것이라 해도 나는 이제 다시 옛날처럼 타협하며 살 수 없다. 거의 평생을 그리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적당하다는 것은 선이 아니다. 그럼 악이냐? 하고 물을 때 악에 가깝지 선을 이루는데 도움은 안 된다. 적당한 세상과의 즐거움과 적당히 하나님을 따르는 일 따위들. 하나님을 믿고 세상 즐거움도 즐기면서 산다는 과연 가능할까?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일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 3:6-7).” 이 뚜렷한 구분은 확대되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이는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효도하겠다는 말보다 공허하다. 주께 향하는 마음이 나중으로 미뤄지면 부패와 타락뿐이다. 예수님은 이를 분명히 하시며,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곧 ‘아직 더 벌어야 할 나이’와 ‘일할 수 있는 나이’를 운운하며 세상을 기웃거리는 것과 그러므로 주를 온전히 바라고 따르려는 게 같이 가능한 일일까? 이는 다 노후걱정, 사는 데 따른 염려 때문인데,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34).”

 

얼마나 더 살지, 혹은 오늘이 될지 혹은 내일이 될지, 누가 그 남은 생을 가늠할 수 있을까?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한데 그게 그렇지가 않은 것은 건사할 가족도 있고, 아이들이 컸다 해도 자신의 생을 두고 뭔가 새로운 삶을 모색하는 일인데,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나의 후회는 저가 듣기 싫어해도 이 말들을 해주었어야 하는데, 그래서 언제 온다 할 때 누구와 같이 와서 소래포구에서 소주 한 잔 할까 한다는 말에 그리 말라고 했던 것까지 속상하고 아쉬움으로 남는 것이다.

 

그런 나의 우울한 심정을 아는지, 시편의 다윗이 노래로 기도한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40:1-2).

 

나는 주가 나를 어찌 수렁에서 건지셨는가 확신한다. 그와 같이 저들 또한 주의 자녀이면 그리하실 것을 믿는다. 우리의 결실은 인내로 맺힌다. 농작물이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나는 부지런히 전하고 또 보여야 한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히 10:36-37).” 그러므로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4).”

 

나는 속상하여서 돌아누워 일찍 잠을 청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데 자꾸만 울컥하였다. 이럴 땐 나 역시 의욕을 잃고 의기소침하게 된다. 다들 괜찮다고 하고 오히려 저의 도전을 응원하는데 나는 왜 마음이 어려운지 모르겠다. 이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그러니 이제 우리가 무엇으로 사는가? 그 뻔한 답을 두고 행여 더 멀리 돌아가는 게 아닌가 하고… 다만 주의 긍휼하심을 구할 뿐,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4-5).” 하면,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3).

 

나는 구하는 것이다. ‘새 노래’ 그 우리의 노래의 가치가 주께 있음을. 생의 고단하였던 시절을 지나 비로소 새 노래를 부르게 되었는데 옛 노래를 흥얼거리며,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고 옛 생활로 돌아가는 길이라면. 아, 나는 마음 같아서 통영까지 달려가고 싶었다. 저와 깊은 밤이 되도록 이와 같은 주의 뜻을 전하여 알게 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의 이름을 송축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

(96:1-2).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그는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의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음이로다

여호와께서 그의 구원을 알게 하시며

그의 공의를 뭇 나라의 목전에서

명백히 나타내셨도다

(98:1-2).

 

성경이 왜 이처럼 새 노래로 주를 찬송하게 하는지.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결국은 늙는 게 두려워서, 어찌됐든 아직 남은 때에 남은 힘을 다해 살 궁리를 하는 것일 텐데. 다들 그게 훌륭하고 옳다 하며, 아내마저 그의 선택을 응원하니까 나로서는 입을 다물 수밖에. 그럼에도,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열 줄 비파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144:9).

 

이는,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4).

 

더는 하나님을 부인하고, 사느라 열심인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모두가 저의 선택을 응원하는 것 같은데 나는 그렇게까지 생소한 일을 찾아 새로운 인생을 꿈꾸는 것이라면 주의 일도 많은데, 그동안 미루고 못 다했던… 그리하여 평신도 선교센터나 교육기관도 여러 곳 있는데. 우리가 노래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찬송은 모두의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6-17).”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5).

 

이와 같은 오늘 시편의 고백이 우리의 것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 6).” 이에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하시는 말씀을 되새기며 나는 남은 시편의 내용을 웅얼거린다.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7-8).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

여호와여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를 찾는 자는 다 주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11, 13, 16).

 

그리하여,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3).

 

비록,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

(17). 아멘.